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그가 15분 동안 무엇을 만들지 기대와 의심이 섞인 눈초리로 지켜보는 것이다.
두두둑!
엄지를 이용해 인삼을 짓이긴 한지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확한 양을 맞췄다.
당귀와 대추, 말린 생강은 쓰기 좋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짓이긴 인삼에 당귀 잎을 버무렸고, 대추와 말린 생강도 맨손으로 으깨어 같이 섞었다.
단순히 인삼과 당귀, 대추, 생각을 짓이겨 섞은 걸로는 특별한 효능을 낼 수 없다.
그러나 한지호에겐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그는 무공이자 도인술인 오금희를 의술에 응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침술에 오금희의 기운을 담아 황만금과 김해수에게서 톡톡한 효과를 봤었다.
오금희를 침술에 적용시키는 게 가능하다면 약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한지호는 맨손으로 짓이기고 으깬 약초를 버무리며 오금희의 기운을 주입시켰다.
인삼, 당귀, 대추는 양의 기운을 지닌 보양 약초이고 생강은 감기를 치료하는데 주로 쓰인다.
한지호는 네 가지 약초를 버무리며 손끝에 오금희 웅공(熊功)의 기운을 담았다.
화타가 곰의 모양을 보고 만든 웅공은 오장육부 중에서 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간은 곧 목기(木氣)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양기를 지닌 보양 약초에 나무의 기운을 실어주면 어떻게 될까.
균형이 딱 맞으면서 보양의 기운이 더욱 강하게 일어난다.
불이 나무를 장작으로 삼아 활활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고오오오오!
한지호는 손가락 끝에서 웅공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됐어!’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보양을 위한 약초들에 웅공의 목기를 버무리는데 성공했다.
이제 보기 좋게 모양을 만들면 된다.
그는 으깨어진 약초들을 돌돌 말아 동그란 모양의 환단으로 빚었다.
곧이어 엄지손톱보다 큰 환단 두 알이 완성됐다.
겉보기엔 평범한 인삼과 당귀 잎, 대추와 생강을 으깨서 섞은 뒤 아무렇게나 주물러 만든 환단이다.
하지만 오금희 웅공이 지닌 나무의 기운이 담기면서 약효가 증폭 돼 있다.
한지호는 흐뭇한 얼굴로 환단 두 알을 가리켰다.
사실 즉석에서 막 만든 환단이라 약초즙의 축축함이 남아있었다.
엄밀히 말해 환단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지만 한지호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오금희를 응용해 만든 약의 효능을 자신하는 것이다.
“이게 뭔가?”
“하나씩 드셔 보시죠. 이걸 먹으면 제가 산삼을 다룰 자격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의 말에 이원복이 눈을 부라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먹으라고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수작으로 산삼을 얻을 거라 생각하지 마슈.”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이원복이 손을 뻗었다.
한지호를 깊이 신뢰하는 최치우도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환단을 집었다.
두 사람이 거의 같이 환단을 입 안에 넣었다.
둘은 약초꾼답게 환단 먹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작은 크기의 환단은 물과 함께 삼키는 게 정석이고, 크기가 있는 것들은 몇 번 씹은 후 천천히 목으로 넘겨야 한다.
청우단도 그렇고, 한지호가 즉석에서 만든 환단도 엄지손톱보다 큰 크기이기에 씹은 후 삼키는 게 알맞은 복용법이다.
“음?”
“허어…….”
우물우물 거리며 환단을 씹어 삼킨 최치우와 이원복이 눈을 크게 떴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단을 삼키자마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3분만 기다려 보시죠.”
그의 말대로 침묵 속에 3분이 지나갔다.
60초가 세 번 흐르는 동안 최치우와 이원복의 표정은 점점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최치우는 물론이고, 한지호를 향해 사나운 기세를 보이던 이원복도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마치 산골짜기에서 좋은 약초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다.
그만큼 한지호가 만든 환단의 효능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한약을 먹고 즉각적으로 효능을 느끼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공진단 정도의 값비싼 약이 아니면 즉각적인 효능을 자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방금 한지호가 맨손으로 뚝딱 만들어낸 환단은 달랐다.
