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3화 (3/255)

# 3

“합의를 안 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지호가 초조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바싹 말라붙은 그의 입술이 지금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질문을 받은 형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검찰에서 알아서 하는 거라 우리가 뭐라고 말하기는 애매합니다.”

“그래도 형사님은 이런 경우를 잘 아시잖아요.”

“벌금형이 나올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폭행 초범들은 대부분 벌금형으로 끝납니다. 피해자의 상태에 따라 벌금 액수가 달라지긴 하는데…… 보니까 너무 심하게 손을 써가지고.”

형사가 한지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출소를 거쳐 경찰서 형사계로 온 한지호는 폭행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형사의 말대로 세 명의 덩치들 중 두 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진 남자는 턱이 돌아가 전치 6주가 나왔고, 어깨를 꽉 잡혔던 사내는 인대가 늘어나며 전치 4주 진단을 받았다.

조사를 한 형사들, 피해자가 된 덩치들, 그리고 직접 손을 쓴 한지호까지 모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아온 한지호가 건설회사의 전문 용역들에게 전치 6주와 4주짜리 부상을 입힌 것이다.

그러나 믿기 힘들어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한지호도 구타를 당했지만 진단서로 입증이 될 정도가 아니어서 소용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몸에 멍이 들지 않아 쌍방 폭행을 입증하는 게 불가능했다.

천사원 사람들이 증언을 해도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지호는 만만치 않은 액수의 벌금형이 예상된다는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형사가 더욱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다.

“벌금형이 선고 되면 2년 동안 기록으로 남을 겁니다. 그렇게 알고 있으세요.”

“네? 기록이 남아요?”

“국가에서 벌을 주는 건데 당연히 기록이 남지요. 벌금을 납부하고 2년이 지나면 삭제 요청이 가능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한지호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폭행 가해자가 된 것도 억울한데 기록이 남는다니,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졌다.

그가 일하기로 한 요양병원은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범죄경력조회까지 통과해야 한다.

원래는 형식적인 절차지만 폭행 기록이 남게 됐으니 문제가 심각해졌다.

어쩌면 이번 사건 때문에 요양병원에서 일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지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인생 계획이 무지막지하게 틀어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형사님! 저 사람들이 천사원에서 힘없는 아이들과 수녀님을 협박하고 괴롭힌 건 문제가 안 됩니까? 그중에 한 명은 여고생 아이에게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만 가해자가 된다구요?”

“사정은 알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무슨 법이 이 따위란 말입니까!”

울분이 차오른 한지호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경찰서 안 분위기는 더욱 싸늘해졌다.

형사들은 소리를 높인 한지호를 노려보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천사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지호가 얼마나 억울한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한지호는 새삼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알게 됐다.

진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법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일단 조사는 끝났으니 귀가하셔도 됩니다. 추후 검찰청에서 처분이 통지될 겁니다.”

“처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요?”

“기한 내에 직접, 혹은 변호사를 통해서 이의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한지호는 형사들과 더 이야기를 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고 판단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경찰서 밖으로 나온 그는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이 자신의 앞날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천사원으로 돌아가 많이 놀랐을 마리아 수녀와 아이들을 다독여야 했다.

빵을 사서 부천으로 올 때는 걸음이 무척 가벼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발에 납덩이라도 달린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경찰서를 등지고 천사원으로 걸어가는 한지호는 세상의 모든 짐을 진 기분이었다.

+++

시간은 절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한지호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천사원에서 난동을 피운 덩치들과 싸우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시곗바늘은 똑같은 속도로 움직일 뿐이었다.

한지호에게 얻어맞은 덩치들은 합의금으로 삼천만 원을 요구했다.

삼천만 원을 주지 않으면 합의를 못한다고 억지를 썼다.

이제 막 사회로 나온 한지호에게 삼천만 원이 있을 리 없었다.

공중보건의 월급은 150만 원 정도다.

대부분을 생활비로 썼고, 남는 건 조금씩 학자금 대출을 갚는데 사용해서 저축을 할 수 없었다.

의대나 한의대 학생들에겐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주지만 그것도 신용이 멀쩡할 때의 이야기다.

고아원 출신의 한지호는 스무살 때부터 재정난에 시달리느라 신용등급이 나빴다.

그렇기에 아무리 한의사라고 해도 대출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덩치들은 애초에 합의 의사가 없었고, 한지호는 끝내 검찰로부터 벌금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그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 요양병원에서 채용을 위한 최종 절차에 돌입했다.

한지호가 제출한 건강검진 기록을 확인하고, 범죄경력조회도 마친 것이다.

결과는 예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 그대로였다.

요양병원에서는 폭행 기록을 근거로 채용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병원이기에 문제의 소지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한지호는 모든 것을 잃고 정글 같은 사회에 맨몸으로 남겨졌다.

약속된 직장을 잃었고, 고향집인 천사원도 잃고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생겼다.

남은 것이라고는 학자금 대출과 폭행 전과, 그리고 기한 내에 납부해야 하는 벌금이 전부였다.

국가고시에 합격한 한의사 중에서 한지호처럼 인생이 꼬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족도, 빽도, 돈도 없이 맨몸으로 씩씩하게 살아왔지만 한계가 느껴졌다.

이런 일에 휘말렸을 때 도와줄 사람 하나 없었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고아라고 무시를 받으면서 공부에만 집중했고, 한의대에서도 과외 알바로 학비를 버느라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했었다.

