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그의 당당한 자세와 표정에 이원복도 흠칫 놀란 것 같았다.
어리다고 만만하게 얕볼 애송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최치우가 나섰다.
“원복아, 내가 이름을 걸고 보증한다지 않았냐. 여기 한 선생은 그저 그런 한의사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네도 이해하게. 원복이 녀석이 산에서만 굴러서 성격이 날카롭고 의심이 많다네.”
최치우는 살짝 과열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며 본론을 꺼냈다.
“오늘은 산삼을 보기 위해 모이지 않았나. 원복이, 너도 어렵게 캔 산삼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기 원하고……. 한 선생도 최상품의 산삼을 필요로 하고 있고. 우선 물건부터 보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더 나눠보세.”
“알겠수다. 저 친구도 치우 형님 말대로 어중이떠중이 한의사로는 안 보이니 물건을 풀어 보겠소.”
이원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탁자 위에 올려둔 검은색 상자를 만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꼼꼼하게 밀봉된 검은색 상자 안에 산삼이 들어있는 것이다.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살면서 한 번을 보기 힘들다는 자연산 산삼이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상자를 여는 이원복은 물론이고, 최치우와 한지호도 숨을 죽이고 신경을 집중했다.
스으윽-
드디어 검은색 상자가 열렸다.
이원복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함을 꺼내 올려 놓았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함의 뚜껑을 열었다.
샤아아아아-!
함이 열리는 순간,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청아한 향기가 명징약초 내부를 감쌌다.
한지호는 코끝으로 느껴지는 맑은 향에 취할 것만 같았다.
‘이건 진짜야!’
냄새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원복이 가져온 건 진짜 자연에서 자란 최상품 산삼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물건을 또 한 번 캘 수 있을런지 모르겠소.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놈이오.”
“이건 정말……. 원복이, 자네에게 천운이 임했구만.”
최치우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베테랑 약초꾼 출신인 그가 단번에 최상품임을 인정 한 것이다.
한지호는 고개를 내밀고 함 안에 들어있는 산삼을 자세히 살펴봤다.
굵은 뿌리에 산의 정기가 충실히 담겨 있었고, 잔뿌리의 길이와 개수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굵기, 길이, 모양, 그리고 향기까지.
최소 100년은 된 천종산삼이다.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라는 100년 산삼이 눈앞에서 위풍당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떠한가?”
최치우가 한지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원복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모삼(母蔘)의 뇌두 숫자, 뇌두가 세 번 갈린 점, 산삼이 성장을 멈췄을 때 나타나는 흔적을 합산하면 110년 이상이 나오겠군요. 천종산삼의 모양을 흉내 내서 만든 모조품이 판을 친다지만, 향기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굳이 연대측정기로 재볼 필요도 없습니다. 110년 수령의 천종산삼입니다.”
한지호는 명쾌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의 말을 들은 최치우와 이원복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순히 산삼의 가치를 측정한 것뿐 아니라 그 근거까지 정확히 맞았기 때문이다.
뿌리가 되는 모삼의 모양과 세월에 따라 갈라지는 뇌두의 변화까지, 이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하는 건 숙련된 약초꾼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망설임 없이 정확한 근거를 들어가며 산삼의 종과 수령을 맞췄다.
어설프게 눈치를 봐가며 아는 척을 했다면 대번에 티가 났을 것이다.
이원복은 방금 전과 달라진 표정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역시 치우 형님이 아무나 믿는 게 아니었군. 젊은 선생이 산삼을 제대로 볼 줄 알다니 놀랍수다.”
“이 산삼, 어디서 캐신 겁니까?”
“속리산에서 건졌수.”
“속리산.”
한지호는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로부터 지리산과 속리산은 심마니들에게 양대 명산으로 불려왔다.
남한 땅에서 산삼의 씨를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산이 바로 속리산과 지리산이다.
그만큼 수많은 심마니들이 두 산을 찾기 때문에 막상 산삼을 캐기는 더 어렵다.
110년은 되어 보이는 천종산삼을 캤다는 건 이원복이 대단한 내공의 심마니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었다.
