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남녀를 떠나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특별한 점이 있다.
한지호는 열린 마음으로 김해수의 조언을 곱씹었다.
“커피 한 잔 내려줄까요?”
“좋죠.”
“당분간 내 커피를 마시긴 힘들 거예요. 영화 촬영이 들어가면 몇 달 동안 지방에 머물 것 같으니.”
“무사히 촬영하고, 이번 영화도 대박 나길 바랍니다.”
한지호는 마치 남 이야기 하듯 편하게 그녀의 성공을 기원했다.
몇 달을 못 본다고 해서 절절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김해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성적인 호감과 인간적인 존중이 어우러진 아슬아슬하면서도 편한 관계였다.
한지호는 김해수가 내려준 커피 향을 음미하며 밀회(密會)의 감상에 젖어들었다.
세상 사람 누구도 상상하지 못 할 글래머 스타 김해수와의 밀회는 그의 일상에 활력소가 되어 줬다.
자신을 위해 커피를 들고 온 김해수를 보면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세계에 발을 딛고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현실을 이겨내야 한다.
한지호는 만족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며 커피 향을 음미했다.
여러 향이 부드럽게 섞인 커피처럼 복잡한 생각이 밤을 물들이고 있었다.
+++
김해수와 밀회를 즐기고 나오니 새벽 3시가 다 됐다.
짧지만 강렬한 시간의 여운이 온몸 곳곳에 오래 오래 남아있을 것 같았다.
청담동 빌라 건물에서 빠져나온 한지호는 차를 세워둔 골목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등 뒤에서 이상한 느낌이 감지됐다.
확실하진 않지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홰액-
한지호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펴봤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청담동 골목은 조용하기 그지없었고, 길을 걷는 행인도 많지 않았다.
‘괜히 예민해진 건가?’
한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탑 클래스 여배우인 김해수를 만나고 나오는 길이라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차를 세워둔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길가에 듬직하게 서있는 아우디 A5가 보였다.
한지호는 애마에게 다가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목덜미로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절대 잘 못 느낀 게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자신의 뒤를 쳐다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스윽-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새벽, 청담동 뒷골목에서 혼자 쇼를 하는 기분이었다.
한지호는 당황하지 않고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시동을 걸지 않았다.
대신 두 눈을 감고 오금희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오금희 중에서도 사슴을 본 따서 만들어진 녹공(鹿功)을 펼치려는 것이다.
녹공을 펼치면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소유하게 된다.
호공이나 웅공처럼 파괴적이지 않고, 원공이나 조공처럼 민첩함을 허락하진 않지만 녹공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감각을 주관할 뿐 아니라 치료 행위에서도 녹공이 많이 쓰인다.
우우웅-
단전에 잠든 오금희의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
녹공은 오장육부 중에서 신장에 뿌리를 두고 있고, 오행 중에서는 물의 힘을 타고났다.
한지호는 단전에서 솟아난 내공이 신장을 거쳐 온몸의 신경을 일깨우는 걸 느꼈다.
동시에 믿기 힘들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졌다.
오감이 아니라 육감이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자동차 밖 거리의 모든 상황이 생생하게 감지됐다.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미세하게 들리는 이질적인 효과음.
찰칵! 찰칵!
그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 셔터 소리였다.
누군가 카메라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감지됐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자동차 안에서 한참 떨어진 바깥의 카메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또 존재할까.
오금희 중에서도 녹공을 펼쳐 초월적인 감각을 발동시킨 한지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어둠속에서 날 찍고 있어. 방향은… 여기서 11시 방향, 조공을 펼쳐 뛰어가면 순식간에 좁힐 수 있는 거리다!’
판단을 마친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녹공으로 상대를 감지한 그는 조공(鳥功)의 기운을 일으켰다.
조공을 펼치면 축지법을 쓰듯 빨리 움직일 수 있다.
단거리에서 스포츠카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철컥-!
한지호가 운전석 문을 열고 자동차 밖으로 나왔다.
그는 땅을 박차고 11시 방향으로 뛰어갔다.
오금희 조공은 전설 속 경공술의 위력을 현실에서 재현해냈다.
땅을 박차고 어두운 청담동 거리를 뛰어가는 한지호의 몸은 시위를 떠난 화살 같았다.
쐐애애액-
공기가 갈라지는 파공성이 울릴 정도였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몇 백 미터를 내달린 그의 눈에 흐릿한 인영이 포착됐다.
갑자기 달려오는 한지호를 발견한 사람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게 보였다.
‘잡았다!’
그가 바로 어둠 속에서 사진을 찍은 당사자였다.
한지호의 시야에 들어온 이상 도망쳐봐야 늦었다.
오금희 조공의 위력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한지호는 하늘을 나는 한 마리 새처럼 어둠을 가로질러 질주했다.
꽈아악!
팔을 뻗은 한지호가 상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는 뒷덜미가 잡힌 채 계속 도망가려 했지만 한지호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거 놔요! 왜 이러는 겁니까!”
어둠 속에서 그가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높였다.
한지호는 오금희의 기운을 억누르며 상대를 돌려세웠다.
뿔테 안경을 쓴 30대 초반의 남자.
평범한 인상이었고, 커다란 백팩을 둘러매고 있는 것 외엔 특이점이 없었다.
“사진 찍었죠?”
“네? 무슨 소리를…….”
한지호의 물음에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굳이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한지호는 거친 손길로 남자의 백팩을 뺏았다.
