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한지호는 조기운의 어깨를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전역 기념으로 신나게 놀았어?”
“네. 원 없이 놀았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일만 할 겁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기운아. 이 오피스텔은 내가 사는 곳이면서 동시에 더 큰 세계로 올라가는 계단이 되어줄 거야.”
한지호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방이 3개나 있는 넓은 오피스텔을 원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방 하나는 침실로 쓰고, 나머지 하나는 청우단 등을 조제하는 약제실로 쓸 계획이었다.
마지막 남은 방은 급하게 찾아온 환자를 위한 진료실로 만들 것이다.
통유리 너머 강남 일대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그리고 미니 바(mini bar)가 갖춰진 부엌만 보면 전형적인 럭셔리 오피스텔이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한지호의 쉼터이자 일터였다.
한지호는 황만금과 김해수라는 두 명의 VIP를 치료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강남에 깃발을 꽂아 자신의 성을 쌓을 태세였다.
“기운아, 너도 금방 이런 집으로 이사 오게 될 거니까 나만 믿어.”
“정말 그렇게 될까요?”
“그럼. 나도 연남동 방에서 세 달 정도 살았나? 그리고 바로 여기로 이사 왔잖아.”
한지호가 살던 연남동 자취방은 조기운이 쓰게 됐다.
조기운은 의경을 시작하기 전부터 모아놓은 돈이 있었고, 마침 연남동 자취방과 조건이 딱 맞아 일사천리로 계약을 맺었다.
한지호는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믿고 20대 청춘을 건 조기운에게도 달콤한 열매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조기운은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뭐라도 믿을 것 같았다.
“저는 뭘 하면 될까요, 형님?”
조기운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한지호는 그에게 함께 일을 하자는 제의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운은 한지호가 살던 연남동 자취방을 계약하고, 다른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웬만한 믿음이 없이는 힘든 일이다.
한지호 역시 조기운이 자신을 믿고 따른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는 조기운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공부도 많이 하고, 너 스스로 바닥부터 부딪친다는 각오를 해야 해.”
“밑바닥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생이었습니다. 지호 형님께서 저를 선택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우선 이 리스트부터 완벽하게 외워. 당장 알아야 할 것들을 정리해 놓았으니. 쉽지 않겠지만 네가 제 몫을 하기 시작하면 우린 함께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갈 수 있어.”
“네, 형님!”
조기운은 의욕적으로 대답하며 한지호가 내민 리스트를 건네받았다.
여러 장의 서류 뭉치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연락처, 직장에서의 지위는 물론이고 말투와 습관, 평소 성격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리스트를 본 조기운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리츠 캐피탈 김성운 과장, 플래티넘 홀딩스 김필성 대리, 신화 증권 박명호 팀장 등의 신상명세와 말투, 습관, 생김새를 왜 달달 외우라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기운이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 생각했어.”
“여기 적힌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너의 첫 번째 고객들이니까 인상착의와 직함, 작은 습관과 버릇까지 놓치지 말고 철저하게 외워둬.”
“첫 번째 고객들이요?”
“여의도 증권가와 광화문, 강남의 직장인들 중에서 제법 잘 나가는 사람들이지. 모두 내가 만든 청우단이라는 약을 정기적으로 구매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아아…….”
조기운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리스트를 다시 쳐다봤다.
한지호는 냉정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얼굴을 팔면서 홍보한 사람들도 있고, 입소문을 통해 청우단을 구매하게 된 사람들도 있어. 대부분 각 회사에서 중진급 이상을 맡고 있으니 어설픈 태도로 대하면 신뢰를 잃게 될 거야. 앞으로는 네가 이 고객들을 관리하면서 추가로 들어오는 주문까지 맡아. 한 달에 최대 2000알 까지 한계를 정해놓고, 주문이 겹치거나 밀리지 않도록 조율을 잘 해야겠지. 그렇다고 주문을 너무 적게 받아도 안 되고. 이 모든 과정을 완전히 마스터하는 게 내가 너한테 주는 첫 번째 미션이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형님!”
