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57화 (57/255)

# 57

코디네이터를 만나 상담을 받아야만 진료 시간을 잡을 수 있다.

사전 예약과 코디네이터 상담, 그리고 진료로 이어지는 시스템은 성형외과를 연상시켰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전역에서 메디컬 한류 열풍을 일으킨 강남 성형외과 시스템을 적극 벤치마킹한 것이다.

한의원에 코디네이터를 두고 상담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였다.

대부분의 한의원은 매일 침을 맞는 손님들로 유지비를 마련하고, 가끔 보약을 짓는 손님들을 통해 이익을 낸다.

그러나 원화 한의원은 시작부터 달랐다.

사전 예약과 상담제라는 시스템을 통해 값비싼 진료비와 약값을 선뜻 낼 수 있는 VIP들만 받고, 의료수가제에 걸리지 않는 특별 진료와 보약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도모한다.

정식으로 개원을 했지만 법의 그늘을 살짝 벗어나 있었다.

만약 아무 한의사가 이런 시스템을 도입했다면 곧바로 망할 것이다.

VIP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상상 이상의 큰돈을 쓸 수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곳에 돈을 흘리는 사람들은 아니다.

한지호는 황만금과 김해수, 이지은이라는 거물들을 치료한 전력이 있다.

상류층 사이에서 한지호라는 젊은 한의사가 명의라는 소문은 알게 모르게 쫘악 퍼져 나갔다.

게다가 야소녀 모임 참석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까지 확보했다.

그렇기에 VIP 전문 한의원이라는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화 한의원, 그리고 한지호의 도전에 한의학계와 강남 병원 바닥은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대부분 원화 한의원의 시도가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길이다.

그러나 개원 일주일 차에 돌입한 원화 한의원은 한지호가 만든 시스템을 유지하며 순항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희령 님이시죠?”

“맞아요.”

“잠시만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음료는 커피, 녹차, 주스가 준비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커피로 줘요. 아이스로.”

“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환영합니다, 김희령 님.”

부티 넘치는 중년의 사모님이 원화 한의원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간제 예약이기에 어떤 환자가 오는지 미리 알 수 있었고, 그에 맞춰 안내 직원이 친절하고 디테일한 응대를 했다.

한의원이 아니라 백화점 명품관 또는 외제차 전시장을 연상시키는 서비스였다.

2천만 원 상당의 에르메스 핸드백을 들고 온 김희령은 만족한 표정으로 대기실에 앉았다.

“소문대로 서비스가 괜찮네.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한의사만 실력 있으면 딱이겠어.”

그녀의 혼잣말은 원화 한의원을 찾는 VIP 고객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누구보다 건강관리와 지병 치료에 관심이 많다.

다만 웬만해선 의사를 신뢰하지 않고, 대학 병원이나 큰 한의원의 도떼기 시장 같은 시설과 서비스를 싫어하는 까다로운 고객들이다.

대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돈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치료비로 1억 원 이상을 지불 할 수 있고, 약 값으로 몇 백 몇 천은 우습게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VIP 전문 한의원이라는 블루 오션을 개척한 한지호는 적어도 시설과 맞춤 서비스 부문에서는 합격점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특별한 한의원을 원했던 수요가 분명히 존재했다.

시설과 서비스에 만족한 고객들을 신기에 다다른 의술로 완전히 홀리는 건 한지호의 몫이다.

물론 한지호는 상담을 거쳐 진료실로 올라온 고객들을 쉽게 놓치지 않았다.

프리랜서 한의사로 활동하며 거물들을 상대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어떻게 해야 의심 많고 깐깐한 상류층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노하우가 생긴 것이다.

드르륵-

새로운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며칠 전 코디네이터와 상담을 마치고 진료 시간을 잡은 환자였다.

같은 시각, 1층에서는 방금 도착한 사모님 포스 풀풀 풍기는 김희령이 코디네이터와 1:1 밀착 상담에 들어갔다.

이렇게 예약과 상담, 진료가 톱니바퀴 돌아가듯 딱 맞춰서 진행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지호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온 환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으니 환자는 환자다.