하늘이 운을 내려줘야 하지만, 단순히 행운만으로 산삼을 캘 수는 없다.
한지호는 까탈스럽고 괴팍해 보이는 이원복의 겉모습에 가려진 진면목을 주시했다.
평생 산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는 집념, 자신이 캐낸 약초에 대한 애정, 험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킬 강단까지.
최치우가 믿을만한 후배라고 소개해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산삼이 아니라도 두고두고 알고 지내면 좋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김해수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좋은 구경을 한 셈 치고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김해수의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최상품의 산삼이 필요하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눈앞에 110년 수령의 천종산삼이 짙은 향을 뿜어내고 있다.
한지호는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산삼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산삼, 제가 사고 싶습니다.”
그는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구매 의사를 밝혔다.
한지호의 말에 최치우와 이원복이 눈을 크게 떴다.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곧바로 사겠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네, 이게 얼마나 하는지 알고 있나?”
최치우가 이원복을 대신해 물었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당차게 대답했다.
“120년을 넘긴 천종산삼의 최고 가격이 3억 원이었습니다. 100년에서 110년 수령의 천종산삼은 시세가 1억 원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일세. 무려 1억이네, 1억!”
“1억보다 비싸도 꼭 사야합니다. 단순히 돈만 많이 준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한지호는 말을 마치고 확고부동한 눈빛으로 이원복을 쳐다봤다.
“제게 파십시오.”
이원복은 입을 꾹 닫고 한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사납게 치뜨고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명징약초 안에서 심마니 이원복과 한지호의 눈빛이 얽히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4장, 심마니와 산삼 (2)
이원복은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산삼은 돈으로만 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 같수다.”
“물론입니다.”
“거 심마니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이 안 중요하진 않지만 말이오.”
“당연하죠. 하지만 같은 값이면 삼을 제대로 쓸 사람, 또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심마니 세계의 법도라고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제법 풍문에 귀가 밝구만. 그럼 말이 쉬워지겠수. 이 110년은 될 법한 천종산삼을 한 선생에게 넘겨야 할 이유를 말해보시오.”
“특별한 약을 짓기 위해서 입니다. 최상품의 산삼을 쓰지 않으면 약효가 나지 않을 것이고, 아마 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갈 겁니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보통 재력이 있는 노인들이 원기 회복을 위해 산삼을 구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맡은 환자는 최상품의 산삼이 없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한지호는 비장한 얼굴로 산삼의 필요성을 말했다.
생명이 달린 일보다 중요한 이유는 있을 수 없다.
환자의 목숨에 달렸다는 말에 이원복의 표정도 살짝 누그러진 것 같았다.
“혹시 어떤 환자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자세한 신상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최고의 연예인 중 한 명이고, 그렇기에 1억이 넘는 산삼 가격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예인이라, 연예인. 대체 무슨 병에 걸렸기에 산삼이 아니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거요?”
“쉽게 말해 음기가 너무 강해져서 온몸을 잡아먹고 있는 경우입니다.”
“아!”
한지호의 설명을 듣고 이원복과 최치우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이름난 약초꾼이기에 기본적인 한의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
강력한 양의 기운을 지닌 산삼이 음기와 맞서 싸우는데 최적의 약초라는 걸 아는 것이다.
한지호는 김해수의 이름과 구음절맥이라는 체질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밝힐 수 있는 것을 다 알려줬다.
이원복도 한지호가 산삼을 꼭 필요로 하는 이유를 납득한 모양이었다.
“한 선생이 이 산삼을 간절히 원한다는 건 잘 알겠수다. 환자의 목숨이 걸렸다니 어렵게 캔 이놈이 제몫을 하겠지. 그런데 산삼은 아무나 다룰 수 있는 약초가 아니오. 천운이 도와 평생 몇 번 캐기 힘든 놈을 얻었는데, 이왕이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수?”
“제가 삼을 제대로 쓰지 못할까봐 염려하시는 겁니까.”
“치우 형님의 말만 들으면 아주 대단한 명의라는데, 내가 확인한 게 아니니 무작정 믿을 수 없는 노릇 아니오.”
