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1장, 후폭풍 (1)
“뭐야, 이거?”
잠에서 깬 한지호는 눈을 크게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무음으로 설정해둔 스마트 폰을 확인했는데 믿기 어려운 숫자가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부재중 전화 57통, 메시지 35개?”
하룻밤 사이 이렇게 많은 전화와 메시지가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야소녀 모임에 처음 참석했다는 사실이 연예 뉴스로 알려졌을 때보다 더 많은 전화가 와 있었다.
대체 지난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지호는 눈살을 찌푸린 채 부재중 통화 목록을 살폈다.
엄지를 바삐 움직여 목록을 훑어내린 그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와 달리 메시지에는 간단한 용건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통화와 메시지는 모르는 번호에서 온 것이다.
침실에 서서 한동안 스마트 폰을 체크한 한지호는 왜 전화기에 불이 났는지 알아차렸다.
어제 저녁 방송된 <건강 백서, 진짜! 가짜!>의 2화가 파란을 몰고 온 것이다.
양승찬이 다이어트 주사와 시술의 문제점을 다룬 것도 괜찮은 아이템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지호에게 완전히 묻혀 버렸다.
현직 한의사가 직접 다이어트 한약의 맹점을 꼬집은 건 방송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내부 고발은 언제나 대중의 흥미를 자극시킨다.
다만 그 후유증이 크기에 함부로 내부 고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업계 전체에서 왕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한의학 업계의 반발을 신경 쓰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다이어트 한약의 허와 실을 조목조목 따졌다.
방송을 시청한 사람들, 그리고 방송이 끝나고 뉴스 기사를 통해 내용을 접한 사람들을 통해 바이럴이 확산됐다.
바이럴(viral)은 쉽게 말해 입소문을 뜻한다.
한 번씩은 다이어트 한약을 먹어봤거나 복용을 고민하고 있던 사람들, 특히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방송 내용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와 한지호, 다이어트 한약이라는 키워드가 실시간 검색어 1위, 2위, 3위를 장악했다.
금요일 저녁은 인터넷에서 바이럴이 퍼지기 좋은 시간대가 아니다.
황금 시간대라고 불리지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 밖에서 외식이나 여가를 즐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는 입소문이 뜨거웠고,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기자들은 이슈를 놓치지 않았다.
경쟁하듯 다이어트 한약 기사를 쏟아낸 기자들 덕분에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건강 백서, 진짜! 가짜!>와 한지호는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그의 스마트 폰을 수놓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는 대부분 기자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한지호가 야소녀 모임에 참석한 사진이 알려졌을 때 받았던 관심은 일시적이었다.
당시에도 꽤나 이유가 됐지만, 주로 연예부 기자들과 어린 팬들 사이에서 짧게 소모되는 단발성 가십이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을 통해 한의학계의 민감한 부분을 내부 고발한 지금은 훨씬 더 깊고 진지한 관심을 받게 됐다.
메시지 중에는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것도 있었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과 달리 전국 한의사 협회, 서울지역 한의원 연합회, 한국 한약 협회 등에서 보낸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각기 다른 단체로부터 온 세 통의 메시지는 비슷한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 한지호 원장님, 연락 부탁드립니다. 전국 한의사 협회 총무실 -
- 서울지역 한의원 연합회입니다.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님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
-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이오. 연락 좀 해주면 좋겠소. -
하나같이 한지호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메시지였다.
특히 한국 한약 협회장은 개인이 직접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지호는 세 통의 메시지에서 일관된 느낌을 받았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의 2화 방송 내용을 해명하거나 사과하라는 게 분명했다.
당연히 한지호는 해명할 내용도, 사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방송 아이템을 정하던 순간부터 예상했던 반발이다.
만약 주목을 받기 위해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비난을 받아도 싸다.
그러나 한지호는 한의학계 내부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서 알렸을 뿐이다.
이 일로 업계의 왕따가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귀찮게 됐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으니까…… 전부 감수해야지.”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읊조린 한지호는 스마트 폰을 내버려 뒀다.
