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장, 발 없는 말 (1)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고, 한 번 구설수에 오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덩치를 키우며 멀리 멀리 퍼지는 법이다.
한지호가 김일은을 반 불구로 만들고, 대포차 조직을 박살낸 것도 2주 전의 일이다.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버린 대포차 조직에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도 못 내는 것 같았다.
열 명 안팎의 조직원 중에서 무려 일곱 명이 한지호의 얼굴만 떠올려도 식은땀을 줄줄 흘릴 정도의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한지호 한 명으로 인해 작은 규모의 조직 하나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음지에서 활동하던 대포차 판매 조직의 몰락은 뉴스 거리도 안 됐다.
그보다는 한국 한약 협회가 검찰의 표적이 되고, 협회장 김일은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게 훨씬 더 많은 화제를 낳았다.
한지호가 넘긴 usb는 서대문 경찰서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사건은 곧장 검찰로 넘어갔다.
요즘 계속 언론의 질타를 받았던 검찰에서는 한국 한약 협회 수사에 열을 올렸다.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사건으로 검찰의 이미지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증거는 차고 넘치기에 검찰 입장에선 누워서 떡 먹는 격이었다.
한국 한약 협회의 불투명한 회계 처리, 협회장 김일은의 공금 유용과 횡령 혐의 및 뺑소니 사주는 검찰에게 아주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검찰은 고위층 접대 의혹으로 사건을 확대시키며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한국 한약 협회의 모든 업무는 마비 됐고, 김일은은 구속 수사를 받게 됐다.
뺑소니 사주라는 혐의가 확실한 이상 구속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전국의 크고 작은 한약방들을 상대로 큰소리를 떵떵 치며 협회비를 상납 받던 전설적인 약초꾼 출신의 김일은은 하루아침에 초라한 처지가 됐다.
왼팔을 부여잡고,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구속이 된 김일은은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몸소 증명했다.
그동안 울며 겨자 먹기로 고액의 협회비를 상납하던 한약방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국 한약 협회에서 탈퇴했다.
협회장이 구속되고, 모든 업무가 정지 된 상황에서 한국 한약 협회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접대를 받았던 보건복지부와 식약청의 고위층도 검찰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꼬리를 잘라내려 애썼다.
이대로 한국 한약 협회라는 단체 하나가 공중분해 될 것 같았다.
한국 한약 협회는 전국 한의원 연합회와 더불어 한의학계를 대표하는 협회 중 하나였다.
정치적, 재정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곳이다.
그런 단체가 이토록 허망하게 몰락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의학계 내부에서는 한국 한약 협회의 몰락을 두고 이런저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다들 배후에 원화 한의원 한지호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에서 다이어트 한약을 다룬 이후 한국 한약 협회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성명서를 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 수사를 통해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일은이 원화 한의원에 약재를 공급하는 최치우의 뺑소니 사고를 사주한 것도 믿기 어려웠고, 과정은 모르지만 모든 증거가 낱낱이 드러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을 위협한 김일은과 한국 한약 협회에게 본때를 보여줬다.
어디 본때를 보여준 것뿐인가.
상대를 뿌리째 뽑아내며 짓밟았고, 원화 한의원을 잘못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는 걸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다.
그가 어떻게 증거를 찾아냈고, 또 검찰 수사 외에도 김일은과 대포차 조직에 어떤 방식으로 복수를 했는지 자세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지호가 손을 써서 김일은과 한국 한약 협회를 몰락시켰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적어도 한의학계 내부에서는 한지호를 새롭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TV에 나와 반짝 인기를 끈 젊은 한의사, VIP 전문 시스템으로 강남에서 돈을 잘 버는 한의원 원장 정도가 이전까지의 평가였다.
그러나 김일은의 구속 이후 한의학계 내부에선 한지호를 위험한 인물로 분류하게 됐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인물, 뭔지는 모르지만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평가한 것이다.
새로운 시스템으로 원화 한의원을 키워나가며 방송을 통해 인지도를 쌓고 있는 한지호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평가였다.
기존 한의학계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이제 어설프게 한지호를 건드릴 사람이나 단체는 줄어들었을 게 분명하다.
원화 한의원 원장 한지호.
그의 이름 석 자가 대중들을 넘어 한의학계의 거물들에게도 각인되기 시작했다.
원래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업계 내부의 평가가 더 중요하고 정확한 법이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인물이라는 평가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김일은에게 복수를 한 것 이상의 수확을 얻은 셈이다.
