소설리스트

강남화타-86화 (86/255)

# 86

2장, 게임의 법칙 (1)

수요일이 왔다.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난 한지호는 운기조식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단전의 내공이 온몸을 크게 한 바퀴 돌며 전신 세포를 일깨웠다.

땀구멍을 통해 밤 사이 쌓인 나쁜 기운이 배출 됐다.

운기조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건강이 좋아지고 수명이 늘어난다.

오금희가 왜 양생(養生)에 도움이 되는 기공으로 알려졌는지 알 것 같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라도 오금희를 따라 하기만 하면 양생이 가능했다.

한지호는 거기에 더해 막대한 내공과 무공을 쌓았으니 효과는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한 바탕 뜨거운 땀과 불순물을 쏟아낸 그가 눈을 떴다.

옷을 훌훌 벗자 조각처럼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완성의 경지에 접어든 한지호의 몸은 예술품 그 자체였다.

우락부락하진 않지만 몸을 쓰기에 가장 좋은 형태로 근육들이 자리잡았다.

민첩하고 날래게 움직이며 때로는 파괴력을 끌어내기 딱 알맞은 몸이다.

공교롭게도 요즘 트렌드인 잔근육으로 완성된 몸이기도 하다.

그는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대수롭지 않게 감상하며 샤워기에서 물을 틀었다.

쏴아아아아-

샤워 꼭지를 끝까지 돌려 엄청나게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보통 사람은 깜짝 놀라 샤워실 밖으로 뛰쳐나갈 일이지만 한지호는 태연하게 물줄기를 맞았다.

운기조식으로 몸이 달궈질 대로 달궈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뜨거운 물이라도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후우우욱!

갑자기 치솟은 열기로 인해 욕실 안이 희뿌연 수증기에 휩싸였다.

한지호는 한숨을 몰아쉬며 뜨거운 물로 몸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이열치열의 원리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곧이어 다시 샤워 꼭지를 중간쯤으로 돌린 그가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스트레칭을 하면 밤 새 굳었던 근육이 훨씬 잘 풀린다.

팔을 기괴한 각도로 꺾고, 허리를 반쯤 접었다 피며 스트레칭을 한 한지호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 조금 뒤면 서른이 된다.

스물아홉 한 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다이나믹했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했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거물들을 치료하며 원화 한의원까지 세웠다.

하늘이 내려준 기연에 피 나는 노력을 더해 만든 올 해의 성과는 목숨보다 소중했다.

이렇게 쌓은 것들을 잃고 싶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한 마음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지난 1년의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하기로 작정했다.

몇 시간 뒤 MBS의 상암 스튜디오에서부터 그 도박판이 열릴 것이다.

“꼭 해야 할 일을 마다하지 말자, 한지호. 없이 살아도 쪽 팔리게 살 수는 없잖아.”

한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건강백서, 진짜! 가짜!>를 통해 또 한 번 엄청난 폭풍이 불어 닥칠 것 같았다.

+++

“한 원장님!”

대기실 문을 열고 채성일이 들어왔다.

<건강백서, 진짜! 가짜!>의 연출을 총괄하는 채성일 PD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지호가 방송 직전에 새로운 대본과 VOD 파일을 건네줬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작가님께 전해드린 VOD 파일은 보셨습니까, PD님?”

“네, 방금 보고 놀라서 바로 달려왔습니다.”

“보신 그대로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됐는데 원래 의도대로 방송을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한지호의 말에 채성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오늘 한지호가 다룰 아이템은 백수오였다.

한지호의 제안으로 받아들여진 아이템이고, 백수오의 효능과 저렴한 가격 등을 알리는 내용으로 대본과 영상이 준비 됐다.

양승찬이 물러가고 새롭게 합류한 서양 의학 전문의도 백수오 만큼 저렴하면서 효능이 좋은 비타민 주사에 대해 다룰 예정이었다.

