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장, 발 없는 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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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의 브랜드 마케팅을 담당하는 PR 회사에 지령을 내렸다.
다양한 종류의 수술 후유증 치료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물론 여느 한의원처럼 아파트 단지에 전단지를 돌리거나 홈페이지에 배너 몇 개를 띄우는 방식의 홍보를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원화 한의원의 핵심 고객층인 상류층들을 대상으로 입소문이 퍼지게끔 마케팅을 하라는 어려운 미션이었다.
하지만 원화 한의원의 브랜드 마케팅을 총괄하는 PR 회사에 거금을 주는 고객의 입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였다.
사실 경제적인 측면만 따지면 원화 한의원은 자리를 잡았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의 여파가 워낙 컸기에 다이어트 상담을 받으러 오는 강남 사모님들만 상대해도 나날이 흑자를 쌓아갈 수 있다.
한지호는 오행 체질에 맞춰 정확한 처방을 내렸고, 한 번 내방한 환자들의 만족도도 상당히 높았다.
그렇기에 계속 다이어트 한약과 침술을 주력 상품으로 삼아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원화 한의원을 바탕으로 더 큰 그림을 그리려는 한지호는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양한 치료로 보다 큰 거물 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한 첩에 몇 백만 원이 넘는 다이어트 처방도 무시 못 할 수입원이다.
그러나 VIP의 수술 후유증을 치료하거나 난치병을 낫게 해주면 한 번에 1억이 넘는 돈을 벌 수 있다.
또한 한의사로서도 어려운 병에 도전하고픈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최치우의 수술 후유증을 귀침으로 치료해가며 자신감을 얻은 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의 주력 분야를 넓힐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적자를 면하고 흑자를 내는데 급급해야 할 타이밍을 예상보다 일찍 넘겼기 때문이다.
그는 PR 회사에 홍보를 맡기는 것과 별개로 방송에서도 관련 아이템을 준비했다.
TV 프로그램의 파급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를 통해 충분히 경험했다.
3화, 4화의 시청률은 계속 올라가 10%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황금 시간대이긴 해도 보통 금요일은 일주일 중에서 시청률이 가장 떨어지는 날이다.
그런데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의학 예능이 10%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건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MBS 방송국에서는 국장이 직접 치하를 하며 건강 백서 팀의 사기를 북돋았고, 제작진과 출연진도 기대 이상의 인기와 영향력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한지호는 자신이 얻은 힘을 마음껏 사용할 작정이었다.
오남용을 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손에 들어온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그것도 멍청한 일이다.
그는 다가오는 촬영 아이템으로 ‘한의학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민감한 주제를 선정했다.
다이어트 한약의 허와 실을 다룬 2화 만큼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지금도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들은 한의학의 효능을 부정하고 있다.
환자들 사이에서도 한의학을 신봉하는 사람부터 사이비 민간요법으로 여기는 사람들까지 스펙트럼이 무척 넓고 다양하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있다.
대부분 한의학을 예방 차원의 의술로 여긴다는 점이다.
병이 걸리기 전에 보약으로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예방을 하는 것, 그리고 침술이나 한약으로 아주 간단한 증상 정도만 치료하는 것이 한의학의 전부라고들 생각한다.
한지호는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그러한 상식을 깨부수려는 것이다.
그는 한의학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규호의 의술을 습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황만금의 태자병과 김해수의 구음절맥, 그리고 최치우의 수술 후유증을 치료한 것만 믿고 한의학의 한계라는 아이템을 선정하지는 않았다.
시청자들, 즉 대중은 보다 확실한 증거와 압도적인 권위를 요구할 것이다.
한지호는 한의학의 한계를 깨트리기 위해 철저히 준비를 했다.
미국 연방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대체의학 국립센터는 지난 10년 동안 한의학 등 동양 대체의학 연구비로 10개 의대와 2개 간호대에 무려 2250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진 나라다.
그런 미국에서 연구비가 몰린다는 것, 돈이 지원 된다는 것은 한의학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사례다.
또한 텍사스 주립대와 애리조나 주립대, 미네소타 주립대에서는 의대에서 한의학 과목을 정식으로 가르친다.
그 이름도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의대는 최근 ‘심신의 조화와 의학’ 과목을 채택했고, 조지타운 대학은 미국 최초로 대체의학 대학원 과정을 신설했다.
