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3장, 결자해지(結者解之) (1)
최치우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앞으로 사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술 직후 사흘 동안의 회복 경과에 따라 후유증과 부작용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월요일 밤 늦게까지 최치우가 입원한 1인실에 머물렀다.
마음 같아선 병상을 지키고 싶었지만, 최치우의 만류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이원복이 곁에 남기로 해서 그나마 마음이 좀 놓였다.
침대에 누워서도 병원에 누워 있는 최치우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가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생각이 들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반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한지호는 일찍부터 병원으로 출근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가 대박을 친 후 정신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을 진료하면 잡생각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는 우선 한세 병원의 의사가 말해준 것처럼 사흘 동안 가만히 기다릴 작정이었다.
목요일이 되어 최치우의 회복 경과를 확인하고 난 뒤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것이다.
배후를 파악하고 복수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최치우의 건강이다.
마음 같아선 한의원 문을 닫고 당장이라도 한국 한약 협회 사무실로 쳐들어가 사건의 진상을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무력만으로 모든 게 해결 되는 삼국지 시대가 아니다.
야성이 지배했던 삼국지 시대에서도 무턱대고 무력만을 내세운 군주와 장수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냉정한 상황 판단을 마친 후에야 제대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법이다.
한지호는 최치우의 1차 회복 경과가 드러나는 목요일까지 인내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히 시간을 죽이며 참는 게 아니다.
그동안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
불의의 사건과 별개로 한지호의 일상은 아주 바쁘게 돌아간다.
“후우-.”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원화 한의원 2층에서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힌 한지호는 조기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맡긴 일의 진행 과정을 보고 받을 겸 오랜만에 조기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의 원장이자 TV에 나오는 스타 한의사라는 사회적 신분을 고려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렇기에 조기운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의 존재가 꼭 필요했다.
“지호 형님!”
이른 아침이지만, 전화를 받은 조기운의 목소리에서 꾸미지 않은 반가움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기운아, 자고 있던 거 아니지?”
“아닙니다. 방금 전에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디야? 광주?”
“고창까지 내려왔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형님.”
“고창?”
한지호가 전화기를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조기운에게 뿔뿔이 흩어진 천사원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기운은 다른 보육원으로 이전한 민기, 민우 형제의 행방은 일찌감치 파악했다.
문제는 광주에 있는 고모네로 갔다고 알려진 지훈이였다.
올해 중2,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지훈이는 분명 광주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지훈이를 찾으러 간 조기운이 전혀 다른 도시인 고창에 있는 것일까.
의문은 오래지않아 풀렸다.
조기운이 고창까지 움직인 이유를 설명해줬다.
“광주에 있다는 고모네를 찾았는데 지훈이가 가출을 했다고……. 제가 봤을 때 그리 살뜰하게 아이를 챙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학생 아이가 가출을 했다는데 찾지도 않고, 궁금해 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천사원에서 쭉 자란 걸 보면 고모나 다른 가족들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더 조사를 해봤습니다. 지훈이가 광주 고모네에 머물며 잠시 다녔던 학교를 찾아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습니다.”
한지호는 속으로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광주 고모네에 가서 가출 소식을 들은 뒤 그냥 서울로 돌아왔어도 된다.
하지만 조기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한지호가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명령을 받으면 그게 무엇이든 죽기 살기로 이뤄냈던 상산 조자룡의 기백이 전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훈이가 학급 친구들에게 고창으로 갈 거라는 이야기를 몇 번 했었습니다.”
“고창에는 대체 왜? 거기에도 연고가 있는 걸까?”
“같은 반 아이들 말로는 광주 시내에서 만난 형님이 고창에서 숙식과 일자리를 제공해준다고 했답니다.”
“뭐라고? 중2짜리 애한테 숙식과 일자리?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네, 형님. 저도 뭔가 석연치 않아서 곧장 고창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샅샅이 수색해보겠습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지훈이만 찾으면 천사원을 다시 열 거야.”