하지만 옷차림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환자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방금 전 상담실로 들어간 김희령처럼 강남 사모님다운 분위기가 물씬 났기 때문이다.

“듣던 대로 젊은 분이시네요?”

아직 가을인데 벌써 밍크 코트를 걸친 중년 여인이 다짜고짜 한지호의 나이를 언급했다.

한의원 원장답게 단정한 스타일을 고수해도 29살이라는 나이는 감춰지지 않았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너무 젊어서 걱정되시나요?”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한의원 원장님들은 나이 지긋한 경우가 많아서…….”

“이호정 환자님 맞으시죠? 상담에서는 비만 때문에 고민이시라고 하셨는데.”

한지호가 비만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이호정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녀가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밍크 코트를 걸친 건 몸집을 감추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렇게 심각한 비만은 아니지만, 무너지기 시작한 턱선만 봐도 군살이 많은 체형임을 알 수 있었다.

이호정은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좋다는 한약은 다 먹어봤는데 살이 잘 안빠져서 고민이에요. 비싼 돈을 들여서 PT도 받고 있는데…….”

까칠해 보이는 사모님 스타일의 이호정은 깊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처럼 40대를 넘기면 예전보다 살을 빼기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 한약을 복용하지만 효과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헬스장에서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 PT를 받는다.

하지만 PT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운동만으로 안 되는 살도 있기 마련이다.

한지호는 코디네이터가 올린 상담 기록을 유심히 검토했다.

이호정은 원화 한의원에 있는 두 명의 코디 중에서 최리나와 상담을 했었다.

최리나는 성형외과에서 스카웃한 또 다른 코디네이터 정주은의 예전 병원 동료로 성격이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편이었다.

그녀가 작성한 상담 기록에서 다음 한 문장이 한지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 날카로우신 것 같지만 본인의 비만에 대한 자책감이 상당히 많이 느껴짐. 비만으로 인한 경미한 우울증 증세까지 의심됩니다, 원장님. -

최리나의 지적은 정확했다.

역시 코디네이터를 비롯한 직원들을 잘 뽑은 것 같았다.

한지호는 이호정의 눈빛과 표정에서 낮은 자존감과 우울증 증세를 읽어냈다.

그가 이호정을 보고 말했다.

“혹시 다른 시술의 힘을 빌릴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예를 들면요?”

“성형외과의 지방흡입술이나 내과의 위 절제술이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행이긴 유행이었죠.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많았잖아요? 살이 안 빠지는 게 스트레스이긴 한데, 부작용을 감수하고 지방흡입이나 위 절제를 하는 것도 좀. 무엇보다 우리 남편이 인정을 안 해줄 거에요.”

“네?”

“지방흡입이나 위 절제술로 살을 빼면 남편이 비아냥거릴 게 뻔해요. 그래서 무조건 운동이나 한약처럼 몸에 칼 안 대는 방법으로 살을 빼고 싶어요.”

퍼즐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상류층의 삶을 영위하는 이호정이 어째서 비만으로 고민하는지, 또 경미한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녀는 살이 쪘다고 남편으로부터 무시를 받는 게 분명했다.

지방흡입이나 위 절제술처럼 인위적이고 위험한 방법으로 살을 빼려 하지 않는 것도 남편의 시선 때문이었다.

사정을 파악하고 나니 콧대 높고 까다로운 사모님이 조금은 안쓰럽게 보였다.

“진맥 먼저 해보겠습니다.”

한지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호정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내밀었다.

“코트 옷걸이에 걸어드리겠습니다.”

밍크 코트를 벗어야 한다는 말에 이호정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도 한지호는 한의원 원장이다.

이호정은 한지호의 유명세를 전해 듣고 원화 한의원에 찾아온 입장이었다.

원장이 직접 코트를 받아 주겠다는데 거부 할 수는 없었다.

“여기 있어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지호는 손수 밍크 코트를 받아들었다.

옷걸이에 코트를 건 그가 다시 이호정을 쳐다봤다.

코트를 벗으니 두둑한 살집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이어트에 좋다는 한약을 먹고, 최고의 트레이너에게 PT를 받는 등 나름 노력을 했어도 중년의 군살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괜히 나잇살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지방 분해가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한지호는 이호정 앞에 서서 한쪽 손을 내밀었다.

