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85화 (85/255)

# 85

1장, 진짜, 가짜! (2)

한지호는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다.

나이는 어려도 누구보다 신중한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의 신뢰를 사왔다.

때때로 무척 과감한 표현을 하지만, 100% 자신감이 있는 경우에만 그러했다.

그가 한의사 면허를 걸겠다는 말을 할 정도면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섰다는 뜻이다.

최치우는 한지호를 바라보며 아랫배에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서로의 친분이나 우애를 따지기 이전에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문제였다.

자칫하면 최치우의 약초꾼 경력과 자존심에 크게 상처가 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한 번 들어봐야겠네. 대체 어째서 처음 것만 빼고 나머지 백수오들이 가짜라는 것인가? 내 보기에는 의심할 구석이 많지 않은데 말이네.”

한지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짜라고 언급한 첫 번째 백수오를 들었다.

“최 사장님,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구분하기 무척 어렵지만 회황색이지 않습니까.”

“회황색.”

“네. 아주 미세하지만 색이 더 옅습니다. 그에 반해 나머지 것들을 살펴보면 회갈색입니다. 조금 더 진한 갈색이 섞여 있습니다. 특히 뿌리 부위의 단면을 보면 색깔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크흐으음…….”

최치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백수오들을 살펴봤다.

그는 곧 한지호가 말한 부위에서 미세하나마 분명한 색깔 차이를 감지해낸 것 같았다.

회황색과 회갈색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색약이다.

게다가 색약이 아닌 정상 시력을 가졌어도 회황과 회갈의 미묘한 색감 차이를 단번에 잡아내긴 무척 어렵다.

“분명히 뭔가 다르긴 다르구만.”

최치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색깔의 차이만으로 나머지 백수오를 가품이라 인정할 순 없었다.

여기 놓인 백수오들이 가품이라면 국내에 유통되는 백수오 가공 상품 대다수가 가짜라는 뜻이 된다.

그야말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사실이다.

최치우는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야수 같은 눈빛을 뿜어냈다.

“허나 색감의 차이만으로 진품과 가품을 단정 지을 수 있는가?”

“단면도 살펴보시죠.”

한지호가 백수오 두 개를 들었다.

하나는 진품으로 판정한 첫 번째 백수오였고, 나머지 것은 내추럴 코리텍에서 원료로 쓰는 것이다.

그는 두 개의 잘린 단면을 최치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제가 진품이라 말한 백수오의 단면이 훨씬 더 까칠까칠해 보일 겁니다. 질감이 균일하지 않다는 뜻이죠. 반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단면의 질감이 맨들맨들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자네 말대로 질감 차이가 있구만.”

“내추럴 코리텍의 백수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첫 번째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모두 살펴보면 하나같이 단면의 질감이 거칠지 않습니다.”

최치우는 말을 잊고 다른 백수오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샘플 테스트를 위해 직접 각 제조업체의 백수오 원제품을 구하면서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다.

베타랑 약초꾼 출신인 최치우도 간과한 미세한 차이들이다.

최치우의 잘못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저 한지호가 특출 난 별종일 따름이다.

그는 명징약초에 들어서서 탁자 위의 백수오들을 살펴보자마자 진위 여부를 간파해냈다.

“정말, 정말로 나머지 것들이 모두 가짜 백수오란 말인가?”

최치우는 차라리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았다.

가품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그깟 자존심에 휘둘리며 사는 소인배는 아니다.

다만 여기 있는 백수오들이 가품일 경우 국내 한의학 업계는 태풍을 맞은 듯 뒤집어질 것이다.

한지호가 <건강백서, 진짜! 가짜!>에서 다이어트 한약의 실태를 고발했을 때와 비교도 안 될 후폭풍이 몰아칠 게 분명했다.

단순히 백수오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전반적인 한약 관련 제품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일선 한의원과 한약방 등 한의학 업계 전체가 침체될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한지호 역시 굳은 얼굴이었다.

그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전혀 짐작도 못 했었다.

안 좋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내추럴 코리텍의 제품을 알아보고 별 문제가 없으면 방송에서 백수오를 다루려고 마음먹었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마다 할 일이 아니었다.

이를 바탕으로 야당의 거물 국회의원에게 빚을 지워두면 추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런데 문제가 꼬여 버렸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내추럴 코리텍을 비롯한 주요 업체에서 원료로 삼는 백수오가 가짜라는 걸 알았으니 이대로 방송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국민들에게 가짜 백수오로 만들어진 제품을 추천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치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최 사장님, 만약 맛을 봤다면 쉽게 구분을 하셨을 겁니다. 육안으로 판별하긴 힘들어도 약초의 향과 맛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요.”

한지호는 약초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으로 이미 가품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육안으로는 한지호가 짚어낸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맛을 본다면 한 때 약초꾼 바닥에서 전설로 통했던 최치우도 문제를 알아차릴 것이다.

한지호는 말없이 가품 백수오의 뿌리 끝을 손으로 떼어 냈다.

내추럴 코리텍에 공급된다는 바로 그 백수오였다.

“커흠-!”

맛을 보자마자 최치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지호 역시 더욱 어두워진 낯빛으로 최치우를 쳐다봤다.

더 이상 묻고 따지고 할 필요도 없었다.

가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가짜 백수오로 만들어진 한약품이 국내 시장에 유통되고 있다.

게다가 선두 업체인 내추럴 코리텍은 대선 후보로 분류되는 국회의원 민시헌의 비호를 받는다.

