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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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수에게 천종산삼으로 만든 약을 건네주고 침을 놓은 게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아직 그녀로부터 특별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지호는 조급하게 여기지 않고 일상을 영위해 나갔다.
추가로 꾸준히 주문이 들어오는 청우단을 제조해 팔았고, 매일 공터에서 오금희를 수련했다.
그는 잘 모르고 있지만 테헤란 로와 여의도 금융권 일각에서는 슬슬 청우단에 대한 입소문이 도는 중이었다.
숙취 해소와 각성에 탁월한 효과를 지닌 천연 한약이 존재하고, 암암리에 거래 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최근 들어 추가 주문이 끊이지 않는 것도 입소문의 영향이었다.
“어? 잘못하면 늦겠는데.”
새로 구입한 약초로 청우단을 만든 한지호가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 시간이 간당간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취방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은평 경찰서로 가주세요.”
뜬금없이 경찰서로 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은 조기운이 외출 허가를 받아 나오는 날이었고, 일전에 경찰서를 방문해 친분을 다진 한지호가 밥을 사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조기운 자신은 모르지만 한지호는 그의 전생에 대해 알고 있다.
촉한의 오호대장군 중에서 마지막까지 전장을 누볐던 불세출의 용장, 조운 자룡.
위나라 강군의 오금을 저리게 한 상산 조자룡이 바로 조기운의 전생이었다.
조기운은 단순히 외모만 조자룡을 빼닮은 게 아니었다.
조폭이나 다름없는 용역들을 밀치고 꼬마 아이를 구할 정도로 용기와 힘이 넘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바른 마음을 잃지 않았다.
타고난 신체 밸런스가 뛰어나서 체육 특기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국가대표가 됐을 재목이었다.
한지호는 지난 번 만남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었다.
재능은 뛰어난데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 고생을 하는 조기운이 남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기운도 마음을 열고 한지호를 형으로 대했다.
그는 K대 출신의 한의사이면서 손가락 하나로 용역 우두머리를 꼼짝 못하게 만든 한지호를 존경하게 된 것 같았다.
“다 왔습니다.”
“네, 여기서 내려주세요.”
한지호는 택시비를 지불하고 은평 경찰서에서 내렸다.
굳이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조금 지나면 외출 허가를 받은 조기운이 정문 밖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은평 경찰서 정문 앞에서 조기운을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쯤 흘렀을까.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한지호의 예민한 감각에 캐치 됐다.
“형님!”
의경 정복을 입은 조기운이 어린 아이처럼 달려와 한지호 앞에 섰다.
큰 눈동자와 깔끔한 인상, 그리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맑은 에너지는 여전했다.
“기운아!”
한지호도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꽈악-
세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없어?”
“전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거 알지?”
“그럼 고기 먹어요, 형님!”
“그래, 고기 좋다!”
한지호는 조기운을 데리고 불광역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불광역 부근에 식당들이 많이 몰려 있다.
둘은 터벅터벅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불과 몇 주 전에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눴지만 여전히 할 이야기가 많았다.
곧 전역을 앞둔 조기운은 사회생활에 대해 궁금한 게 넘쳤다.
체육 특기생을 그만두고 의경을 하기 전까지 노가다로 연명했지만,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대학을 안 나왔어도 사람답게 대접 받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남들보다 두 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능하다니까!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기운아.”
한지호는 그의 팔을 붙잡고 길 건너에 보이는 고기집으로 들어갔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리 손님이 많지 않았다.
널널한 자리에 앉은 한지호는 큰 소리로 주문을 했다.
“삼겹살 3인분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그의 주문을 받은 주방 이모는 이렇다 할 대답도 없이 설렁설렁 움직였다.
친절한 집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고기집에서는 고기만 맛있으면 된다.
한지호는 상추와 깻잎 등이 놓이는 와중에 조기운이 꺼냈던 말을 곱씹었다.