그런데 한지호가 갑자기 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평소보다 일찍 방송국에 도착한 한지호는 메인 작가에게 직접 작성한 대본과 USB를 넘겼다.

USB 안에는 한지호가 국내 주요 업체에 납품되는 백수오가 가짜임을, 즉 이엽우피소임을 밝혀내는 동영상이 담겨 있었다.

한지호가 써온 대본과 영상을 바탕으로 방송을 내보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채성일은 방송국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PD다.

책임 연출을 맡을 정도면 현역의 PD들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세대라고 봐야 한다.

그가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예상하지 못할 리 없었다.

단순히 방송 내용을 바꾼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엄청나기에 부리나케 대기실로 달려온 것이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한 원장님?”

“만약 원래 컨셉대로 방송을 내보내고, 나중에 가짜 백수오 문제가 터지면 우리가 책임을 뒤집어 쓸 수도 있습니다. 그게 더 큰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백수오라는 아이템 자체를 빼 버리는 게 어떨지 싶습니다. 급하게나마 다른 아이템으로 오늘 촬영을 진행하고 말입니다.”

“저는 사실 채 PD님이 더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국내 주요 업체에서 원료로 사용하는 백수오가 가짜라는 거, 엄청나게 매력적인 방송 아이템이잖아요.”

한지호의 말에 채성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시청률이 생명인 PD 입장에서는 더 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아이템입니다. 주요 업체들의 백수오가 알고 보니 이엽우피소였다? 아마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인터넷 뉴스와 게시판에서 난리가 날 겁니다. 다이어트 한약 때보다 뜨거운 반응이 돌아오겠죠. 하지만 제가 한 원장님과 잠깐 보다 말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벌써 한 계절 가까이 같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PD는 시청률도 생각해야 하지만, 출연자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안 그래도 한의학 업계에서 우리 프로그램 때문에 한 원장님을 고깝게 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짜 백수오까지 방송으로 나가면… 모든 원망과 화살이 한 원장님께 날아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한지호는 말을 아낀 채 채성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시청률이나 프로그램의 화제성 이전에 출연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가 와닿았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인상대로 채성일은 진정성이 있는 PD였다.

더럽기로 유명한 방송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프로듀서인 것이다.

끼이익-

한지호가 대기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채성일 PD와 눈을 맞춘 한지호는 굳은 의지를 담아 입을 열었다.

“저를 걱정해주는 채 PD님의 진심은 가슴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그래도 가짜 백수오 고발…… 걸러내지 않고 이대로 가겠습니다.”

“한 원장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직접 찍어 오신 영상을 바탕으로 오늘 촬영 내용을 바꾸는 것, 후회 없으시겠습니까?”

“갑시다.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죠.”

한지호와 채성일의 눈빛이 얽혀들었다.

굳건한 시선, 흔들림 없는 눈동자.

더 이상의 질문과 확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후폭풍이 어떻게 오든 결정을 내렸으면 지르고 보는 것이다.

채성일은 더 이상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책임 PD로서 일을 진행시켰다.

“당장 영상 새로 편집하고, 한 원장님이 써오신 대본 바탕으로 메인 작가가 다시 교정을 보게 하겠습니다. 영상을 워낙 잘 찍으셔서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난리 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채 PD님만 믿고 따라갑니다.”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연출자와 출연자 사이에 이보다 더 끈끈한 신뢰가 형성되긴 힘들어 보였다.

한지호의 도박을 채성일이 받아주며 일이 아주 재밌게 흘러갈 것 같았다.

오늘 촬영분이 전파를 타고 각 가정의 TV에 떠오르는 날, 대한민국은 거대한 백수오 스캔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백수오를 원료 삼아 다양한 한약 제품을 만들어 팔던 회사 대부분이 값싼 중국제 이엽우피소로 국민들을 우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직전이었다.

한지호에게 백수오 홍보를 부탁했던 국회의원 민시헌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느낄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한지호는 잠재적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국회의원과 척을 지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기로 결단했다.

