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2화 (22/255)

# 22

1장, 자룡을 얻다 (1)

한지호는 은평 경찰서 경비계장으로부터 면회 허가를 받았다.

복도에서 유건영의 전화를 받고 VIP와의 미팅 날짜를 잡은 그는 날아갈 것 같은 마음으로 경비계장을 만났다.

면회 허가를 받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의사 면허증을 보여주면 적어도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는 안 받는다.

외부 근무를 하던 조기운에게 도움을 받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는 말에 경비계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저벅.

한지호는 경찰서 1층 로비로 걸어 나왔다.

경비계장이 조기운에게 직접 연락을 할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로비에서 그를 만나 가까운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 같았다.

조기운은 뜬금없이 면회와 외출이 가능해져 기쁜 마음으로 나올 것이다.

한의사가 만나러 왔다는 말에 의문을 품겠지만, 군 복무 중에 면회를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끝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의 면회 요청을 받은 조기운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타났다.

한지호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불광동 대치 현장에서 어린 아이를 구해낸 용감한 얼굴, 그리고 조조의 대군을 뚫고 아두를 구해온 조자룡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수천 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고, 며칠 전의 사건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어?”

조기운도 한지호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그 역시 한지호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나 손가락 하나로 용역 우두머리를 제압했던 사람이 한지호이기 때문이다.

“반가워요. 나 기억하죠?”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의 물음에 조기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20대 초반의 청년다웠다.

한지호는 천천히 조기운의 외양을 살펴봤다.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한 큰 키, 알맞게 벌어진 어깨, 적당한 근육까지 전체적으로 무척 단단해 보였다.

쉽게 말해 날렵하면서 힘을 쓰기 좋은 체격이었다.

얼굴은 과거 조조의 군대마저 벌벌 떨게 만들었던 조자룡의 젊은 시절을 빼닮았다.

맑은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은 순진하면서도 무척 야무진 인상을 줬다.

한지호는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조기운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조자룡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군주들이 알았다면 기함을 하며 부러워 할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당시의 기억을 갖고 전생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지호가 유일하다.

“여기선 좀 그렇고, 가까운 카페에서 뭐라도 마시며 이야기 할까요?”

“네? 네! 알겠습니다.”

조기운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한지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준 은인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지호는 조기운과 나란히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은평 경찰서 옆 작은 카페에 들어간 둘은 각자 음료를 시켰다.

당연히 계산은 한지호가 했다.

곧이어 카페 종업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생과일 오렌지 주스를 가져 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다음엔 밥을 살게요.”

“네? 아…….”

조기운은 약간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한지호가 자신을 찾아온 것, 그리고 다음에 밥을 사겠다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불광동 현장에서 도움을 받았기에 무작정 따라 나온 것이다.

한지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기운 수경, 맞나요?”

“네, 맞습니다.”

“난 한지호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소개하는 게 늦었네요.”

“경비계장님께서 한의사님이 찾아오셨다고…….”

“맞아요. 한의사입니다.”

조기운은 새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그의 기준에서 한의사는 뭔가 똑똑하고 높은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묘하게 순수한 조기운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웃음을 참은 그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불쑥 찾아와서 놀랐죠?”

“네, 사실은 조금 놀랐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 날, 불광동에서 아이를 구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어요.”

“아… 그건 그냥 무의식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이가 위험할 거 같아서 본능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본능을 발휘하는 건 특별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닙니다. 과찬이세요.”

“혹시 같이 나와 있던 경찰관들에게 혼이 나진 않았습니까?”

한지호의 물음에 조기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입술을 뗐다.

“쓸데없이 끼어들었다고 욕을 좀 먹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를 구해서 칭찬 받을 줄 알았는데. 제 욕심이겠죠? 하하.”

멋쩍은 듯 웃음을 흘린 조기운의 얼굴에 씁쓸함이 엿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용역들을 방관한 경찰들이 옳은 일을 한 조기운을 책망한 것이다.

한지호는 조심스레 그를 위로했다.

“아이 어머니가 진심으로 고마워했던 거 기억하고 있죠? 누가 뭐래도 용기 있게 대단한 일을 한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위안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조기운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경계심을 풀고 낯선 방문객인 한지호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수경이니까 곧 전역을 하겠군요.”

“이제 한 달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한 달이면 진짜 금방이네. 그래도 마지막이 시간이 제일 늦게 가니까 힘들겠어요.”

“열심히 버텨야죠.”

전역을 언급하자 조기운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제대와 전역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온갖 우울함을 한 방에 날리는 파워가 그 단어 안에 함축 돼 있다.

한지호는 편안하게 이야기를 리드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전역하고 복학하는 건가요? 대학생 같은데.”

“저, 그게…….”

“말하기 곤란한 일이면 대답 안 해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사실 지금 24살인데 대학을 못 갔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요.”

조기운은 구김살 없이 맑은 인상이라 어렵지 않게 자랐을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웬만하면 다 가는 대학을 못 갈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했다.

