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추가 주문하는 고객과 첫 미팅 마치고 나면 전화해. 계속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진행하자.”
“네, 형님. 편히 쉬세요.”
“조심히 들어가.”
조기운을 보낸 한지호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양문형 냉장고의 진열칸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맥주 하이네켄이 일렬로 서있었다.
사소하지만 한지호가 꿈꾸던 소박한 풍경이다.
TV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커다란 냉장고를 열면 수입 맥주와 음료수가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개인 냉장고를 가져본 적 없는 한지호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꿈을 키웠었다.
이제 강남 신사동의 호화롭고 넓은 오피스텔에서 양문형 냉장고 안에 하이네켄을 깔아 놓았으니 소박한 꿈 하나는 이룬 셈이다.
촤악-
맥주 캔을 따자 탄산 빠지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만 들어도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소파에 몸을 묻은 한지호는 맥주를 마시며 채널을 돌렸다.
이지은의 무대가 끝났으니 아이돌 가수들이 판을 치는 연합 콘서트를 계속 볼 이유가 없었다.
별다른 이슈가 없는 편안하고 무사한 저녁.
맥주 한 캔을 마시며 TV를 보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한지호는 평화로운 저녁을 즐기며 여유를 만끽했다.
올라가야 할 계단이 많이 남아있지만, 중간 중간 쉬어가며 힘을 충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불과 몇 달 사이에 폭행 기록을 얻고 병원에서 짤린 신세에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강남에 깃발을 꽂고 연예인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그는 더 빠른 속도로 상류 사회를 향해 돌진할 것 같았다.
소파에 몸을 묻은 한지호의 거동이 강남 바닥을 흔들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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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신사동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에서 검은색 아우디 A5가 미끄러지듯 빠져 나왔다.
밤의 색깔과 동화된 검은 차체가 한적한 도로 위를 가로질렀다.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강남도 자정을 넘긴 시각에는 비교적 조용해진다.
젊은이들이 밤새 노는 클럽 몇 곳과 논현동, 강남역 일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거리에 조명이 꺼진다.
한지호는 애마인 A5를 직접 운전해 청담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오피스텔이 위치한 신사동 가로수길 부근도 이 시간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청담동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화려한 불빛이 잦아들고 적막이 내려앉을 타이밍이었다.
끼이익-
한지호는 청담동 골목에 차를 세웠다.
굳이 주차장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주차 단속을 하는 사람도, 구역 다툼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발렛 요원도 모두 집에 들어간 시간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대충 차를 세워둔 그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익숙한 건물 앞에서 멈춰섰다.
24시간 경비를 도는 직원이 다가왔지만 한지호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만큼 한지호가 이 건물에 자주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청담동 복판에 세워진 1%를 위한 요새.
김해수가 사는 빌라에 도착한 한지호는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지정된 번호를 누르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대리석으로 장식 된 복도가 그를 반겼다.
청담동 빌라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당연하다는 듯 5층을 누른 그에게서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자주 방문하던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자기 집을 찾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전자음을 내며 5층에 다다랐다.
성큼 내린 한지호는 김해수의 집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이 열렸다.
철컥!
“왔어요?”
열린 문틈 사이로 김해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한지호는 미소로 화답하며 얼른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문이 닫혔고,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둘만의 공간이 완성됐다.
구음절맥 치료가 끝났음에도 청담동 빌라에 방문한 한지호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김해수 역시 당연히 올 사람이 왔다는 듯 부엌에서 탄산수를 가져왔다.
둘은 구음절맥이 완치된 날 격정적으로 서로의 몸을 탐했고, 그날 이후 이따금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연인이나 커플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관계였다.
그저 서로가 보고 싶을 때 연락을 해 만나는 편한 사이지만, 단순한 섹스 파트너 이상의 교감을 나누는 건 분명했다.
구음절맥이라는 큰 병을 함께 극복한 의사와 환자 사이였다는 점, 그것만으로도 둘 사이에는 끈끈한 신뢰가 흐를 수밖에 없었다.
“강남 생활은 어때요?”
“딱히 다를 건 없는데, 그래도 적응하고 있습니다.”
한지호는 김해수가 가져온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시고 물음에 대답했다.
시원하게 퍼지는 탄산수의 느낌이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 맛이 빠진 사이다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적응을 하고 나니 일반 물은 맹맹해서 못 마실 지경이 됐다.
왜 사람들이 비싼 돈을 줘가며 수입 탄산수를 마시는지 알 것 같았다.
한 모금 더 탄산수로 목을 축인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CF 촬영은 어땠어요? 오랜만의 복귀라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던데.”
“아주 좋았어요. 컨디션도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고, 참. 조만간 새 영화에 들어가요. 몸이 아파서 미뤘던 시나리오인데 감독님이 날 기다려줬어요.”
“잘됐네요. 영화 촬영 시작하면 진짜 바빠지겠군요.”
“그래서 오늘 연락한 거예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한 선생님을 더 보고 싶어서요.”
김해수가 연인에게나 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한지호도 어색함 없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둘은 그날 이후로도 몇 번 만나 뜨거운 시간을 가졌고,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보수적인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김해수, 그리고 아직 누구에게도 구속되고 싶지 않은 한지호는 서로 잘 맞는 파트너였다.