눈뜨자마자 이리저리 전화를 걸고 메시지에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방송이 화제가 됐고, 그가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통해 이슈 몰이에 성공한 건 좋은 일이다.
그에 따른 다양한 반응에 일희일비하며 휩쓸리면 중심을 잃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평소처럼 굳건히 무게를 잡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쏴아아아아-
욕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튼 한지호는 눈을 감고 온몸을 적셨다.
그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건강 백서, 진짜! 가짜!>에 출연을 결정했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한의사가 되어 콧대 높은 VIP들이 원화 한의원에 줄을 서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2화가 방송된 후 1화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왔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거센 후폭풍이 불어올 것 같았다.
그는 들뜨거나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다스렸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한지호는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담력을 지녔다.
평온한 얼굴로 샤워를 하는 그에게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무게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
매주 수요일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촬영하기 때문에 토요일도 오전 진료를 하게 됐다.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아침을 먹은 한지호는 차를 몰고 역삼 M 타워로 이동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건물 입구에 낯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한지호는 일단 주차부터 했다.
지정석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탄 그가 1층 로비로 나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공동 로비의 데스크 직원이 입을 열었다.
“원장님!”
“네?”
한지호가 고개를 돌려 여직원을 쳐다봤다.
로비의 데스크 직원이 직접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침부터 기자들이 몰려 왔어요. 한 원장님을 뵙고 싶다고……. 일단 건물 안에 있으면 곤란하다고 말했는데, 저기서 저렇게 기다리고들 계시네요.”
한지호는 데스크 직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건물 바깥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 봤던 사람들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부지런한 기자들이 토요일 아침부터 취재를 하기 위해 한의원으로 찾아온 것이다.
기자들과 각종 협회의 메시지에 응답하지 않은 한지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병원 건물까지 찾아왔는데 무작정 피하는 것도 방법이 도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자들이 관심을 보일 때 더 이슈를 키워서 주목을 받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국 한의사 협회, 한국 한약 협회 등에서 반격을 가할 것이다.
한지호에 의해 정곡을 찔린 그들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확실하게 선공을 퍼부어줄 필요가 있다.
방송을 통해 한지호는 주도권을 손에 잡았다.
다이어트 한약 문제는 은근슬쩍 흐지부지 될 사안이 아니다.
문제를 제기한 한지호가 용기 있는 양심 한의사가 되거나 아니면 인기를 위해 억지를 부린 치기어린 내부 고발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로비의 데스크를 담당하는 여직원에게 입을 열었다.
“저기 모인 기자분들 10분 뒤에 저희 병원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제가 직접 맞이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취재 온 기자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죠. 아무튼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게 저희 일인데요. 그럼 10분 지나서 원화 한의원 1층으로 기자분들 안내해 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한지호가 가볍게 눈을 찡긋 거렸다.
그는 성큼성큼 로비를 가로질러 한의원 1층 현관문을 열었다.
이미 모든 직원과 간호사들이 출근해 있었다.
다들 출근길에 기자들을 봤는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아침. 다들 얼굴이 왜 그래요?”
“원장님, 어제 방송이 난리가 난 것 같습니다. 엄청 화제가 됐고, 저도 여기저기서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밖에는 기자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들 긴장할 것 없어요. 좋은 일이니까.”
한지호가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위장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여유롭게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1화 방송이 나가고 환자들의 상담 예약과 진료 건수가 늘어났죠? 2화의 반응은 더 폭발적이었으니 훨씬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원장님께서 방송을 통해 유명해 지시는 건 바라던 일이지만, 자칫 업계에서 반발을 사서 고립되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너무 많은 관심이 갑자기 쏟아질 때의 부작용도 있을지 모릅니다.”
사무장 박우식이 연륜에 걸맞게 적절한 지적을 했다.