순간 한지호는 나름 큰 결단을 내렸다.

자기의 약점을 공개하면서 조기운과 깊이 소통하길 선택한 것이다.

“사실 나도 가정 형편이 어려웠어요. 부모님이 안 계셨고, 보육원에서 자랐으니까.”

“네? 정말요?”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한의대에 갔죠. 그렇지만 집안이 어려워 대학에 못간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자연스레 우리라는 말을 쓴 한지호가 진심어린 눈빛으로 조기운을 쳐다봤다.

둘은 불광동에서 만나 서로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알던 사이처럼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지호가 먼저 벽을 허물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조기운도 이것저것 재지 않고 화답을 했다.

그는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한지호가 싫지 않았다.

살면서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형이 생긴 느낌이었다.

“전 어머니는 어릴 때 집에서 도망가서 연락이 끊겼고, 아버지는 술만 드시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돌아가셨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체육 특기생이었는데… 대학이고 뭐고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노가다로 먹고 살다가 의경으로 오게 됐습니다. 남들은 다 한심하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저 기회가 오지 않았던 것뿐이니 자책할 필요도 없어요.”

한지호는 조기운의 지난 삶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을 가고 안 가고의 차이가 있을 뿐, 불우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한 건 비슷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체육 특기생이었다면 운동에 재능이 있고, 무척 성실했다는 뜻이다.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빡센 체육 특기생 생활을 버티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한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한의사님이 처음입니다. 아무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조기운은 당장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한지호에게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때로는 별 것 아닌 말과 태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특히 평생 밑바닥에서 무시 받으며 살아온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한의사님이라니, 그냥 형이라고 불러요. 편하게.”

“그래도 어떻게…….”

“나도 편하게 대할 테니까. 그게 낫겠지?”

“그럼 지호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조기운이 자신을 형님이라 말하니 괜히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조자룡의 영향 때문은 아니다.

한지호는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온 조기운이라는 파릇파릇한 청춘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지호 형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 뭐든지.”

“그때 제 앞에서 용역 깡패를 막고 물러나게 하셨잖아요.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몸을 쿡 쿡 찌르니 덩치 큰 깡패가 꼼짝을 못 하던데……. 그건 어떻게 하신 거예요?”

한지호는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바로 등 뒤에 서있던 조기운은 누구보다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한의사들이 침을 놓잖아? 그걸 응용한 거지. 손가락으로 침을 놓았다고나 할까. 쉽게 말하면 급소를 찌른 거고.”

“우와…….”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조기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체육 특기생 출신이라 몸을 쓰는 일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손가락 하나로 커다란 덩치를 농락하던 한지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여전히 100% 이해는 안 되어도 한지호가 마냥 대단하게 보였다.

한지호는 어린 아이처럼 신기해하는 조기운을 보며 다소 무거운 말을 꺼냈다.

전역 이후의 진로에 대해 물어본 것이다.

“민간인이 되고 나면 예전처럼 노가다 하면서 지낼 계획이야?”

“일단은… 그거 말곤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요.”

“그러지 말고 전역하면 나한테 찾아와. 나랑 같이 일하자.”

“네? 형님이랑 같이 일을요?”

“적어도 20대를 공사판에서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알겠습니다. 전역 하자마자 연락드릴게요, 지호 형님!”

조기운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딱히 갈 곳이 없는 처지다.

정확히는 몰라도 한의사인 한지호와 함께 일하는 게 무작정 노가다를 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한지호는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고 카페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경비계장에게 허락 받은 면회 시간이 다 됐기 때문이다.

둘은 은평 경찰서 입구에서 다음을 기약했다.

“전역하기 전에 한 번 더 올게. 커피 말고 밥 먹자, 다음에는.”

“네, 형님!”

“말년이니까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하고.”

“그날도, 그리고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조기운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지호는 진심을 내보이며 조기운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전역을 하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건 과감한 도박이었다.

현실적으로 조기운은 건강한 몸과 바른 성격을 제외하면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한지호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조기운이 지닌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무려 전생이 조자룡인 청년이다.

포텐이 터지게 도와주면 무슨 일을 하건 한지호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은평 경찰서를 등지고 돌아오는 길, 한지호는 밥을 먹지 않았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유비가 처음 조자룡을 발견했을 때의 애타는 심정, 그리고 결국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을 때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전역을 하고 조기운이 찾아오면 어떤 일을 맡길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떤 일을 맡겨도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게 해낼 것 같았다.

꽈악.

한지호는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주먹을 세게 쥐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하루였다.

운명은 그에게 전생을 깨닫게 했고, 또 다른 전생의 인연을 알아보게 만들었다.

천하를 좌우하는 사람이 되라는 규호의 절규가 한지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았다.

조기운과 인연을 맺은 한기호는 천하제일의 인복(人福)을 자랑하던 유비도 부럽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