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무작정 나가라는 건설회사 용역들, 그 앞에서 아무런 힘없이 행패를 지켜봐야만 했던 천사원 아이들.
처억.
한지호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후우- 오지랖은 병이라고 했는데.”
한숨을 내쉰 그가 스마트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배가 고파 당장 돼지국밥을 흡입하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가던 길을 돌려 쇳소리와 웅성거림이 들린 방향을 찾았다.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 한지호는 불광동 주택가의 단면을 목도하게 됐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수십 명이 열 명 남짓한 주민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항의를 했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사태를 파악하러 나온 경찰관과 젊은 의경들도 있지만 딱히 개입할 의지는 없어 보였다.
한지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양 측의 대화를 들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면 뭘 어떡하라는 거요? 길바닥에 나앉으라는 말이요?”
주민들 대표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무척 분노한 듯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수십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이끌고 온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아저씨, 우리가 그냥 이럽니까? 충분히 시간을 주고, 여러 번 고지를 했는데 계속 불법 점거를 하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불법 점거라니!”
“계약이 만료 됐는데 무단으로 살고 있으면 불법 점거지!”
“대체 누구를 위한 재건축이요! 살던 곳에서 쫓아내려면 충분한 여유를 줘야지 이런 식으로…….”
“됐고, 긴말 안 합니다. 말로 해서는 안 나갈 사람들이니 나갈 마음이 들게 해줄 테니까 그리 아쇼.”
공격적으로 말을 마친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어깨가 떡 벌어진 수십 명이 금방이라도 주민들을 뚫고 주택가 안으로 난입할 것 같았다.
한지호는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재건축 지역 철거를 놓고 건설회사와 주민들의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천사원 문제와 비슷했다.
수십 명의 덩치들은 건설회사에서 고용한 용역들이다.
그들 앞에서 주택가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주민들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재건축과 재개발이 한창인 서울, 경기도 외곽에선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입주민에게 주어지는 보상금은 턱없이 적고, 살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내쫓기듯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다.
무조건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폭이나 다름없는 용역을 고용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남일 같지 않은 상황에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몰입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수십 명의 용역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들어가!”
“부수고 나와-!”
거친 괴성과 함께 용역들이 세를 과시했다.
그들은 막아서는 주민을 어깨로 밀치고 주택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우리 애들 책상은 제발 그대로…….”
남녀가 뒤섞인 열 명 남짓한 주민들은 수십 명의 용역을 막아낼 수 없었다.
울분에 찬 남자들이 용역 몇 명의 옷을 잡고 늘어져도 대세에 영향을 끼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른 용역들은 주택 단지에 난입해 가구와 옷가지, 집기들을 헤집으며 난장판을 벌였다.
쿠당탕!
콰콰콰쾅-
“적당히 부수고 어질러 놔!”
“하여간 이런 철거민 새끼들은 꼭 지랄을 해야 나간다니까!”
용역들의 이죽거림이 주민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물론 집을 다 때려 부수진 않을 것이다.
적당히 어지르고 난장판을 만들어 피를 말리는 전략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지간한 주민은 백기를 들고 나가게 된다.
한지호는 언제쯤 나서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금희를 익혔기에 용역들이 두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보는 눈이 많은데 무공을 펼쳐 용역들을 막으려니 고민이 깊어졌다.
민중의 지팡이라 불리면서도 수수방관 사태를 두고 보는 경찰과 의경들이 원망스러웠다.
그 순간, 중년 여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영운아-!”
절절한 외침에 한지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학교를 마쳤는지 책가방을 맨 초등학생이 용역들이 득시글거리는 주택 단지 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다른 용역들과 뒤엉켜 있었고, 그 사이 집에 온 꼬마가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는 낯선 아저씨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난장판을 치고 있던 용역들도 작은 아이를 신경 쓰지 못했다.
용역들은 집기를 부수느라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고, 멋모르고 들어온 아이가 그 틈에 치여 크게 다칠 것 같았다.
“영운아아-!”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한지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리려 했다.
무공이 드러나도 아이를 구하는 게 먼저다.
그는 오금희의 기운을 일으키며 땅을 박찼다.
“비켜! 비키라고!”
땅을 박찬 한지호는 청년의 맑은 외침에 급히 동작을 멈췄다.