“진맥을 시작하겠습니다.”

밍크 코트를 벗은 이호정은 고분고분 말을 잘 따랐다.

어쩌면 살집을 가려주는 코트가 그녀의 방패막 역할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스윽-

이호정이 말없이 팔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그녀의 맥을 잡고 신경을 집중했다.

순간적으로 발휘되는 그의 집중력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맥박을 넘어 호흡의 강도, 목젖의 움직임까지 인체가 내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그의 진지한 표정에 이호정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곧이어 진맥을 끝낸 한지호가 손을 뗐다.

한지호는 이호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매번 다이어트 한약을 먹고 PT를 해도 살이 잘 빠지지 않는 건 이호정 환자님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뭐라고요?”

“이호정 환자님은 오행 중에서 물의 기운이 강한 체질입니다. 내장에서는 신장이 특히 강하게 발달했고, 그로인해 몸 속의 수분이 많고 부종이 생기기 쉽습니다.”

“오행? 신장?”

“제가 쓰는 체질 감별법입니다. 아무튼 그동안 복용하신 다이어트 한약은 대부분 식욕을 억제하는 일차원적인 효능만 냈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PT로 운동을 열심히 해도 살이 안 빠지는 건 왜 그런 건가요? 밥을 막 많이 먹는 편도 아닌데 말이에요.”

이호정의 물음에 한지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했다.

진맥을 마친 순간부터 오금희에 근거한 데이터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기에 말이 막히지 않았다.

“밥은 안 먹어도 물은 안 마실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는 수분이 들어있습니다. 이호정 환자님은 수 체질 중에서도 부종이 잘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몸 속으로 들어온 수분이 분해되지 않고 부종으로 쌓여 살이 된다면 누구라도 살이 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체질 때문이라는 거죠? 제가 운동을 덜 하거나 식욕을 못 참아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체질의 영향이 커집니다. 체질에 맞춰 부종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는 약을 쓰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아-!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원장님!”

이호정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아직 한지호의 약을 먹고 살이 빠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마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비만을 이호정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체질 때문이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남편으로부터 살을 못 뺀다고 구박을 받아온 이호정에게는 한지호의 말이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됐다.

그저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근거도 명확했다.

한지호는 다른 한의원의 다이어트 한약은 단순히 식욕을 억제시켜서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체질에 맞춰 수분으로 인한 부종을 완화시키는 약을 쓰겠다고 했다.

한의학적 지식이 없는 이호정이 들어도 말이 되는 소리였고, 그동안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해결 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호정은 사고 싶은 뭐든 사고, 갖고 싶은 건 뭐든 가질 수 있는 재력을 갖췄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남편에게서 듣는 핀잔은 이호정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당신 탓이 아니다, 라는 한지호의 말은 그녀의 비만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치료해 준 건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간호사를 호출했다.

“조 간호사님, 이호정 환자님 침술실로 모셔주세요.”

“네, 원장님.”

인터폰 너머로 위천 한방병원의 선임 간호사 출신인 조민주가 대답했다.

한지호는 이호정을 쳐다보고 몇 마디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은 간단한 침술로 옆구리 부위의 부종을 개선시켜 드리겠습니다. 약과 진료비에 대한 설명은 코디네이터가 다시 알려드릴 겁니다. 약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이호정은 들어올 때와는 다른 태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옷걸이에 걸어둔 밍크 코트를 챙긴 그녀는 조민주와 함께 침술실로 향했다.

한지호는 그녀가 약을 지을 거라고 100% 확신했다.

진료비와 약값이 다른 한의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지만 이호정에게 큰 문제는 안 될 것이다.

한지호가 비만의 해결책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이호정의 마음까지 어루만졌기 때문이다.

물론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와 약값을 받고 입을 씻을 생각은 없었다.

원화 한의원을 믿어준 VIP 환자들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체감하게 될 터였다.

한지호는 비싼 돈의 가치만큼 확실한 의술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VIP 전문 한의원을 표방하고 나선 원화 한의원은 다양한 환자들을 맞이하며 차근차근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원화 한의원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바뀌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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