서양 의학의 최고 정점에 서있는 미국의 의대들이 한의학과 대체 의학을 앞장서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미국의 의대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한의학 분야는 침술이다.
한의학과 같은 대체 의학은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힘들지만, 침술은 통증 완화에 효과가 있다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가 나왔다.
침술을 비롯해 한약을 통한 내과적 처방도 깊이 연구되고 있다.
암 전문 치료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 텍사스 의대 엠디 앤더슨 암센터(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는 한의학의 암 치료와 암 예방에 대한 과학적 임상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토록 수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정작 국내에선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한의학의 효능을 무시하는 의사들이야 그렇다고 칠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한의사들조차 미국 유수의 의대와 질병 센터의 연구 결과에 관심이 없다.
그저 현상 유지하며 기존의 밥그릇을 지키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한의학을 민간요법으로 여기는 의사들의 편견, 그리고 세계적인 연구 결과에 무관심한 한의사들의 나태함에 맞서 무모한 도전을 하려는 것이다.
과연 이 도전이 무모한 실패로 남을지, 아니면 한의학의 한계에 대한 논쟁을 낳으며 2화 이상의 화제를 만들지 머지않아 결판이 날 것 같았다.
분명한 건 한의학의 한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방송에서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그동안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29살,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한지호는 한의학과 의학계의 터부를 건드리며 뜨거운 이슈를 만드는 중심인물이 됐다.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것도 아니다.
원화 한의원이라는 자신의 성을 착실히 쌓아가며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 와중에 거슬리는 장애물을 확실히 밟아주며 자신을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는 걸 은근히 알리기도 했다.
명실공이 태풍의 눈으로 부상한 한지호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한지호와 원화 한의원을 조용히 주목하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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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한의학의 한계에 대해 묻는 촬영을 마쳤다.
촬영장에서 그는 제작진으로부터 비밀스러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양 의학을 대표하는 고정 패널인 양승찬이 다음 화부터 교체 된다는 것이다.
거듭된 미스와 무리한 방송 욕심이 그를 제작진의 눈 밖에 나게 만들었다.
너무 일찍 떠버린 한지호를 따라 잡으려고 촬영마다 무리수를 둔 게 실책이었다.
다음 촬영부터는 양승찬을 대체한 새로운 패널이 참여할 예정이었다.
한지호는 첫 촬영 전부터 은근히 신경전을 펼치던 양승찬의 모습을 기억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도 느꼈다.
그러나 제작진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양승찬에게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아마 한의학의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내용이 방송되면 또 다시 뜨거운 이슈를 낳을 것 같았다.
2화 이후 방송이 살짝 루즈해지려는 찰나 민감한 아이템을 들고 나온 한지호는 채성일 PD로부터 방송감을 타고 났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 오랜만에 이지은을 만나 데이트를 즐긴 한지호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목요일도 원화 한의원의 상담 예약은 가득 차 있었고, 진료 스케줄 역시 빡빡했다.
다음 주에는 새로 뽑은 상담 코디네이터와 안내 직원이 출근한다.
하지만 인원이 보충 되어도 바쁜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원장님, 다음 환자분 진료까지 10분 정도 여유 있으세요.”
간호사 조민주가 한지호에게 낭보를 전했다.
오전부터 계속된 진료 중간에 잠깐의 틈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짧은 휴식 시간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한지호는 기지개를 켜며 시계를 확인했다.
“후우- 벌써 11시? 조금만 있으면 점심시간 되겠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스마트 폰을 만졌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진료를 해서 스마트 폰을 확인할 틈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지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오늘도 고생하고 있죠? 우리 한 선생님, 내 생각 하면서 기운 내요! -
귀여운 메시지와 함께 셀카가 첨부 돼 있었다.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이지은의 셀카는 오직 한지호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발랄한 표정이 담긴 셀카와 메시지는 박카스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냈다.
한지호와 이지은은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연애 초기의 달콤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호칭은 여전히 한 선생님과 지은 씨로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어느 커플보다 더 다정하게 서로를 배려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혼자 미소를 지은 채 이지은에게 답장을 보냈다.
- 지은 씨, 오늘 다음 앨범 작곡가 미팅 간다고 했었죠? 조심히 다녀와요. 진료 끝나고 전화할게요. -
그가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이지은의 답장이 날아왔다.
어설프게 애를 태우지 않고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이지은다웠다.