의경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주택 단지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던 경찰들은 의경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지호보다 한 발 앞서 몸을 날린 의경은 저돌적이었다.
그는 앞을 막아서는 용역들을 밀치며 날래게 움직였다.
퍼억! 퍼어억!
덩치 큰 사내들을 밀쳐낸 의경이 아이에게 다다랐다.
용역들에게 휩쓸리기 직전에 초등학생을 구한 것이다.
의경은 어디서 힘이 솟아나는지 작은 아이를 한 팔로 들어 올렸다.
파바박-
나머지 한 쪽 팔로 몇 명의 용역을 밀쳐낸 의경이 주택 단지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런 의경의 행동, 그리고 작은 아이의 등장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주민들을 둘러싸고 있던 용역들도 당황한 것 같았다.
“아이는 무사해요.”
“영운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의경의 팔에 안긴 아이를 확인한 엄마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주민들을 막아선 용역들은 슬그머니 길을 터줬다.
놀란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로인해 용역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게 불만스러운 것일까.
우두머리인 사내가 건들거리며 걸어와 의경을 노려봤다.
“넌 뭐하는 놈이고?”
“보다시피 의경입니다. 아이를 구한 것뿐이고요.”
“법대로 절차를 진행하는데 왜 의경 나부랭이가 끼어 드냐고? 우리가 불법인 것도 아니고!”
그가 억지를 쓰며 의경의 어깨를 밀쳤다.
지켜보던 경찰들은 의경이 험악한 꼴을 당해도 나서지 않았다.
적법한 철거 절차를 지켜만 보라고 상부에서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용역들 뒤에는 건설회사가 있고, 건설회사는 경찰청 간부들에게 돈 봉투를 뿌려 놓았다.
일선 경찰들이 방관을 했던 것, 용기 있는 의경을 곤혹스러워하며 지켜만 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투욱!
“말 좀 해보라고, 의경 씨. 방금 전에는 아주 날라 다니더만?”
용역 우두머리의 도발이 과해졌다.
젊은 의경의 어깨를 툭 툭 치며 싸대기라도 올려붙일 기세였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의경은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중이기에 감정을 억누르고 꾹 참는 것이다.
“말을 해보라고, 이 씹새끼야!”
“아이가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구한 것뿐입니다.”
“애새끼가 위험하건 말건 그건 니 알바 아니지!”
쩌억!
기어코 우두머리가 의경의 뺨을 후려쳤다.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의경 덕에 아이를 구한 여성과 주민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경찰들은 여전히 곤란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주택가 뒷골목이라 다니는 행인도 거의 없다.
스으윽-
그때 누군가 뺨을 맞은 의경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씩씩거리는 용역 우두머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만하고 가시죠.”
겁 없이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한지호였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11장, 데자뷰(dajavu) (2)
“넌 또 뭐하는 새끼야?”
우두머리의 입에서 곧바로 험한 말이 튀어 나왔다.
그의 덩치와 인상, 뒤에 우르르 서있는 부하들을 생각하면 간이 큰 사람도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가라고 할 때 가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가면, 안 가면 뭐!”
“보는 눈이 많은데 망신을 자초하시나.”
“뭐라고? 이 새끼가!”
용역 우두머리가 참지 못하고 팔을 높이 들었다.
의경을 때린 것처럼 한지호의 뺨을 갈기려는 것이다.
그러나 한지호가 가만히 서서 맞을 리 없었다.
콰악!
사내의 팔을 잡은 한지호가 마지막 경고를 했다.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쯤 했으면 그만 가세요.”
“이, 이익!”
우두머리는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지호의 팔 힘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럴 때 양아치들은 쌍욕부터 쓰는 법이다.
“이 빌어먹을 개씨… 커헉!”
그의 욕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경고를 마친 한지호가 나머지 한 손으로 우두머리의 혈도를 눌렀기 때문이다.
명치 아래쪽에 있는 혈도를 누른 건 시작에 불과했다.
한지호는 쏜살 같은 속도로 용역 우두머리의 혈도 세 곳을 찔렀다.
푹! 푸욱!
주먹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혈도를 누른 게 전부였다.
그러나 점혈법에 당한 용역 우두머리는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온몸에서 오한과 통증이 올라오며 힘이 쭉 빠졌기 때문이다.