하지만 한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잃지 않고 뭔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한의학계의 반발, 갑작스런 관심으로 인한 부작용, 모두 일리 있지만 제가 감수하고 나가겠습니다. 한지호라는 이럼 석자의 브랜드, 그리고 원화 한의원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죠.”
“네. 저희는 어떤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박우식은 한지호의 결정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나이도 한참 많고, 사회 경험도 풍부하지만 원장은 한지호다.
그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원화 한의원이라는 배의 선장은 한지호다.
한지호가 결정을 내리면 직원들은 최선을 다해 노를 저을 것이다.
한지호는 박우식을 비롯해 안내 데스크의 이주희 등을 쳐다보며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기자들은 우리 한의원의 내부 시설 등을 세밀하게 살필 겁니다. 우리만의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시스템과 분위기가 기사에 반영 되겠죠. 평소 상담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음료 서비스가 빈약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한방 차와 한과를 추가하라고 했었는데 준비가 됐습니까?”
“네, 원장님.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후에 최고급 한과 세트가 도착했고, 오늘 아침부터는 준비해두신 한방 차와 함께 서비스로 나갈 수 있어요.”
이주희의 말에 한지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지시를 내리면 미루지 않고 빨리 처리해놓는 게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기자들을 맞이합시다. 1층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면서 다과를 내보내고, 잠시 후 2층으로 올려 보내세요. 아침 진료는 10시부터 시작이니 괜찮을 것 같고, 상담을 받으러 내원한 분들이 불편하지 않게 동선 배정도 신경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원장님.”
“알겠습니다, 원장님.”
짤막하게 브리핑을 마친 한지호가 간호사 두 명을 대동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박우식과 이주희는 기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정주은과 최리나는 상담 예약 리스트를 확인하며 시간을 체크했다.
토요일 아침부터 분주해졌지만, 계속해서 기회가 찾아오는 거라 생각했다.
2층 원장실로 올라가 재킷을 벗고 하얀 가운을 입은 한지호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쳐다봤다.
야망을 숨기지 않는 젊고 유능한 한의사의 얼굴이 거울 속에 떠올랐다.
한지호는 금요일의 방송이 몰고 온 후폭풍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
기자들이 원화 한의원 안으로 들어왔다.
토요일 아침부터 역삼동 병원 건물을 찾아온 기자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이주희와 정주은은 기자들을 1층 상담 대기실에 앉히고 한방 차와 최고급 전통 한과를 대접했다.
기자들은 일반 한의원에서는 받기 힘든 서비스를 체감했다.
단순히 다과를 대접해서 그런 게 아니다.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여자 직원들이 세심하게 안내를 도맡았고, 1층 대기실의 인테리어도 여느 병원과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전도유망한 건축가로 손꼽히는 임형빈이 꾸민 인테리어는 백화점 명품관이나 유명 갤러리를 연상시켰다.
기자들이 앉아있는 소파를 포함한 크고 작은 기자재와 소품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은 티가 났다.
눈썰미로 먹고 사는 기자들이 원화 한의원의 디테일을 놓칠 리 없었다.
말로만 듣던 VIP 전문 한의원의 진면목에 다들 감탄한 눈치였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한의원은 전형적인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을 취해왔다.
29살 젊은 한의사가 그런 틀을 깨기 위해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점, 그리고 그 주인공이 연예인들과도 친한 훈남이며 방송에 나와 다이어트 한약의 허실을 폭로한 문제적 인물이라는 점은 기자들에게 더 없이 매력적인 취재 거리였다.
“2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원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기자들이 충분히 원화 한의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 후 2층에서 간호사 조민주가 내려왔다.
여섯 명의 기자들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일찍부터 발로 뛰며 취재를 나온 보람이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 내내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다이어트 한약 사건의 주인공을 만나게 됐다.
한지호도 2층에서 기자들을 만날 준비를 끝냈다.
후폭풍을 피하지 않고, 그 바람에 올라타 더 멀리 날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시작은 직접 찾아온 기자들을 만나는 것부터다.
서로의 기대가 교차하는 가운데 기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원화 한의원 2층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