“최선으로는 부족해. 최단 시간 안에 최고가 되어야 해.”
한지호의 말에 조기운은 감명을 받은 듯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기운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또래에 비해 말귀를 빨리 알아듣고, 똑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않았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무겸장 조자룡의 기운을 타고났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나라의 주유나 여몽이 문무겸장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촉한의 조운 역시 무예와 지략을 겸비한 장수였다.
그가 노쇠해서도 군대를 이끌고 촉한을 지켰던 건 나이가 들수록 깊어진 지략 덕분이었다.
그런 조자룡의 명맥을 이어 받았으니 조기운의 머리도 쌩쌩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한지호는 단순히 하기 싫은 허드렛일을 맡긴 게 아니었다.
청우단 고객 리스트를 넘기며 판매량 조절까지 알아서 하라고 맡긴 건 조기운에게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준 것이다.
절대 쉬운 미션이 아니라는 건 조기운도 직감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그를 향한 한지호의 신뢰도가 결정 될 것 같았다.
체육 특기생으로 살다가 가정형편 때문에 방황하기 시작했던 조기운은 거친 노가다 판을 전전하며 내일이 없는 인생을 살았었다.
그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어진 한지호의 목소리는 조기운의 동기를 강렬하게 자극하기 충분했다.
“기운아,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청우단 주문을 매개로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 전체가 너에게 무엇보다 값진 교육이 될 거다. 그들은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야. 엘리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하나도 놓치지 말고 배워. 언젠가 더 중요한 자리에 함께 갈 때, 너에게서 엘리트다운 모습이 흘러 나왔으면 좋겠어.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작은 일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확실하게 배우겠습니다.”
“일단 웬만한 회사에서 주는 월급보다는 많이 챙겨줄게. 청우단 주문 수량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수준이 되면 인센티브도 따라갈 거고.”
“저는 지호 형님이 주시는 대로만 받으면서 배우겠습니다.”
“같이 배우고, 같이 커서 같이 잘 되자. 그게 내 모토야.”
한지호가 활짝 웃으며 조기운의 등을 두드렸다.
강남으로 터전을 옮기고, 더 큰 물에서 놀아보려는 한지호에겐 조기운처럼 믿음직한 오른팔이 꼭 필요했다.
조기운이 청우단 고객 관리를 맡아주면 한지호는 남는 시간을 상류층 인맥 확장과 치료에 투자할 수 있다.
강남 정복을 위한 전초지, 신사동 오피스텔에서 새로운 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야망이 강남을 비추는 것 같았다.
8장, 강남 스타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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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지켜야하는 룰이다.
누군가 법을 어기면 처벌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법의 맹점을 몸소 경험하며 성장해왔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보육원에서 자라 성인이 된 이후까지 법은 늘 가진 자들의 편이었다.
천사원이 철거되던 과정에서도 법은 약자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한지호는 용역 깡패 세 명에게 구타를 당했지만, 몸에 증거가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행 가해자가 됐었다.
어디 그뿐인가.
조기운과 운명적으로 만났던 불광동 현장에서도 법은 약자의 편이 아니었다.
경찰들은 용역들이 불법으로 가정주택에 침입해 난동을 부리는 걸 뻔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주민들의 편을 들지 않았었다.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한 조기운은 오히려 쓸데없이 나섰다고 욕을 먹었다.
물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될 때도 많을 것이다.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좋은 경찰,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착한 판사도 없지 않다.
하지만 법이라는 게 늘 공명정대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매번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단순히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국내 법규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리타분한 구식 악법(惡法)도 넘쳐난다.
한지호는 그동안 여러 사례를 찾아보고, 유건영의 조언을 받아 결정을 내렸다.
법의 틈새에서 조금 더 몸집을 키우기로 한 것이다.
사실 한약을 제조해 판매하고 환자들을 진료하려면 한의원을 개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지호는 당장 개원을 할 계획이 없었다.
지금 개원을 해봤자 자질구레하게 신경 쓸 일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상류층 사이에서 확실히 인정을 받은 후 빅뱅(big-bang)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개원 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전에 간단히 사업자 등록을 할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이런저런 법에 걸릴 구실만 만들어주는 꼴이다.