한지호는 천사원을 재건할 계획이었다.
계속 미루면 미룰수록 마음의 짐은 더 커졌다.
민기와 민우 형제를 찾았으니 지훈이만 데려오면 천사원 아이들을 보듬을 수 있다.
그런데 지훈이가 광주 고모네에서 가출해 고창까지 갔다는 게 영 찜찜했다.
혹시 잘못된 꼬임에 넘어가 위험한 길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한지호는 막내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조기운에게 거듭 당부를 했다.
“기운아, 광주에서 포기하지 않고 고창으로 간 거 정말 잘 했다. 지훈이를 끝까지 찾아서 데려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제가 꼭 지훈이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한지호의 말은 그냥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조기운을 신뢰하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지방을 돌아다니며 천사원 출신 아이들을 찾아내고 있는 조기운을 믿지 않으면 또 누구를 믿겠는가.
‘아무 일 없이 잘 있어야 한다, 지훈아.’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여드름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이지훈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늘에 기도를 했다.
부디 무사히 이지훈과 김민기, 김민우 형제를 다시 만나 천사원이라는 울타리 안에 품어주고 싶었다.
한지호 자신도 가진 거 하나 없이 천사원에서 꿈을 키웠기에 동생들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꼈다.
어제 일어난 최치우의 사고로 어수선하게 맞이한 화요일 아침, 한지호는 천사원이 재건되는 순간을 그리며 힘을 냈다.
장애물이 많아져도 그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촤아악-
원장실에서 하얀색 가운을 입은 한지호는 출전을 앞둔 장수처럼 정신을 집중했다.
곧 직원들이 출근하고 환자들을 받을 시간이다.
바깥 일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해도 원화 한의원은 빈틈없이 돌아가야 한다.
원화 한의원은 한지호의 본진(本陣)이다.
한지호는 한의사로서, 또 원장으로서 본분을 소홀히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는 일상이라는 전투에 출전할 준비를 마쳤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화요일도 월요일처럼 방송을 보고 몰려든 환자들이 끊임없이 줄을 이었다.
상담 예약은 일주일 넘게 풀로 찼고, 상담을 거쳐 진료를 확정 짓는 환자들의 비율도 전과 달리 대폭 늘어났다.
최리나와 정주은은 상담 과정에서 원화 한의원의 진료비와 조제비가 얼마나 비싼지 일부러 겁을 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를 원하는 환자들이 늘어났으니 방송의 힘이 무섭긴 무서웠다.
사무장 박우식은 늘어난 업무에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제법 큰 야망을 품고 원화 한의원에 들어온 사람이다.
자신이 몸담은 한의원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걸 직접 느끼니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직원들도 늘어난 업무량에 힘들어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한지호는 고되다면 고된 화요일 진료를 마치고 한세 병원을 찾았다.
그는 수술을 받고 입원해있는 최치우의 상태를 직접 체크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한세 병원 의사의 말처럼 목요일은 되어야 수술 예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심마니 이원복이 아예 옷가지를 들고 와서 병실을 지키고 있기에 안심이 됐다.
그렇게 화요일을 보낸 한지호는 일주일의 중심인 수요일을 맞이했다.
매주 수요일에는 MBS 사옥에서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촬영한다.
지난 금요일 2화가 방송되고 엄청난 화제를 일으킨 후 처음으로 제작진을 만나는 자리다.
방송국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받은 한지호는 촬영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한지호가 등장하자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다.
이미 몇 번이나 촬영을 하며 제작진들과 제법 친해진 상태다.
그러나 채성일 PD를 비롯해 작가들과 스텝들은 마치 톱스타가 온 것처럼 한지호를 격하게 반겼다.
“한 원장님! 일주일 전에도 봤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핫-!”
“시청률 메이커, 흥행 메이커! 오늘도 잘 부탁드릴게요.”
프로듀서인 채성일과 메인 작가의 오버스런 반응에 한지호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왜들 이러세요. 방송 초보 부담스럽게.”