일석이조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았다.
한지호에 관한 소문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천리를 떠돌았고, <건강 백서, 진짜! 가짜!>와 원화 한의원은 날이 추워질수록 더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천사원 재건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한지호는 인생이 바뀐 올해의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전력질주 할 태세였다.
한국 한약 협회라는 장애물을 넘어선 이상 당분간 그를 막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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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어떠세요?”
한지호가 자택으로 찾아온 최치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최치우는 지난 2주 동안 한세 병원의 재활 치료와 한지호의 침 치료를 병행해서 받았다.
그래서일까.
한세 병원 의료진이 깜짝 놀랄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빨랐다.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신경 손상이 매우 염려되는 상황이었는데, 감각을 되찾는 속도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스스로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음을 느끼는 환자는 성격이 밝아질 수밖에 없다.
몸이 낫고 있다, 는 것만큼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일도 드물다.
최치우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커허허허! 쥐가 난 것처럼 얼얼하던 느낌도 많이 줄었고, 왼팔을 움직일 때 느껴지던 통증도 완화 됐네. 의사 말로는 근력과 신경이 동시에 회복되고 있다더군. 모두 자네 덕일세!”
“최 사장님이 성실하게 재활과 치료를 받아서 그런 거죠. 어디 한 번 볼까요?”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최치우의 왼팔을 살펴봤다.
최치우는 치료를 받기 위해 반깁스를 풀었다.
그의 왼팔은 겉보기에도 2주 전보다 훨씬 호전 된 것 같았다.
실밥이 뽑힌 자리를 뒤덮고 있던 흉한 딱지가 떨어졌고, 새 살이 돋아나는 중이었다.
아마 수술 부위에 흉터가 남겠지만, 최치우는 상처 자국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었다.
딱지가 떨어진 것만으로도 한결 보기 좋아졌고, 이제 왼팔에 직접 침을 놓아도 될 정도였다.
“어떤가? 많이 나아졌지?”
최치우가 연신 웃음을 흘리며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도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좋아졌네요. 감각이 어느 정도 돌아왔는지 테스트 해볼게요.”
“그래보게.”
한지호는 준비해둔 침을 들어 최치우의 왼쪽 팔꿈치 아래에 꽂았다.
이제까지는 오른팔과 목 뒤, 그리고 귀에만 침을 놓았었다.
2주 만에 처음으로 수술을 한 왼팔에 직접 침을 놓은 것이다.
“으흠!”
최치우가 살짝 신음을 흘렸다.
인상을 찡그리는 걸 보니 제법 아픈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한지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통각에 반응을 하시는군요.”
“으음, 거 무슨 말인가?”
“일부러 통증을 느끼기 쉬운 혈도에 침을 놓았습니다. 최 사장님이 얼마나 반응하는지 보려고요.”
“제법 아팠다네.”
“네. 보통 사람이었으면 눈물을 찔끔 흘렸을 겁니다. 최 사장님의 인내력이 워낙 강하고, 아직 왼팔의 감각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아서 그 정도에 그친 거죠.”
“침을 맞자마자 짜릿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올라 온 게야. 고통을 느낄 수 있어서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네, 커허허!”
뭐든 잃어봐야 소중함을 안다고 했던가.
최치우는 통증을 느꼈다는 사실에도 감사하고 있었다.
남의 팔을 붙여놓은 것 같았던 왼팔이 다시 자기 팔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다른 침을 들었다.
“귀침의 효과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최 사장님이 완치되면 우리 한의원에 수술 후유증 클리닉을 개설해야겠어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일세. 나처럼 원인 불명의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나? 자네가 나서서 클리닉을 개선하면 그만큼 좋은 일이 또 없겠구만.”
“지금은 매출이 다이어트 한약에 집중되어 있는데 슬슬 다각화를 시켜야죠. 다양한 환자들을 치료해야 한의원도 저도 계속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
한지호는 최치우를 치료하며 쌓은 경험을 진료에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알게 모르게 수술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이 많다.
교통사고 수술도 수술이지만, 암 수술을 받은 후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상당하다.
귀침을 이용해 다양한 수술 후유증을 치료하는 클리닉을 열면 반응이 뜨거울 것 같았다.
한지호는 전생의 지식과 폴 노지에 박사가 창안한 귀침 학문을 조화시키며 자신만의 의술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도 시작해볼까요?”
한지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최치우가 오른팔을 내밀었다.