“대학을 안 나와서 제대하고 어떻게 살지가 제일 걱정인 거지?”
“네, 형님. 참 한심하죠?”
“전에도 말했지만 하나도 안 한심하다니까! 그리고 남들보다 두 배 더 노력한다는 각오만 하면 된다.”
“해야죠. 길만 보이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라도!”
“그 길은 내가 열어줄게. 전역하고 나랑 같이 일하자, 기운아.”
“정말 그래도 될까요?”
“난 빈말 같은 거 안 해. 진짜 너랑 같이 일을 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야.”
“그런데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 할 줄 아는 거라곤 몸 쓰는 거밖에 없습니다.”
“그거면 충분해. 기운아, 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
“한의사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형님.”
“맞아. 근데 난 병원 소속도 아니고, 당분간은 내 이름으로 병원을 열 생각도 없어.”
“그럼 어떻게 일을 하고 계세요?”
“프리랜서 한의사라 생각하면 이해가 되겠어?”
“아…….”
“아무튼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해. 길은 내가 열 테니 너는 죽어라 노력하면서 따라오면 된다. 알겠지?”
“네, 형님!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조기운이 듬직하게 대답했다.
때마침 삼겹살이 나왔고, 한지호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그는 조기운이라는 원석을 어떻게 보석으로 다듬을지, 또 무슨 일을 함께 할지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 놓았다.
아주 오래 전, 유비는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조자룡을 탐냈었다.
계획이 없어도 일단 잠재력이 있는 인재를 보면 무조건 사로잡으려 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집착이 유비를 촉한의 군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한지호는 처음 조기운을 봤을 때부터 욕심을 냈고, 이제는 그와 함께 판을 키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은 조기운을 고졸에 노가다 경력밖에 없는 막장 20대로 볼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의 눈에는 그가 조자룡의 기상을 품고 있는 원석으로 보였다.
“기운아, 한 잔 하자.”
“건배는 뭐로 할까요?”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한지호는 고기와 함께 나온 소주를 뚜껑을 열었다.
이윽고 조기운이 한지호의 잔을 채워줬다.
둘은 잔을 부딪치며 신나게 외쳤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뜨거운 열정과 에너지로 똘똘 뭉친 청춘들이 소주 한 잔에 희망과 야망을 담았다.
한지호가 열어갈 창대한 미래는 이제 겨우 서막이 보이는 단계다.
그는 삼국시대 주유의 천하이분계나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 못지않게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6장, 방중술(房中術) (1)
전역을 앞둔 조기운과 회포를 풀며 한층 더 가까워진 한지호는 금방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의 일상은 청우단을 만들어 파는 것이다.
입소문을 타고 추가 주문이 몰려서 청우단을 만드는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환단이지만 물량이 많아지니 일이 만만치 않았다.
이럴 바에는 청우단만 전문으로 만드는 작업실을 하나 차려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명징약초에서 구입한 깨끗한 약초로 청우단을 만들며 땀을 닦았다.
예전보다 많은 양을 만들다보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좁은 자취방에서 공간의 한계도 느껴졌고, 자칫 약초 냄새가 건물로 퍼지면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한지호는 이번 물량까지만 연남동 자취방에서 만든 후 새로운 공간을 얻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황만금에게 받은 치료비와 지속적으로 청우단을 판매한 돈이 통장에 쌓여 있으니 새 집과 작업실을 얻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돌리는데 스마트 폰이 울렸다.
우우웅- 우우웅-
유달리 큰 소리로 진동하는 스마트 폰이 한지호의 휴식을 방해했다.
무시하고 침대에 누워있을까 싶었지만, 그는 곧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손을 뻗었다.
“어?”
스마트 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이 한지호를 반색하게 만들었다.
지난 일주일 가까이 기다리던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기 때문이다.
“한지호입니다.”
얼른 전화를 받은 한지호의 목소리 톤이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김해수.