“으읍……. 대,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좋은 말로 할 때!”
한지호는 말을 하며 혈도를 한 번씩 더 눌렀다.
푸욱!
손가락 하나를 움직였을 뿐이지만 상대는 온몸의 뼈마디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다.
“알아서 들으라고!”
푸욱!
“흐어어업. 제, 제발 그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한지호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용역 우두머리를 밀쳤을 뿐이다.
그런데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키 190cm에 몸무게가 100kg은 넘을 것 같은 거한이 벌벌 떨며 괴로워한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직 점혈법에 당하고 있는 용역 우두머리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인간은 현실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면 두려움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다.
지금 한지호가 용역 우두머리에게 그런 존재였다.
순식간에 지옥의 고통을 알려준 한지호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그의 눈앞에 가져갔다.
“계속 해볼까?”
“아, 아니… 그만, 그만 합시다.”
우두머리의 말투가 달라졌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존댓말을 쓴 것이다.
한지호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온몸이 아프고 힘이 없는 증상은 사흘 쯤 지나야 풀릴 겁니다.”
“이 고통을 사흘이나…….”
“당장 애들 데리고 꺼지지 않으면 한 달 내내 느끼게 해줄 수도 있는데.”
서늘하기 짝이 없는 한지호의 말에 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철수한다, 철수! 오늘은 충분히 했다!”
용역 우두머리는 황당해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쳤다.
그는 사라지는 순간에도 오한과 통증으로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앞으로 사흘은 꼼짝 못하고 골골거려야 통증이 완화될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가뿐하게 용역 우두머리를 제압하고 난동을 끝낸 한지호가 뒤돌아섰다.
그의 등 뒤에는 뺨이 벌겋게 부은 의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있었다.
의경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고 상황을 종결한 한지호를 동경의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확인한 한지호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아주 오래 된 기억 속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조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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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 조자룡.
자룡(子龍)이라는 자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무위를 자랑했고, 사납기로 유명한 위나라 군사들도 조운의 이름을 들으면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촉한의 기라성 같은 오호대장군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제갈공명의 옆을 지켰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촉의 운명도 저물어갔다.
특히 조자룡을 대표하는 일화는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구한 것이다.
그가 어린 아두를 품에 안고 위나라 대군을 돌파한 것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손꼽히는 장면이다.
멀리서 조자룡의 활약을 지켜본 조조마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압도적으로 뛰어난 장수가 조자룡이고, 누구든 그를 만난 사람은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규호 역시 천하를 주유하며 굵직한 전장에서 조자룡을 만난 적이 있었다.
때문에 한지호는 삼국지의 영웅인 조자룡의 진짜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용역들 틈에서 아이를 구해낸 의경이 조자룡의 젊은 시절과 똑같이 생겼다는 점이다.
게다가 위나라 대군 사이에서 아두를 구한 일화도 자연스레 오버랩 됐다.
한지호는 상황을 마무리 지으며 의경의 이름을 알아냈다.
뒷짐을 지고 있던 경찰들은 용역들이 사라진 후에야 미적미적 걸어와 의경들을 데려 갔다.
뚱뚱한 경찰관은 주민들의 호소를 듣지 않았고, 난데없이 사건에 개입한 한지호를 의문스럽게 쳐다보다 떠나갔을 뿐이다.
모두 떠난 자리, 난장판이 된 주택 단지 안에서 주민들의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그나마 젊은 의경 덕에 아이가 다치지 않았고, 한지호가 개입하면서 용역들이 빨리 사라져 다행이었다.
한지호는 고마움을 표하는 주민들의 인사를 받고 걸음을 옮겼다.
등산 때문에 출출했던 것도 싹 잊어 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자룡을 쏙 빼닮은 의경의 이름만 맴돌고 있었다.
“조기운이라고 했지.”
의경의 이름 석 자가 단단히 각인됐다.
조기운이 덩치 큰 용역들을 밀치고 꼬마 아이를 구해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지호는 거대하게 흐르는 인연의 강줄기를 느꼈다.
자신은 십삼혈대법이라는 천고의 의술을 통해 전생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힐 일이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장소에서 조자룡과 비슷한 인물을 만났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 북한산을 올랐는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숙제를 떠안게 됐다.
