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4화 (24/255)

# 24

둘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호텔 엘리베이터는 카드 키가 있어야만 움직인다.

유건영은 카드를 인식시킨 후 9층 버튼을 눌렀다.

지이잉!

곧이어 둘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위로 움직였다.

이 안에는 한지호와 유건영밖에 없었다.

“한 선생님, 오늘 만나게 되실 분은…….”

드디어 유건영이 VIP의 정체를 밝히려는 모양이다.

한지호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김해수 씨입니다.”

“네?”

깜짝 놀란 한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띠링-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원조 글래머.

여전히 뭇 남성들을 설레게 만드는 섹시 스타.

바로 그녀, 김해수가 기다리고 있는 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지호는 놀란 얼굴 그대로 발을 내딛었다.

또 다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 같았다.

2장, 글래머(glamour) (1)

찰칵!

유건영이 카드 키로 방문을 열었다.

한지호는 모르고 있었지만 9층에는 일반 객실이 없다.

김해수가 기다리고 있는 방도 일박에 천만 원이 넘는 스위트룸이었다.

열린 방문 너머로 럭셔리한 내부가 환히 드러났다.

넓은 복도는 통유리가 인상적인 거실과 연결됐다.

전면의 통유리는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게 최고의 전망을 선사하고 있었다.

거실이 얼마나 넓은지 크리스탈 샹들리에 밑에 그랜드 피아노가 설치 돼 있었다.

샴페인과 와인, 위스키가 진열 된 홈 바(home bar)의 스케일도 남달랐다.

웬만한 아파트보다 넓은 거실 외에도 여러 개의 침실과 화려한 욕실이 숨어있다.

그러나 스위트룸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실루엣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문이 열렸음에도 돌아서지 않고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에서 풍만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쏙 들어간 허리가 사과 같은 엉덩이를 돋보이게 만들었고, 미니스커트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는 매끈한 조각 같았다.

S라인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그녀의 몸매를 보면 알 수 있다.

대문자 S를 온몸으로 표현한 실루엣은 관능적인 아우라를 뿜어냈다.

“해수 씨.”

유건영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김해수는 플래티넘 홀딩스의 VIP 고객이지만 연예인이라는 자유로운 직업이라 별도의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제야 창밖을 내려다보던 김해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치 느린 음악을 타는 듯 서두르지 않는 몸짓에서 노련함이 묻어 나왔다.

“어머, 오셨어요.”

인기척을 지금 느낀 듯 살짝 놀란 표정, 평소보다 커진 눈동자.

이 모든 게 그녀의 몸에 배인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해수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예인을 처음 본 한지호는 넋 나간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았다.

보통 연예인도 아니고 김해수다.

30대 중반을 넘겼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 여배우로 군림하고 있는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전에 말씀드린 한지호 선생님입니다. 한 선생님, 제 고객이신 김해수 씨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입니다.”

한지호는 최대한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김해수의 미모에 홀리지 않고 차분한 표정과 말투를 유지했다.

그래서일까.

김해수는 묘한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반가워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평창동의 황 회장님을 낫게 하셨다죠.”

“네.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들도 손을 든 난치병이었다고 하던데…… 나이에 비해 실력이 대단하신가 봐요?”

김해수가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넓은 골반이 요동치며 매끈한 다리가 뻗어 나오고, 동시에 풍만한 가슴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새삼 김해수를 둘러싼 수많은 스캔들을 떠올렸다.

무수한 남자 연예인들과 재벌 2세들이 김해수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소문이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앉죠. 계속 서있으면 다리 아프잖아요.”

김해수가 가볍게 웃으며 홈 바를 가리켰다.

스위트룸 거실과 연결 된 홈 바에는 긴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 돼 있었다.

천장에 달린 진열대에 거꾸로 꽂혀 있는 와인과 샴페인은 바(bar)다운 분위기를 살렸다.

김해수는 가볍게 마시지 좋은 스파클링 와인을 꺼냈다.

그녀가 손수 잔을 세팅하고,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스파클링 와인을 따랐다.

특급 호텔 스위트룸에 구비 된 스파클링 와인은 무척 비쌀 것이다.

잘은 몰라도 한 병에 수십만 원은 족히 넘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지호는 마다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그때 유건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다음 스케줄 때문에 먼저 일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분을 소개해 드리며 제 역할을 다 했으니 먼저 일어나도 되겠지요?”

“바쁘신 유 팀장님을 너무 오래 잡아두려 했네요. 그럼 다음에 여의도에서 뵈어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유건영은 김해수와 한지호에게 고개를 숙이고 스위트룸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한지호와 약속을 지켰고, 김해수에게도 특별한 한의사를 소개해준 셈이다.

굳이 오래 머무르며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특히 김해수는 남들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문제로 의사를 찾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유건영이 눈치껏 알아서 빠져준 것이다.

졸지에 김해수와 단 둘이 호텔 스위트룸에 있게 된 한지호는 체온이 오르는 걸 느꼈다.

김해수는 남자와 둘이 있는 게 불편하지 않은지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셔요.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우리.”

“그럼…….”

한지호는 잔을 들고 스파클링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탄산은 부드러우면서 산뜻했고, 입안을 감싸는 향기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술에 문외한이라도 고급스러운 맛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때요? 좋죠?”

“달콤하네요.”

“갑자기 술을 따라서 놀라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긴장을 풀기엔 와인만한 게 없으니까요.”