김해수의 나이가 조금 많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녀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다.
한창 잘 나가는 20대 여자 연예인들도 김해수와 비교하면 풋내기 애송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지호는 김해수를 통해 여자를 배워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농염한 여자인 김해수가 그의 파트너이자 선생님인 셈이다.
“이지은의 목을 고친 게 한 선생님이라면서요?”
그녀가 질문을 던지며 몸을 밀착시켰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둘의 무릎이 딱 붙어 있었다.
한지호는 맞닿은 무릎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즐기며 천천히 대답했다.
“무리한 스케줄로 성대가 잠겨 있던 걸 풀어줬습니다. 기한은 일주일이었고, 당연히 성공했죠.”
“연예계에 소문이 돌고 있어요. 김해수의 난치병을 고친 젊은 한의사가 이지은의 고음을 회복시켜줬다고. 역시 이 바닥 소문은 진짜 빨라요.”
“좋은 일이겠죠? 앞으로 연예계에서 날 찾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할 거예요. 연예계에서 알려진다는 거, 만만치 않은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라서.”
“왕관을 쓰려면 무게를 감당해야죠. 그만한 부담은 안고 가겠습니다.”
“그래요? 쉽지만은 않을 텐데. 하긴, 한 선생님이라면.”
김해수가 도발적인 시선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는 더 이상 길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님을 직감했다.
몸의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남은 말을 천천히 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술로 김해수의 입술을 머금었다.
먼저 다가가 스킨십을 리드 할 만큼 능숙해진 것이다.
“으음…….”
김해수의 입술 사이로 듣기 좋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입술에 이어 온몸이 포개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녀의 청담동 빌라에서 한 결 남자답게 성장한 한지호가 뜨거운 밤을 열고 있었다.
10장, 성장(成長)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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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매번 침실로 올라갈 겨를도 없이 거실 소파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김해수의 청담동 빌라 거실은 웬만한 집 침실 몇 개를 합쳐놓은 것보다 넓었고, 소파 역시 킹 사이즈 침대가 부럽지 않은 사이즈였다.
반쯤 알몸이 된 두 사람은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모든 것을 쏟아내며 격렬한 시간을 가진 후에는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오늘도 좋았어요.”
“칭찬, 맞죠?”
“그럼요. 한 선생님은 최고의 몸을 갖고 있어요. 연예인들이 중요한 촬영을 앞두고 만든 몸 같아요.”
김해수가 한지호의 조각 같은 몸을 치켜세웠다.
그녀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오금희를 수련하며 단단하게 변한 한지호의 몸은 하나의 예술품이나 다름없었다.
미세하게 갈라진 잔근육은 보기에도 아름다웠고, 실제로 힘을 쓰기 위한 최적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단련된 몸으로 온힘을 쏟아내니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해수가 헐렁한 박스티를 추스리며 칭찬을 더했다.
“처음에는 많이 서툴렀는데 이젠 날 리드하는데요? 정말 빨리 배우는 거 같아요.”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해수 씨니까 빨리 늘 수밖에 없죠.”
“내가 왜요?”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 스타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스레 분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농담도 하고, 진짜 많이 늘었어요.”
김해수가 웃으며 한지호의 삼두박근을 어루만졌다.
화가 난 듯 치솟은 삼두박근에 아직까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방금 전 관계가 얼마나 격렬하고 뜨거웠는지 짐작이 됐다.
“기대도 괜찮아요.”
한지호의 말에 김해수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한지호의 넓은 품을 베개 삼아 몸을 눕혔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무거울 텐데.”
“얼마든지.”
소파 위에 포개어진 두 사람은 짙은 여운을 즐기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쪽은 김해수였다.
“우리 매니저에게 한 선생님 전화번호를 묻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이지은 경우처럼.”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르쳐 주라고 했어요.”
“고맙습니다. 해수 씨 덕분에 연예계에서 활약 할 길이 열린 것 같습니다.”
“한 선생님 실력이 출중하니 가능한 일인데요, 뭘.”
“그래도 큰 힘이 됩니다. 김해수를 치료해서 복귀하게 만든 한의사라는 타이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내 이름을 이용해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줄게요. 난 한 선생님이 지금보다 훨씬 큰 거물이 됐으면 좋겠어요.”
“왜죠? 단순히 김해수 씨를 치료해준 사람이니까?”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도 있고, 또…….”
“또?”
“나를 한 번이라도 가졌던 남자가 별 볼일 없어지는 건 싫으니까요.”
예상은 했지만 과감한 말에 한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끔 폐부를 찌르는 도발적인 발언이 김해수의 주요 매력 포인트였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해수 씨를 가졌던 남자로서 반드시 거물이 되고 말죠.”
한지호는 가볍게 웃었지만 자신이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김해수도 단순히 농담으로 던진 말은 아닐 것이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조심할 게 많아질 거예요.”
“새겨 듣겠습니다.”
한지호는 그녀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예계라는 거친 바닥에서 온갖 꼴을 다 보며 10년 넘게 톱의 위치를 지킨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