그녀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건 분명 좋은 의미일 것 같았다.
“한 선생님. 할 이야기가 있어요.”
“네. 편하게 하세요.”
“침을 맞고, 또 매일 산삼으로 만든 약을 먹으니까…….”
“차도가 보였습니까?”
“푸른 반점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아서요. 눈에 띄게 큰 변화는 아니지만, 효과가 있는 건 분명해요.”
“그럴 수밖에요. 침술과 산삼의 영향으로 구음절맥의 음기가 위축됐을 테니.”
“한 선생님의 치료법이 통한다는 걸 믿어요. 지금으로선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죠. 그런데 정말 이대로는 완치가 안 되는 건가요?”
“일종의 음양교합 없이 침술과 산삼만으로 완치가 안 되냐는 거죠?”
“그래요.”
김해수는 한지호의 치료법이 통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고픈 모양이었다.
아무리 쿨하고 화끈한 섹시 스타라고 해도 외간 남자와 알몸을 맞대는 치료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한지호도 다른 대안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제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구음절맥이라는 큰 산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양교합을 거쳐야 한다.
방중술을 응용하면 실제로 정사를 나눌 필요는 없다.
거기까지가 한계선이었다.
“지금처럼 산삼으로 만든 약을 복용하고, 계속 침을 맞으면 당장은 푸른 반점이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구음절맥의 뿌리를 잘라내진 못합니다. 침술에 내성이 생기고, 산삼으로 만든 약을 다 먹으면 구음절맥은 다시 마수를 뻗을 겁니다. 없어졌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푸른 반점이 늘어나고, 그 뒤에는…….”
한지호는 굳이 뒷말을 다하지 않았다.
전신에 퍼진 반점이 곪아서 죽게 된다는 말을 여러 번 할 필요는 없다.
한 번만 들어도 절대 잊지 못 할 말이기 때문이다.
“휴우-. 정말 어쩔 수 없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김해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지호는 말을 아끼고 조용히 기다렸다.
결정은 김해수의 몫이다.
그는 희한한 증상이 구음절맥이라는 체질 때문이라는 걸 알려줬고, 그에 따른 치료법을 제시해 효과를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마지막 치료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
환자가 마음을 열고 의사를 신뢰해야만 치료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윽고 김해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게요, 그 치료.”
“결단을 내린 겁니까.”
“한 선생님 말고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어쩌겠어요.”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꼭… 꼭 완치시켜 주세요. 피부가 움푹 파이고 푸른 반점이 돋아나는 경험을 다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해수의 음성에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최고의 여배우라는 가면을 쓰고 괜찮은 척 연기를 해왔지만, 그녀 역시 한 사람의 여자다.
김해수는 여자로서 가슴이 흉측하게 변한 것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더 나아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불러오는 구음절맥의 무서움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한지호는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두려움을 읽었다.
그는 환자를 대하는 한의사로서 진심을 담아 약속을 했다.
“반드시 말끔하게 나을 겁니다. 구음절맥이라는 체질이 뭔지 기억도 못 할 만큼 깨끗한 몸으로 돌아가게 만들겠습니다.”
“한 선생님만 믿을게요.”
“살면서 받은 믿음을 배반한 경우는 없습니다. 김해수 씨가 보여준 신뢰, 완벽한 치료로 보답하겠습니다.”
누구라도 한지호의 말을 듣는다면 믿음이 더욱 커질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의 마음, 특히 환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한 한의사였다.
원래부터 고아라는 출신 배경 탓에 어려운 상황의 환자들을 이해하는 깊이가 남달랐었다.
그런데 전생의 기억과 경험까지 생겼으니 다른 20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그릇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연예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해수도 한지호의 말에 위로를 얻었다.
“그럼 언제 만날까요, 한 선생님?”
“준비를 마치고 내일 찾아가겠습니다.”
“알겠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약 빼먹지 말고, 편하게 푹 자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짧은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