먹는 순간 아랫배가 뜨거워졌고, 3분이 지나자 따뜻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불쾌하거나 인위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은은하면서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를 편안하게 감싸주는 기분이었다.
인삼과 당귀, 대추, 생강이 보양에 좋지만 겨우 한 알을 먹고 바로 반응이 올 리는 없다.
하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분명한 약효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체온이 살짝 올라가며 기력이 든든하게 채워지는 신기한 느낌이 둘을 사로잡았다.
이원복은 백주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라워하며 말문을 열었다.
“대, 대체 무슨 수로 이런 약효를…….”
“비법을 공개할 수는 없죠.”
“정말 여기 있는 인삼과 당귀, 대추와 생강만으로 이런 약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것도 맨손으로 15분 만에!”
“눈으로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보고도 못 믿을 지경이니 이러지 않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믿으세요.”
이원복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지만, 한지호가 평범한 약초로 엄청난 효능을 내는 환단을 만들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는 아예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역시, 역시! 청우단을 먹고 알아봤지만 이건 더 놀랍구만! 원복아, 어떠냐? 한 선생이 보기 드문 실력자라고 말하지 않았냐!”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인 최치우가 이원복의 등을 두드렸다.
기세등등하던 이원복도 이번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사납던 눈매는 힘없이 풀렸고,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지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약초꾼으로 산 세월이 얼마인데… 살다 살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인 것 같수다.”
“어떻습니까? 제가 산삼을 다룰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까.”
“알겠소. 어쩌면 이 산삼은 처음부터 한 선생이 주인이었던 것 같소. 그 연예인이라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데 써주시오.”
“귀하게 쓰겠습니다.”
한지호는 환하게 웃으며 이원복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부심이 너무 강해 괴짜가 된 심마니 이원복의 높은 콧대를 꺾었지만 악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이원복도 한지호가 내미는 손을 덥썩 잡고 악수를 했다.
“지금 당장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아마 바로 산삼의 값을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알겠수다. 천천히 하시우.”
김해수에게 전화를 걸면 금방 1억을 보낼 것이다.
그녀는 구음절맥이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깨달았고, 한지호가 돈으로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고 있었다.
최치우는 악수를 나눈 한지호와 이원복을 쳐다보며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징약초라는 공간에서 또 다른 인연이 피어났고, 100년 넘게 묵은 천종산삼의 주인이 정해졌다.
한지호는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한 여정에서 커다란 난관 하나를 넘어선 것 같았다.
5장, 뜨겁고 뜨겁게 (1)
김해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한지호가 110년 수령으로 예상되는 천종산삼을 찾았다고 말하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돈을 보냈다.
사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1억 원을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중간에 유건영이라는 소개인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한지호를 믿어서인지 몰라도 김해수는 당연하다는 듯 1억을 이체시켰다.
연예계 안팍에서 화끈하기로 소문난 그녀의 성격이 묻어나온 것 같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억 원에 산삼을 산 한지호는 이원복과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그의 능력을 본 이원복도 만족했고, 최치우 역시 산삼이 알맞은 주인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산삼의 주인이 된 한지호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연남동 자취방에서 산삼을 다룰 수는 없다.
청우단 정도면 몰라도 천종산삼을 자취방에서 달여 약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다행히 그에겐 제 2의 고향 같은 명징약초가 있었고, 최치우는 하루 장사를 접어도 상관없다며 선뜻 공간을 내주었다.
최치우와 이원복에게도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한지호처럼 신기한 능력을 가진 한의사가 천종산삼을 어떻게 다루는지 볼 수 있는 기회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약초꾼 경력에 획을 그을 일이었다.
산삼을 캔 심마니는 있어도 산삼이 약으로 지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심마니는 거의 없을 터였다.
“필요한 게 있는가?”
최치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약을 짓는 한의사의 실력은 어떤 부재료를 얼마만큼의 비율로 쓰느냐에 따라 갈린다.
똑같은 산삼을 가지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약을 만들 수 있다.