어떤 순서로 침을 놓는지 알기 때문이다.
2주 동안 매주 화, 목, 토 세 번씩 침을 맞았기에 치료법이 몸에 익을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최치우의 오른팔에 연달아 침을 놓았다.
반대쪽 팔을 자극해 왼팔의 신경을 자극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웬만한 한의사들은 다들 시도할 수 있는 치료법이다.
진짜 하이라이트는 역시 귀침이다.
귀침 역시 한의사들뿐 아니라 민간 의술을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의술이다.
하지만 제대로 귀침을 놓고 효과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알려졌다시피 귀는 대단히 민감한 부위인데, 잘못 건드리면 시신경이 손상되어 실명을 초래하기도 한다.
한의학적 관점에서는 두뇌와 가깝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원형인 태아의 몸을 닮았다는 점에서 귀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서양 의학의 관점에서 봐도 귀는 무척 독특한 기관이다.
이토록 중요하고 특별하지만, 물리적인 크기는 작은 귀라는 부위에서 제대로 혈도를 찾아내 침을 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설프게 귀를 건드렸다간 실명까지는 아니라도 괜한 부작용만 일으키기 십상이다.
시중의 수많은 귀침 전문가들 중에 제대로 치료 효과를 내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에 반해 한지호는 수술을 집도한 의사도 고개를 내저었던 최치우의 왼팔 감각을 귀침으로 회복시키고 있었다.
“이제 귀로 갑니다.”
“그러게.”
오른팔에 침을 다 놓은 한지호가 새로운 침을 손에 들었다.
주로 기다란 장침을 쓰던 것과 달리 짧은 길이의 단침이었다.
귀라는 신체 부위의 특성상 단침으로 혈도를 정확하게 자극하는 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꾸욱-
첫 번째 침은 귀 중앙에 꽂혔다.
귓바퀴와 귓구멍 안쪽의 경계를 이루는 성(sung)이라는 부위다.
우리말로는 귀대나 귀축이라고도 불린다.
귀를 웅크린 태아의 모양이라고 보면 정확히 팔에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크흐음…….”
최치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웬만한 고통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최치우지만, 귀침의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2주 넘게 맞아도 적응되는 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귓바퀴를 비롯해 가장 예민한 부위인 귓구멍 안쪽 연골에도 짧은 침을 놓았다.
“큼!”
최치우가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냈다.
그는 나름대로 아픈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민망하게 침을 맞으며 신음을 내뱉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귀침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귀에 이어 뒷목에도 침을 더 놓은 한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침을 놓는 것이기에 10분 남짓한 시간이 한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었다.
“후우- 오늘도 잘 끝났습니다. 제가 봤을 때 한 달이면 최 사장님의 왼팔은 사고 당하기 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겁니다.”
“커허허, 커허허허! 지금도 너무 빨리 낫고 있어서 놀랍기만 하다네. 한세 병원에서도 내 감각과 근력의 회복 속도가 젊은 친구들보다 빠르다고 놀라워하더구만.”
“더 놀라게 만들어야죠.”
“전에는 수술을 해준 의사가 질문도 했었다네. 따로 무슨 치료를 받느냐고.”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침을 맞는다고 했지. <건강 백서, 진짜! 가짜!>에 나온 유명한 한의사한테 말이야, 커허허허.”
“의사들은 한의학 시술을 별로 안 좋아할 텐데요.”
“그래도 어쩌겠나. 신경 손상은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었는데, 이렇게 빨리 회복되고 있으니 의사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게지.”
최치우는 한지호보다 더 당당하게 말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한지호의 의술을 믿었고, 자기 몸으로 한의학의 힘을 증명해내고 있었다.
한지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학과 한학의 장점만 취해서 빨리 낫는 게 중요하죠.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양학이건 한학이건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한세 병원에서 수술을 잘 해줬고, 훌륭한 재활 치료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기에 제 침술의 효과도 빨리 나타나는 겁니다.”
“자네는 정말 참 의원일세. 아니, 의원 이전에 된 사람이야. 그렇고말고.”
최치우는 한지호의 태도에 감동한 듯 큰 눈을 꿈뻑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한 시간에 침을 거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최치우의 완쾌를 자신했고, 귀침이라는 비기(秘技)로 원화 한의원의 지평을 넓히겠다고 마음먹었다.
장애물을 발판삼아 추진력을 얻어 더 높이 뛸 기틀을 마련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