- 아무리 바빠도 점심 꼭 챙겨 먹어요! 밥 거르면 화낼 거예요. 나중에 전화 기다리고 있을게요. -
7살이나 어리지만 때로는 누나처럼 한지호를 챙기는 이지은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한지호는 전국민의 아이돌인 이지은이 자신을 특별히 챙겨준다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연애를 시작하고 몇 번의 만남을 거치며 그녀가 한지호의 일상에 스며든 것이다.
“원장님, 다음 환자분 곧 모시겠습니다.”
이지은 덕에 10분이라는 휴식 시간이 더 짧게 느껴졌다.
한지호는 조민주의 말을 듣고 컴퓨터 모니터에 떠오른 차트를 확인했다.
코디네이터들의 상담 내역과 환자의 기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모니터 화면을 채웠다.
“음?”
차트를 살펴본 한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의 신상 정보와 상담 기록이 무척 독특했기 때문이다.
“30대 남자, 일체의 상담을 거부하고 무조건 진료를 보겠다고 주장함. 진료비는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태도. 뭐지, 이건?”
담당 코디네이터 정주은이 기록해둔 상담 내역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곧 들어올 30대 남자 환자가 코디와의 상담을 거부하고 무조건 한지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깐깐하고 콧대 높은 VIP 환자들도 원활한 진료를 위해 성실하게 상담에 임한다.
그런데 건장한 30대 남자가 무슨 병을 앓기에 일체의 상담을 거부한 것일까.
한지호는 차트에 떠오른 환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때 조민주가 진료실 문을 두드린 후 환자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원장님, 마창우 환자분 들어가셔요.”
환자를 안내해준 조민주는 금방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별도의 지시가 있거나 간호사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한지호는 줄곧 일대일 진료를 해왔기 때문이다.
“마창우 환자님?”
한지호가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을 번뜩이며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 원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나워 보이는 눈매와 달리 말투는 무척 정중했다.
한지호는 특이한 차트를 다시 확인하며 마창우의 겉모습을 살펴봤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넓게 벌어진 어깨와 검은색 정장을 뚫고 나올 듯 다부진 근육, 그에 비해 작고 하얀 얼굴과 만화 캐릭터처럼 날카로운 눈매까지.
마창우는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이미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앉아있어도 묘하게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한지호는 해결사로 유명한 오대경과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눴고, 대포차 조직을 혼자 박살내기도 했다.
마창우가 이채롭게 느껴졌지만 그로인해 위축 될 일은 없었다.
한지호는 다른 환자들을 대할 때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마창우 환자님, 상담을 거부하시고 바로 진료를 요청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간단합니다. 내 문제를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창우는 상담 코디네이터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한지호는 그의 말에 곧장 반응하지 않고 해야 할 질문을 던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떤 문제로 우리 한의원을 내방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핵심을 물었다.
이번에도 마창우가 이상하게 대답하면 진료를 거부하고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창우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악수라도 하자는 것일까.
“……!”
한지호가 눈을 크게 뜨고 마창우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검지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었다.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이 잘려 있는 것이다.
마창우는 네 손가락밖에 없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고 말을 했다.
“손가락이 잘렸는데, 이상하게 잘린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계속 통증이 느껴집니다. 병원에 가니 심리적인 문제라고 정신과에 가라는데, 정신과에 갔더니 또 쓸데없는 우울증 약만 처먹이려 하니 답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지호 원장님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마창우는 일종의 외상 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이미 오른손 검지를 잃었지만, 그 자리에서 실제적인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한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마창우의 손을 주시했다.
검지가 잘려 기괴한 모양이 된 오른손. 그러나 몸은 여전히 검지를 잊지 못하고 계속 통증을 느끼는 상태.
마창우가 어디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심리적인 현상과 실제 현상이 복합된 무척 어려운 문제를 들고 왔다.
그러고 보니 마창우의 신분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명품 정장을 빼입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손가락이 잘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절대 정상적인 노동을 하다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거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마창우가 채근하듯 한지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그의 찢어진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미 잘렸지만 몸이 놓아주지 않고 있는 마창우 환자님의 검지,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겠습니다.”
한지호는 마창우의 시선도, 치료도 피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의심스러운 환자가 기대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올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위험한 만큼 대가도 커지는 법.
마창우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가능성을 품은 새로운 카드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