교수들도 은근히 부잣집 자식들을 챙겼고, 한지호는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연남동 원룸의 침대에 누운 한지호는 몇 시간이 넘도록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다음 달 월세를 내지 못하면 원룸에서도 쫓겨난다.

한지호는 해결책을 고민하면서도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다.

덩치들을 때려눕힌 이후 가끔씩 꾸던 삼국지 꿈을 매일 꾸게 됐다.

또 머릿속에서 하얀 도포를 입고 호통을 쳤던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삼국지 꿈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하얀 도포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그가 아는 사람과 똑같았다.

바로 자기 자신, 한지호의 얼굴이었다.

최악의 현실 속에서 한지호는 꿈에 집중하고 있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망상에 빠진 건지도 모른다.

벼랑 끝에 내몰린 그가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지,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았다.

2장, 꿈과 현실 (1)

“네. 알겠습니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혹시라도 나쁜 생각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천천히 자리 잡아서 얼굴 보자꾸나.”

“금방 연락드릴게요, 수녀님.”

“그래. 잘 지내거라.”

한지호는 전화를 끊고 스마트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연남동 골목을 정처 없이 서성거리던 그는 가까운 중국집에 들어갔다.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한지호가 종업원이 오기도 전에 주문을 했다.

“탕수육 하나랑 고량주 한 병 주세요.”

“네에. 감사합니다, 손님!”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경쾌한 톤으로 대답했다.

한지호는 방금 전 마리아 수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천사원은 결국 해체 됐다.

중학생 민기와 초등학생 민우 형제는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갔다.

사춘기에 접어든 지훈이는 광주에 있는 고모네로 갔다고 한다.

이제껏 아이를 천사원에 방치한 고모네에서 과연 지훈이를 제대로 돌볼지 걱정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유초아는 나이가 많아서 받아주는 보육원이 없었다.

다행히 마리아 수녀와 함께 작은 성당에서 머물게 되어 그나마 안심이 됐다.

문제는 한지호 자신이었다.

뿔뿔이 흩어진 천사원 식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아직까지 보호를 받는 존재다.

그러나 한지호는 혼자 힘으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를 보호하거나 위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통장에 남은 약간의 돈으로 겨우 다음 달 월세를 내면 생활비도 모자랄 것이다.

우선 일자리를 찾는 게 가장 급하다.

공공기관에서는 일을 못해도 일반 병원은 범죄경력조회를 하지 않는다.

요양병원에 채용이 된 걸 믿고 아무 준비도 안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탕수육과 고량주 나왔습니다!”

테이블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탕수육과 독한 고량주가 놓였다.

한지호는 독한 술로 지난 일을 털어버리고, 내일부터 일할 병원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폭행 사건에 휘말려 천사원이 해체 되고 채용이 취소된 탓에 멘탈이 붕괴됐었다.

거기에 자꾸 반복되는 꿈을 생각하느라 머리까지 복잡했었다.

쪼르르-

고량주를 따른 한지호가 단숨에 술을 마셨다.

독한 고량주가 목으로 넘어가며 내장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왜 많은 사람들이 술에 의지하는지 이해가 됐다.

고량주가 아무리 독해봤자 냉정한 현실보다 독할 수는 없다.

술이라도 마셔야 현실에서 쌓인 독이 조금 씻겨나갈 것이다.

한지호는 마음껏 취하고 바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각오를 굳혔다.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바닥인 인생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라며 한의대까지 졸업했다.

막 날개를 피려는 찰나 인생이 꼬였지만, 다시 이겨내면 그만이다.

“여기 고량주 한 병 더 주세요.”

탕수육을 반쯤 비운 한지호가 술을 시켰다.

중국집 종업원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량주는 무척 독한 술이다.

혼자서 한 병을 비운 것도 놀라운데 더 마시겠다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술이 엄청 독한데…….”

“괜찮습니다. 걱정 말고 한 병 더 주세요.”

“네, 손님.”

종업원이 머뭇머뭇 고량주 한 병을 더 가져왔다.

한지호는 탕수육 한 점에 고량주 한 잔씩 마시며 빠른 속도로 술병을 비웠다.

혼자서 독한 술을 두 병째 마시니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술도 탄력을 받으면 쭉쭉 넘어간다.

하지만 후폭풍은 술을 마신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고량주를 한 병하고도 절반이나 비운 한지호는 슬슬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라 열이 푹푹 뿜어지고 있었다.

한지호는 여기서 더 마시면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계산이요.”

“탕수육 2만 원에 고량주가 두 병이니까 5만원. 합이 7만 원입니다, 손님.”

스윽-

말없이 카드를 내민 한지호가 계산대를 붙잡고 섰다.

자칫하면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것 같았다.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한 종업원이 염려스런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손님.”

“아…… 고맙습니다.”

한지호는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괜한 고마움을 느꼈다.

생판 남인 중국집 종업원이 걱정을 해줘서 울컥했다.

늘 혼자 세상과 맞서 싸워왔고, 대학에 들어가 천사원에서 나온 후에는 걱정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사소한 관심과 걱정도 크게 와 닿았다.

“조심해서 가세요!”

종업원의 염려를 뒤로하고 중국집에서 나온 한지호는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앉은 연남동 골목은 무척 적막했다.

주택들이 붙어있는 골목이라 늦은 시간에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저벅저벅-

한지호는 비틀거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바깥 공기를 쐬니 술기운이 더 강하게 훅 올라왔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취기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다 털어버리려 했는데, 세상에 대한 억울함이 가슴을 콱 막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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