“초보라뇨! 한 원장님 덕분에 2화가 대박 났으니 3화, 4화 시청률은 쭉쭉 보증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국장님께 칭찬도 들었습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가 이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채성일이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한지호를 치켜세웠다.
2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다이어트 한약을 고발한 한지호였다.
한의사가 한약을 고발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전국적인 화제를 낳은 것이다.
사실 2화의 시청률 자체는 1화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방송 이후 시청자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주말 내내 실시간 검색어와 인터넷 뉴스를 장악했다.
요즘 방송국은 예전과 달리 시청률보다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시청자 반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지호는 프로그램을 궤도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었다.
게다가 2화가 워낙 이슈가 됐으니 3화의 시청률은 무조건 상승할 것이다.
채성일을 비롯한 제작진들이 한지호를 영웅 대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 차례 떠들썩한 환영을 받은 한지호는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어느 쪽 자리에서 몇 번 카메라를 확인해야 하는지 능숙하게 알고 있었다.
“방송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어요. 축하드려요, 한 원장님.”
한지호가 자리에 선 채 대본을 확인하는데 문주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MBS의 차세대 간판 아나운서인 문주연은 출연자들과 사적인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한지호에게는 종종 먼저 말을 거는 편이었다.
“축하는 같이 받아야죠. 프로그램이 잘 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우선 한 명이라도 주목을 받아야 프로그램 전체가 힘을 받는 법이죠. 이제 한 원장님이 우리를 끌고 간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부담스럽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한지호와 문주연은 자연스럽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대화지만 제작진들도 제법 놀라고 있었다.
평소 문주연의 성격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한 명 더.
문주연과 다른 제작진들의 행동에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지호보다 일찍 스튜디오에 나와 대본을 검토하던 양승찬이다.
그는 지난 방송을 통해 한지호가 주목받는 걸 보며 이를 갈았다.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이지만 먼저 경쟁 의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승찬은 알게 모르게 한의사라는 직업군 자체를 깔보고 있었고, 새파랗게 어린 한지호가 자신의 들러리가 될 거라 믿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들러리는 양승찬이었다.
정작 한지호는 양승찬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이미 방송 2화를 기점으로 주도권을 완벽하게 틀어잡았다.
굳이 프로그램 팀 내에서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양 원장님.”
한지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무던한 태도가 양승찬을 더 화나게 했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잘… 부탁합니다.”
양승찬이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대중들의 관심, 제작진의 칭찬, 결정적으로 문주연의 호의까지 모두 한지호가 가져갔다.
사실 프로그램이 잘 되면 출연자들은 알아서 뜨게 돼 있다.
문주연이 한 말도 그런 맥락을 담고 있었다.
한지호가 다이어트 한약으로 빵 떴지만, 자연스레 양승찬이 주목받을 기회도 올 것이다.
하지만 양승찬의 굳어진 안색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항상 승승장구하던 그는 한지호에게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 우리 문 아나가 오프닝 멘트 따면서 슛 들어가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채성일이 현장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지호는 오프닝 촬영에서 해야 할 멘트를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동시에 한 가지 일이 더 떠올랐다.
촬영이 끝나면 이지은을 만나 저녁을 먹기로 약속 했었다.
그녀의 고백에 답을 줄 시간이 바로 오늘이다.
‘하나씩 정리하자. 시간은 내 편이니까.’
한지호는 이지은의 고백을 받아줄지 거절할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려놓았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국내 최고의 여자 솔로 가수인 이지은과 관계를 재정립하게 될 것이다.
내일은 최치우의 1차 경과를 확인한 후 본격적으로 한국 한약 협회를 파기 시작할 작정이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한지호는 난관이 닥쳤을 때 도망가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난관을 즐기며 정면으로 부딪쳐 박살내는 타입이다.
딸칵-
그때 한지호를 비추는 카메라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그는 어느덧 익숙해진 카메라를 바라보며 준비된 멘트를 풀어놓았다.
오늘은 한의원이 아닌 방송국에서 또 다른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