이미 알게 된 문제를 눈 감고 어물쩍 넘기는 건 의원으로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모든 것을 잃을 각오도 마쳤다.

가짜 백수오, 이엽우피소의 실체를 폭로하는 건 일종의 도박이다.

수많은 국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반대로 백수오 업체와 한의학 업계 그리고 무엇보다 민시헌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셈이다.

과연 이 도박에서 최후에 웃는 사람은 누가 될지 섣불리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한지호는 스스로의 선택을 믿을 따름이었다.

소수의 권력자나 업계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을 위한 선택이 가장 강력한 카드가 될 거라고 믿는 한지호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때로는 실리보다 명분을 선택하고, 천하의 대의를 생각해야 할 순간도 있는 법이다.

한지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머지않아 윤곽이 드러날 것 같았다.

+++

“후우-.”

한지호는 대기실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방송국에 소속된 코디가 화장을 지워주고 밖으로 나간 지 5분 정도 흘렀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짐을 챙겨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체력이 방전된 것 같은 기분이라 대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다음 일정도 없으니 이대로 조금 쉬었다가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촬영 스튜디오에서 국내 주요 업체들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가짜 백수오를 고발했다.

원래 계획을 변경해서 이엽우피소 문제를 폭로했기에 어느 때보다 피로감이 컸다.

스튜디오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심적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

억눌러 놓았던 식은땀이 촬영이 끝나자 흘러내려 등줄기를 적셨다.

똑똑!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한지호는 채성일 PD일 거라 생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앉은 채 고개만 돌린 한지호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문 아나?”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한 원장님.”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한지호가 소파에서 일어나 문주연을 쳐다봤다.

MBS에서 밀어주는 간판 아나운서 문주연이 한지호의 대기실로 찾아온 것이다.

촬영이 끝난 후 메인 MC인 문주연 아나운서와 고정 패널인 한지호가 굳이 따로 만날 이유가 없다.

가끔 스튜디오 안에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촬영 중의 일이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난 후 대기실 안에 둘만 있게 된 건 처음이었다.

“오늘 유독 긴장하셨던 것 같아서요. 워낙 민감한 아이템이었고, 그나마도 촬영 직전에 변경됐다고 들어서… 그냥 걱정 되어서 와봤어요.”

“긴장한 게 티가 났나보군요.”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더 힘을 내서 자연스럽게 촬영에 임하셨으니까. 카메라가 아닌 MC의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조금 다른 게 느껴져서요.”

“솔직히 쉬운 촬영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방송이 나가면 굉장히 시끄러워지겠죠.”

“각오 한 일입니다.”

“그런 각오를 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실행할 수 있다는 거. 보통은 몸을 사리기 마련인데 한 원장님은 그런 게 없어 보여서 신기해요.”

문주연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한지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얼굴.

모든 남자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는 이지적이면서도 단아한 이목구비가 마음을 흔들 만도 했다.

게다가 문주연이 먼저 찾아와 한지호를 염려해주는 상황이다.

누구라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설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방송이 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오겠죠. 이제부터는 마음을 비우려 합니다.”

정론이었다.

대신 그만큼 벽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문주연의 걱정을 고마워하면서도 선을 넘는 걸 미리 차단하고 있었다.

재벌가의 며느리감 1순위로 손꼽히는 미모의 아나운서도 한지호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그의 머리는 원화 한의원과 백수오 문제로 가득 차 있었고, 마음은 천사원과 이지은 외의 빈틈을 찾기 힘들었다.

더구나 지난 1년의 삶을 건 도박을 벌였기에 시작된 게임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벽을 치는 태도를 느꼈는지 문주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문주연은 다시 문을 열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한지호는 그녀가 들어오기 전처럼 소파에 몸을 묻었다.

커다란 폭탄을 떨어트렸기 때문에 조금은 더 게으름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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