조만간 불광동을 관할하는 경찰서를 찾아가 조기운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는 한지호의 얼굴에 복잡한 생각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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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사주, 철학, 운명.
한지호는 다소 난해한 단어로 검색을 해서 여러 권의 책을 구입했다.
불광동에서 조기운을 만난 뒤 전생과 윤회에 대해 부쩍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VIP 고객을 연결시켜 주기로 약속한 유건영은 아직 연락이 없었다.
대신 청우단을 추가로 구매하겠다는 몇 몇 고객들의 문의를 받았다.
처음 청우단을 구입한 고객 중에서 벌써 50알을 다 먹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명징약초에서 청우단의 재료가 되는 약초를 사온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오금희를 수련하며 나머지 시간은 마음껏 독서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걸쳐 방대한 양의 관련 도서를 탐독한 한지호는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그는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전생이라는 것, 윤회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한지호처럼 특수한 대법의 영향으로 전생을 자각하게 된 경우는 금시초문이었다.
적어도 공식적인 역사에서 전생을 깨달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윤회를 의심할 근거는 많았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떨어진 시대를 살았으나 너무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 역사적 인물들이 꽤 있다.
한지호는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윤회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윤회는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생에 관우였던 사람이 현생에 한 명만 존재한다는 법은 없다.
관우라는 전생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동시대에 여러 명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지호가 규호라는 전생을 깨달은 것으로 보아 지금은 삼국시대의 영웅들이 윤회하여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대부분 전생을 자각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아간다.
십삼대혈법이 아니었다면 한지호도 마찬가지로 전생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전생을 깨닫고, 과거의 능력과 기억을 얻은 것은 생각 이상으로 더 대단한 일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사람의 전생까지 파악할 수 있고, 그의 인생을 예측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용감한 의경 조기운은 분명 조자룡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본인도 모르는 전생이지만 한지호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기운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이런 추측은 한지호가 조기운의 전생을 알아봤기에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의 전생이 삼국시대 영웅이라면, 한지호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의 성향과 잠재 가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훗날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아직은 미처 계산하기 힘들었다.
“만나자. 만나서 내 사람으로 만들자.”
한지호가 결심을 굳혔다.
의경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기운과 인연을 맺고 싶었다.
불광동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 건 하늘이 준 기회 같았다.
이만하면 여러 권의 책을 구입해 일주일 내내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전생의 규호는 어떤 세력도 만들지 않고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의성이라는 호칭을 얻고 존경을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천하를 바꾸지 못했고, 끝내 깊은 후회를 담아 십삼대혈법을 펼쳐 후대에게 기억을 전해준 것이다.
한지호는 그와 달리 세력을 만들고, 천하를 호령하며 바꾸는 사람이 되겠다고 작정했다.
오직 한지호만 아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상산 조자룡의 현생을 곁에 둘 수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이다.
제갈공명은 조운이 병들어 죽자 촉한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탄식했다.
한지호는 그만한 전생의 잠재력을 가진 원석을 발견한 셈이다.
그는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어떻게 오셨습니까?”
은평 경찰서 정문을 지키는 의경이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여기 근무하는 의경 중에 조기운 씨가 있죠?”
“조기운 수경님 찾아오셨습니까?”
“네. 잠시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근무 시간이라 외부 면회가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의경 관리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경비계장님 찾아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한지호는 딱딱하지만 정확하게 대답을 해준 의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어려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진짜 남자다.
존중을 하는 게 당연했다.
경찰서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는 경비계를 찾았다.
의경 관리를 담당하는 경비계장을 만나 면회를 신청하려는 것이다.
조기운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대충 둘러댈 작정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경찰서 경비계로 걸어가는 찰나,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한지호는 무심한 얼굴로 스마트 폰을 꺼냈다.
중요한 전화가 아니면 받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이었기 때문이다.
“네, 유 팀장님.”
“잘 지내셨지요, 한 선생님.”
“그럼요.”
“다음 주말에 미팅을 잡았으면 합니다. 제 고객 중 한 분께서 한 선생님을 만나시겠답니다.”
유건영이 VIP를 연결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한지호는 경찰서 복도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쁨을 삼켰다.
조자룡을 빼닮은 조기운을 만나러 가는 길,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먼저 찾아온 것이다.
예감이 좋았다.
한지호는 전생의 규호와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 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