뭐라고 말을 하기도 힘들 만큼 복잡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건…….”

“이엽우피소입니다.”

한지호가 가짜 백수오의 정체를 언급했다.

이엽우피소.

백수오와 유사하지만 약효는 없는, 오히려 장기간 복용할 시 간독성 작용을 일으키는 무용한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거 참, 난국이네. 난국이로다.”

최치우가 혀를 끌끌 찼다.

한지호는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진짜 백수오 하나와 나머지 이엽우피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앞길에 또 다시 거대한 장애물 하나가 나타난 것 같았다.

+++

“왜 그래, 오빠?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아.”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각.

한강 잠원지구 근처의 아지트 카페에서 만난 이지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한지호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지은은 얼마 전 일본 쇼케이스를 마치고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와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짬을 내서 한지호와 심야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문득 문득 넋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혹시 전에 말한 그 환자 때문이야? 전설적인 조폭이라는 환자?”

“아… 마창우 환자. 아니, 그 환자의 치료는 잘 끝나가고 있어.”

한지호는 미안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자친구를 눈앞에 두고 자꾸 딴 생각을 한다는 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꾸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사실 마창우의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잘린 손가락의 환상통은 순조롭게 치료되고 있지만, 그가 치료의 대가로 제시한 사업 투자권이 문제였다.

한지호는 아직 내국인 카지노 사업에 투자를 해야할지 여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심하기에 앞서 더 큰 암초를 만났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민시헌의 청탁을 받고, 백수오를 방송 아이템으로 다루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진실을 알아버렸다.

민시헌과 관련 돼 있는 내추럴 코리텍을 비롯한 국내 주요 업체들이 백수오 대신 값싼 중국산 이엽우피소를 쓴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웬만해서는 절대 알아내기 힘든 일이었다.

사실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백수오 관련 제품을 만드는 업체들이 이엽우피소를 쓸 거란 생각 자체를 하기 힘들다.

게다가 각 업체에서 가공하기 전 상태의 백수오 원형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없다.

명징약초의 최치우가 약재상 사이에서 워낙 발이 넓고 인망이 깊기에 원재료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설령 운이 좋아 원재료 상태의 백수오를 봐도 진위여부를 판별하기는 힘들다.

전설적인 약초꾼 출신의 최치우조차 백수오와 이엽우피소를 육안으로 구분해내지 못했었다.

의심, 아니 확신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알아낼래야 알아낼 수 없는 문제였다.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등잔 밑의 어둠처럼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니 말이다.

만약 한지호가 민시헌의 청탁을 받지 않았다면, 그리고 방송을 위해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오랜 시간 알려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한지호는 속을 시끄럽게 만드는 이 거대한 문제를 이지은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가뜩이나 다시 바빠진 그녀의 머리까지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좀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 있는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어서. 미안해, 지은아. 지금부터 딴 생각은 잠시 꺼둘게.”

한지호의 말에 이지은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젓는 모습마저도 CF의 한 장면처럼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지은은 보이는 이미지처럼 마냥 어리기만 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한지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데이트라고 해서 그냥 웃긴 이야기만 하고, 맛있는 거나 먹는 게 전부가 아니잖아. 오빠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고 싶어. 도움은 안 되어도 말야. 그리고 내가 하는 고민들도 오빠한테 털어놓고 싶구. 우린 남이 아니니까.”

진심이 담긴 이지은의 말이 한지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살짝 상체를 기울여 맞은편에 앉은 이지은의 이마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가볍게 스킨십을 한 한지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야지. 내가 한참 오빤데도 너한테 배우는 게 더 많다.”

“당연하지, 에헴.”

이지은이 장난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한지호는 이전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곧이어 그가 마음 속 고민을 털어놓았다.

민시헌 의원의 이름이나 자세한 사실을 말하지 않고도 대략적인 정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센스 넘치는 이지은은 간단한 설명만 듣고도 한지호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유추해냈다.

“……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 중인 거지.”

“지호 오빠. 그러니까 오빠만 알게 된 엄청난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릴지 말지 고민이라는 거잖아, 그치? 만약 문제를 터트리면 연관된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야 하고, 사회적인 후폭풍도 감당해야 하고.”

“그렇지.”

“어려운 문제이고, 오빠가 무거운 짐을 지는 게 싫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오빠라면 꼭 해야 할 일을 마다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 문제를 알리는 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시간이 걸려도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오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그게 정답이긴 한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야 하니까. 다이어트 한약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될 거야, 아마도.”

“겁 먹지 마, 지호 오빠. 오빠답지 않잖아. 만약 문제가 생겨서 한의원까지 날아가도 내가 노래 불러서 오빠 먹여 살릴게.”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이지은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그녀의 말이 한지호에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큰 위안을 줬다.

여자친구의 응원이 이토록 큰 힘이 된다는 걸 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한지호는 이지은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꼭 해야 할 일을 마다하지 말라……. 사람들은 결국 진심을 알아준다.”

“다른 사람들이 몰라줘도 나는 늘 오빠 편에 서있을 거야.”

“겁 내지 않을게. 내가 언제부터 잃을 게 있었다고.”

한지호는 몸 안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가볍고 일상적인 연인과의 대화를 통해 머릿속의 어두운 안개가 탁 걷힌 기분이었다.

뜻하지 않게 나타난 장애물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은 정해지지 않았어도 비로소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마주 앉은 이지은이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이 여자는 진짜다.

한지호는 그런 확신을 받으며 이지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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