사업자가 있어도 진료 없이 약을 팔면 약사법에 걸린다.
청우단을 약이 아닌 건강식품이라 주장하려면 제조법을 낱낱이 공개하고 특허를 받아야 한다.
특허를 받는다고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한의사가 한약 제조법을 개발해 특허를 내도 일단 상품등록을 하고 나면 오직 약사들만 판매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국회와 정부 요직을 약사들이 장악하고 있기에 법이 앞뒤가 안 맞게 약사 위주로 설정 된 것이다.
결국 한동안은 법의 그늘에서 몸집을 키우고, 나중에 대형 병원을 열어 공식적으로 다양한 약을 판매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청우단에만 집중하고, 상류층 인맥을 넓히며 고가의 치료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위법(違法)의 소지가 있다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한지호는 그 리스크를 기꺼이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강남 바닥에서 큰돈을 버는 사람 대부분은 이런저런 위험을 떠안고 살아간다.
필요에 의해 개원 대신 프리랜서 한의사로 활동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어느 정도의 위험은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청우단 판매나 상류층 치료가 문제가 된다면 그때 가서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
물론 아무 대책 없이 속 편하게 결정한 건 아니었다.
청우단은 그동안 쌓인 네트워크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된 수량으로 판매할 것이다.
조기운을 통해 판매량과 고객을 조절할 예정이라 문제의 소지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청우단이나 치료와 관련해서 법적인 문제가 불거지면 그동안 쌓아 놓은 인맥을 활용해 대처를 하면 될 터였다.
한지호는 온갖 룰이 교차하는 정글에서 싸우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사람은 이 잔인한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두 건의 승전보를 올리고 강남에 깃발을 꽂은 한지호는 구더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화려함으로 포장된 상류층의 정글에서 맹수들과 싸울 준비를 마쳤다.
어느새 이 정글에 녹아든 것 같았다.
부우우웅-
한지호는 제법 우렁찬 배기음을 뿜어내며 강남대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택시에 탄 게 아니다.
검은색 매끈한 차체, 두 개의 문이 만들어내는 스포티하고 세련된 쿠페 디자인,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려한 실루엣.
거기에 상징과도 같은 동그라미 네 개가 박힌 아우디 A5 쿠페를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운전면허를 딴 한지호는 요즘 아우디 A5를 몰고 드라이브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김해수가 구음절맥을 치료해준 대가로 선물해준 검은색 쿠페는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아무리 강남에 BMW와 벤츠, 아우디가 흔해도 외제차는 외제차다.
특히 A5처럼 잘 빠진 쿠페 형 스포츠카는 시선을 끄는 마력이 있다.
좋은 차를 타면 자신감도 충만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한지호는 은근한 시선을 즐기며 강남의 화려한 열매를 맛보고 있었다.
아우디 A5를 타도 이 정도인데 만약 포르쉐나 벤틀리,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를 몰고 다니면 어떨까.
욕망은 끝이 없다.
한지호는 자연스레 더 높은 레벨의 차를 원하게 됐고, 최고급 오피스텔에 만족하지 못하고 청담동 빌라를 꿈꾸게 됐다.
끊임없이 더 새롭고 더 화려한 욕망으로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도시.
그곳이 바로 강남이다.
단순히 어느 지역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욕망과 꿈, 돈과 사람이 압축 돼 있는 특별한 정글을 강남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지호는 강남의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하며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다.
끼익-
그는 넓은 테라스를 지닌 논현동의 카페 주차장에 아우디 A5를 세웠다.
테라스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들의 눈길이 한지호를 스치고 지나갔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말끔한 인상에 아우디까지.
누가 봐도 전형적인 강남 부잣집 출신의 20대 도련님 스타일이었다.
한지호는 여자들의 시선을 살짝 의식하며 테라스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에서 햇살을 맞으며 스케줄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강남에 스며들기 시작한 한지호의 다음 행보가 사뭇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