백팩 안에는 커다란 사진기가 들어 있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왜 남의 개인적인 물건을!”
“그 개인적인 물건으로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었으니까. 가만 안 있으면 이 카메라 다 부숴버릴 겁니다.”
한지호가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를 했다.
그의 음성에 담긴 기운이 남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한지호는 카메라 메모리에 저장된 사진을 확인했다.
“음…….”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청담동에 도착한 한지호가 아우디 A5에서 내리는 장면, 이어서 그가 김해수의 청담동 빌라로 들어가는 장면, 그리고 몇 시간 후 빌라에서 나와 다시 차를 타는 장면까지.
차량 번호와 얼굴이 자세하게 나온 사진 수십 장이 메모리에 저장 돼 있었다.
다행히 카메라에 찍힌 건 한지호 한 사람뿐이었다.
청담동 빌라 밖으로 나오지 않은 김해수의 모습을 담을 수는 없었다.
오늘 찍힌 사진만으로 김해수의 스캔들을 만들긴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누군가 몰래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는 건 무척 불쾌한 일이다.
만에 하나 김해수가 빌라 건물 입구로 마중이나 배웅을 나왔다면 꼼짝없이 스캔들의 증거가 될 뻔 했다.
“뭡니까, 이건?”
한지호가 카메라를 돌려 자신이 찍힌 자신을 보여주자 남자가 말을 더듬거렸다.
“아, 이, 이건.”
“왜 나를 찍은 겁니까? 몇 시간 씩 잠복까지 해가면서.”
“그, 그게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다가…….”
“우연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겁니까.”
눈을 부릅뜬 한지호는 억눌렀던 오금희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단전에 쌓인 바위 덩어리 같은 내공이 전신으로 퍼졌고, 무형의 아우라가 뿜어져 남자를 압박했다.
남자는 흘러내리는 뿔테 안경을 세우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파파라치인 것 같은데, 어디 소속입니까?”
“스포츠 패치의……. 얼마 전부터 연예인 김해수 씨가 사는 빌라에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젊은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 차 나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의 정체는 악명 높은 스포츠 패치의 파파라치 기자였다.
스포츠 패치는 연예인의 사생활을 캐내서 보도하는 파파라치 전문 언론이다.
한지호는 자신의 행적이 스포츠 패치에 알려졌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청담동 빌라에 그리 자주 방문하지 않았는데도 소문이 난 것이다.
이래서 연예계를 무서운 바닥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빌라 안에서 김해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갈수록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조심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하마터면 벌써부터 쓸데없는 구설수에 올라 곤욕을 치를 뻔 했다.
한지호는 남자의 카메라에서 메모리를 꺼냈다.
“이 메모리는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를 또 보게 된다면, 그리 유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공을 가득 담아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한지호의 경고에 남자도 묵묵부답 고개만 끄덕였다.
파파라치는 걸리지 않았을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현장에서 포착당한 파파라치는 사생활을 침범하는 스토커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메모리 카드를 뺀 카메라를 돌려줬다.
배낭에 카메라를 넣은 남자가 도망치듯 후다닥 멀어졌다.
그는 결국 아무런 증거 사진도 얻지 못했고, 한지호의 정체를 알아내는데도 실패했다.
만약 다시 김해수의 빌라 주위를 기웃거려도 별다른 소득을 얻기 힘들 것이다.
김해수는 곧 영화 촬영 차 지방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한지호는 만전을 기해 제3의 장소에서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파사삭-!
그의 손에서 메모리 카드가 산산조각 났다.
어둠이 온몸을 감싼 청담동 거리에서 한지호는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김해수는 스캔들 하나로 전국을 떠들석하게 만들 수 있는 거물급 스타다.
얼마 전 치료해준 이지은 역시 수많은 삼촌 팬을 몰고 다닌다.
그런 사람들과 자연스레 만나는 한지호 자신 역시 예전과는 다른 위치에 올랐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달콤한 밀회를 가진 밤, 한지호는 새로운 교훈을 피부에 새기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그는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매일 매일 성장하고 있었다.
10장, 성장(成長) (3)
+++
스포츠 패치의 파파라치를 잡아낸 다음 날, 한지호는 김해수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녀의 빌라 앞에서 파파라치를 만났고, 메모리 카드를 회수했으나 조심하라고 말해준 것이다.
하지만 김해수는 파파라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고, 지방으로 영화 촬영을 떠나니 당분간 신경 쓸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파파라치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새로운 교훈을 얻은 한지호는 이지은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성공적으로 연합 콘서트를 마친 이지은에게 치료비를 받을 시간이 됐다.
끼이익-
압구정 알렉산드르 앞에 차를 세우자 발렛 직원이 뛰어 나왔다.
이제 얼굴이 눈에 익은 그가 한지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차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매번 비슷한 인사를 나눈 한지호가 차에서 내렸다.
알렉산드르 입구의 풍경 또한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예전과 다른 여자 스텝이 현관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알렉산드르에 여러 번 방문한 한지호를 알아봤다.
“아! 안녕하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용건을 말하지 않았는데 여자 스텝이 알아서 움직였다.
샵 안으로 들어간 스텝이 머지않아 헤어 디자이너 미진을 데리고 왔다.
미진은 반가운 표정으로 한지호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한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네, 안 그래도 지은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이지은 씨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아주 괜찮아 보여요. 콘서트를 잘 마쳐서 기분도 좋은 것 같고요.”
“다행이군요.”
“그럼 올라가실까요?”
미진이 한지호를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