한지호의 대답을 들은 김해수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낮은 도수의 스파클링 와인이지만 한 잔의 양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쉽게 잔을 비운 그녀는 소문처럼 섹시하면서 털털한 것 같았다.

“유 팀장님께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주 특별한 한의사시라고. 황 회장님의 난치병을 고쳤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보고 싶었어요.”

“저는 김해수 씨께서 어디가 불편하신지 듣지 못했습니다. 사실 만나게 될 분이 김해수 씨라는 것도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러실 거예요. 유 팀장님은 입이 무거우니까, 괜한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셨겠죠.”

“어디가 불편하신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지호는 반쯤 비운 와인 잔에서 손을 떼고 김해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본론으로 향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린 남자인 한지호와 대화를 하는 게 즐거워서일까.

뜻 모를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잔에 스파클링 와인을 더 따랐다.

김해수가 긴 손가락을 뻗어 잔을 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먼저 단서 하나를 드릴게요. 우리나라 최고의 의사도 두 손을 들었고, 한의사들은 아예 손을 댈 수 없는 문제에요. 그렇다고 죽을병인 건 아니죠.”

“퀴즈… 입니까?”

“우선은 여기까지만 알려 드릴게요.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치부를 공개해야 해요.”

치부라는 단어가 걸렸다.

과연 김해수는 어떤 병을 앓고 있는 것일까.

무척 궁금했지만 재촉을 할 수는 없었다.

병을 치료하기 전에 환자의 마음을 열고 신뢰를 얻는 게 먼저다.

한지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스위트룸에는 둘밖에 없고, 주어진 시간은 많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섹시 여배우의 마음을 사로잡아 치료를 할 자신이 있었다.

“기분 나쁠 수 있겠지만, 제 치부를 공개하기 전에 한 선생님을 시험해 봐도 되겠죠?”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유 팀장님의 추천을 받았고, 평창동 황 회장님을 치료한 전력이 있으니 크게 기대를 하고 있어요. 그런 기대 없이 이렇게 단 둘이 호텔방에 마주 앉아 있겠어요?”

“그럼 왜 시험을 원하시는 겁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앓고 있는 문제는 가족에게도 공개하기 어려운 치부이니까요. 그래서 확실한 믿음을 얻고 싶은 거예요. 이해하기 힘든가요?”

김해수는 한지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붉은 입술 사이로 고혹적인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설령 이해하기 힘들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한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김해수의 미모에 홀려서가 아니다.

그는 전생에서 수 천, 수 만 명의 환자들을 상대했었다.

불안에 떨거나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는 환자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김해수의 요구 사항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시험을 통해 확신을 주고, 그 다음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면 된다.

한지호는 주어진 상황을 간단하게 받아들였다.

복잡하게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다.

눈앞에 앉아있는 김해수는 험한 연예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불여우다.

그녀의 심정을 꿰뚫어 보려고 하면 괜한 기 싸움에 에너지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시험을 볼까요.”

한지호는 쓸데없는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고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런 모습에 김해수가 이채를 띄었다.

“유 팀장님 말처럼, 한 선생님은 꽤 특이한 분이네요. 연예계에서도 보기 힘든 캐릭터라니.”

“그런가요?”

“29살이라고 들었는데……. 온갖 인간들이 다 모인 연예계에도 20대에 한 선생님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못 본 것 같아서요.”

김해수의 눈은 예리했다.

그는 한지호가 품고 있는 자신감과 여유를 알아봤다.

한지호는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TV 속 여배우가 눈앞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 건 든든한 자신감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죠. 어떻게 해야 김해수 씨가 나를 믿고 남들에게 알리기 힘든 치부를 보여줄 건지.”

“간단해요. 한의학으로 외과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해줘요.”

“네?”

“보통 한의학은 몸 안에 병이 난 걸 치료하잖아요. 평창동 황 회장님도 그런 경우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내 문제는 달라요. 그러니까 한 선생님의 의술이 외과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한지호는 금방 감을 잡았다.

현대에서 한의학은 외과적 치료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최첨단 의료 기기와 수술법을 앞세운 서양 의학이 외과 치료를 지배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분명 서양 의학의 우수함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의학도 충분히 외과 치료를 해낼 수 있다.

화타의 제자인 규호는 관우의 팔에 박힌 독화살을 빼내고, 뼛조각을 긁어내는 대수술을 성공시켰었다.

세계 최초의 마취약을 개발한 사람도 다름 아닌 화타다.

현재의 한의사들에겐 외과 치료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지호는 다르다.

“간단하게 증명해드리죠.”

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품에서 침 케이스를 꺼냈다.

클러치 백 크기의 가죽 케이스 안에는 다양한 길이의 침이 보관 돼 있다.

김해수는 흥미롭다는 듯 한지호를 지켜봤다.

침을 꺼내 무엇을 하려는지 기대 되는 것 같았다.

그는 과연 어떤 식으로 외과 치료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할까.

테이블 위에 침 케이스를 올려놓은 한지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놀라지 마세요.”

부드러운 음성으로 김해수를 안심시킨 그는 왼팔을 높이 들었다.

이어서 말릴 틈도 없이 대리석 테이블에 왼팔을 내리찍었다.

빠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리석 테이블이 흔들거렸다.

강하게 팔을 내리친 한지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통을 삼켰다.

그의 왼쪽 손목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보기 흉측해졌다.

퉁퉁 부은 손목을 보면 당장 119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왜 이러세요?”

천하의 김해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인상을 찡그린 채 오른손으로 침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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