당귀를 쓸지 안 쓸지, 쓴다면 얼마나 넣을지, 또 다른 부재료 약초들을 어떤 식으로 조합할지 여부는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다.
공식이 있는 게 아닌 만큼 수많은 정답과 수많은 오답이 공존한다.
한지호는 자신만의 방정식으로 천종산삼을 이용해 최고의 한약을 만들어낼 작정이었다.
“당귀 많이, 그리고 녹각은 조금. 맥문동과 천문동, 산약과 음양곽, 깨끗한 백수오를 준비해 주세요.”
“다 있는 것들이네. 조금만 기다리게.”
최치우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처럼 앞장서서 나섰다.
진열대에 고이 모셔 놓은 깨끗한 약초들을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원복도 한 걸음 물러나서 한지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지호는 함에 담긴 천종산삼을 유심히 바라봤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이었다.
그는 석상처럼 우뚝 선 채 과거를 떠올렸다.
아무 먼 옛날, 오나라에서 주유의 아내인 소교를 고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그때 주유가 구해준 최상품의 산삼으로 약을 지었고, 결국 소교의 구음절맥을 치료했었다.
“괜찮은가?”
최치우는 가만히 서있는 한지호가 걱정되는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한지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잠시만 이대로 있겠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천종산삼을 다루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면 1억을 고스란히 날리는 꼴이다.
‘이미 해봤던 일이야. 그때처럼 똑같이 해내면 되는 거야.’
전생의 규호가 산삼을 다뤘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당귀와 녹각, 맥문동 등의 약초를 준비시킨 것도 규호의 제조법을 따라 하기 위해서다.
파앗!
한동안 숨을 고르던 한지호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강렬한 서광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생생히 담고 특별한 제조법으로 역사를 재현하려는 것이다.
“시작하겠습니다.”
한지호의 입술 사이로 묵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최치우와 이원복도 숨을 죽였다.
조용한 명징약초 안에서 무려 110년 수령의 천종산삼을 이용한 한약 제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지호는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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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가요?”
김해수가 담담한 말투로 질문을 했다.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은 한지호가 들고 온 박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얀색 박스 안에는 한지호가 정성스레 달인 한약이 포장 돼 들어 있다.
이원복에게서 천종산삼을 산 후 곧장 명징약초에서 만든 바로 그 약이었다.
“110년 수령 천종산삼에 당귀와 녹각, 맥문동과 음양곽, 그리고 백수오 등을 넣어 만든 약입니다. 장담하건데 시중의 어떤 한의원에서도 구할 수 없는 한약일 겁니다.”
“무려 1억 짜리 산삼으로 만든 약이라서요?”
“3억 짜리 천종산삼도 시중에 풀렸던 적이 있습니다. 산삼도 산삼이지만, 똑같은 약초로 어떤 약을 만드느냐는 한의사의 손에 달린 일입니다.”
“저번부터 느꼈는데 한 선생님은 의술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넘치는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환자를 고치겠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한지호는 한약이 들어있는 박스를 내려놓고 김해수의 눈동자를 마주봤다.
이 약이 완성됐다는 건 그녀의 구음절맥 치료가 팔부능선을 넘었다는 뜻이다.
“하루 두 번, 절대 빼먹지 말고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생명이 달린 일인데 소홀히 하지 않을게요.”
“아마 약간의 부작용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부작용?”
“약을 복용하면 전신에서 발열 증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몸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도 놀랄 필요 없습니다. 강력한 양기의 결정체를 복용하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알겠어요. 어차피 스케줄도 다 취소했으니 상관없어요.”
“그럼 먼저 한 포를 드시죠. 그러고 나서 침을 놓겠습니다.”
“산삼으로 약을 지었는데도 침을 맞아야 하나요?”
“네. 김해수 씨 몸에 도사리고 있는 음기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합니다. 산삼으로 지은 약이 제 역할을 하겠지만, 침술로 보조를 하는 게 좋죠.”
“그럼 약을 먹고 침실로 가요.”
“침을 놓은 뒤 다른 치료법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