이원복은 한지호를 시험하고 싶은 눈치였다.
돈을 주고 산삼을 사겠다는데 이토록 까다롭게 나오는 이유를 일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산삼도 아니고 100년이 넘게 묵은 천종산삼이다.
1억 원이라는 비싼 가격을 치를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공급은 적고 수요는 많으니 이런 경우엔 심마니가 갑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특별히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는 심마니 세계의 독특한 법도와 자부심을 이해했다.
그만한 강단이 없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산삼을 캐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한지호를 소개한 최치우가 난색을 표하며 이원복을 나무랐다.
“원복아! 내가 이름을 걸고 보증한다고 하지 않았냐. 한 선생은 요즘 보기 드문 명의가 확실하다. 청우단이라고, 직접 만든 환단을 먹어보면 너도 깜짝 놀랄 거다!”
최치우의 말에도 이원복은 한지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건지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한지호는 불쾌해 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옅은 웃음을 흘렸다.
평창동에서도 현금 부자로 유명한 황만금, 그리고 10년 넘게 탑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는 최고의 연예인 김해수 앞에서도 떨지 않고 스스로를 증명했던 사람이 바로 한지호다.
그는 괴팍한 기인처럼 보이는 이원복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다.
심마니로서 이원복을 존중하면서도 그를 충분히 납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최 사장님, 괜찮습니다. 산삼을 얻으려면 심마니의 마음부터 열어야죠. 굳게 닫힌 마음, 제가 직접 열겠습니다.”
한지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최치우도 한 발 물러섰다.
선배라고 해서 산삼을 팔아라 마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한지호를 신뢰하고 있기에 이원복의 마음을 얻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이원복이 워낙 괴짜로 유명한 심마니라 내심 불안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이원복은 한지호가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당당한 태도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든 것이다.
“산삼을 다룰 자격이 있다는 걸 어찌 증명하겠수?”
“이 자리에서 바로 보여드리죠.”
“이 자리에서? 지금?”
“네. 이곳 명징약초 안에서, 지금.”
한지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김해수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기 왼손을 다치게 만들었었다.
강렬한 충격을 주며 스스로의 의술을 증명하는 건 사실 전생의 규호가 즐겨 썼던 방법이다.
한지호는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아이처럼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산삼을 다룰 자격이니 침술을 보여드리긴 그렇고, 아무래도 약초를 가지고 놀아야겠군요.”
“약초를 가지고 놀겠다?”
이원복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지호는 몸을 돌려 최치우를 바라봤다.
“최 사장님, 진열대에 있는 약초들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자네 마음대로 써도 된다네. 원복이 저 녀석이 유별난 건 알았지만 이리 고집을 부릴 줄은, 쯧쯧.”
“아닙니다. 하늘이 내린 천종산삼을 얻는 게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한 한지호가 진열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원복은 팔짱을 끼고 그를 지켜봤다.
허튼 수작을 부리거나 실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바로 산삼을 들고 나갈 기세였다.
드륵- 드르륵-
한지호는 즉석에서 진열대에 들어있는 약초들을 꺼냈다.
그리 특별하거나 비싼 약초를 고르진 않았다.
청우단을 만들 때처럼 싸고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초만 선택했다.
물론 명징약초에 있는 것들은 약품 처리가 안 된 깨끗한 자연산이다.
그는 이원복과 최치우가 잘 볼 수 있게 직접 고른 약초들을 늘어놓았다.
“보시다시피 평범한 인삼과 당귀, 그리고 대추와 말린 생강입니다.”
“그걸로 뭘 어쩌려는 거요?”
“15분 뒤에 이것들이 어떤 약으로 변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겨우 15분으로 뭘 하겠다고…….”
“일단 보고 나서 말씀하시죠.”
한지호는 이원복의 말을 끊었다.
그는 최치우와 이원복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고른 평범한 약초를 만졌다.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뭘 해낼지 짐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툭! 툭!
한지호는 손을 씻은 뒤 맨손으로 약초를 짓이겼다.
뜨거운 물에 약을 달이거나 중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등뒤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바삐 움직였다.
최치우와 이원복은 말없이 한지호를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