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운명의 군주 (2) >
“으으윽!”
파투아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했다.
“여전히 강하구나, 천마.”
“아득히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실력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니 한심한 놈이로군.”
천마의 손속은 무자비했다.
파투아의 몸체가 가슴을 중심으로 갈라져 동강이 난 것도 모자라 사지가 각각 잘려나갔다.
그렇게 떨어져나간 사지는 이내 먼지로 변해 흩어졌고, 피투성이가 된 황금발의 머리만 남아 둥둥 떠 있었다.
그런데 그 지경이 되고도 파투아는 아직 죽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던 인상이 펴졌을 뿐 아니라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리석구나, 천마! 너를 이루고 있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나다. 네가 나를 대적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천마의 붉은 광검이 파투아의 머리를 박살 냈다.
스스스.
머리가 증발하듯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천마의 주변으로 정체불명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마기보다 더욱 근원적인 어떤 기운이었다.
그것이 천마의 몸으로 끝도 없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저항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마경 심법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미증유의 기운.
그것은 순식간에 천마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군.”
천마의 두 눈에서 신비로운 기광이 번쩍였다.
동시에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핏빛의 머리카락이 아닌 찬란한 황금발을 가진 남자.
다름 아닌 파투아였다.
동시에 그는 천마이기도 했다.
운명의 힘을 통해 더욱 막강해진 천마!
파투아가 만들고자 한 진정한 악마!
그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초유의 재앙적 존재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동시에 마계의 세력이 그의 휘하로 들어왔다.
차원 포탈을 지키고 있던 천마의 1군단과 2군단은 물론이고 제7거점에서 마력을 회복하고 있던 3군단과 4군단의 마왕들도 모두 파투아의 부하가 되었다.
“프리뭄으로 간다. 강재윤을 포위하라.”
“예, 로드!”
전쟁신을 비롯한 파투아의 부하들이 모두 운명의 공역 제1거점 프리뭄을 향해 이동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멈춰야 했다.
갑자기 프리뭄의 부유섬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프리뭄이 또 위치를 감췄습니다.”
파투아는 인상을 구겼다.
“위치를 감춘 게 아니라 이동했을 뿐이다.”
이는 모든 거점의 관리자 중 가장 강력한 존재인 테네르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테네르! 네가 나를 계속 번거롭게 하는구나. 하지만 어차피 한 번 실체를 드러낸 이상 어디로 이동하든 나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프리뭄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파악 중이었다.
***
한편 그때 재윤은 테네르와 함께 전혀 뜻밖의 장소로 이동한 상태였다.
“간수장 테르툼, 수용소의 위대하신 로드를 배알하옵니다.”
지구에 위치한 괴물 죄수 수용소.
본래 운명 시스템이 각성자들을 위한 최후의 비밀 수련장으로 만들어 놓은 장소지만, 실은 제1거점 프리뭄의 비밀 요새였다.
테네르는 제1거점 관리자로서의 권능을 발휘해 운명 시스템에 은밀히 개입한 터라 이곳이 프리뭄의 비밀 요새라는 사실은 파투아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이전에 나의 분신이 그대에게 말한 적이 있을 거야. 이곳을 그대가 접수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테네르의 말에 재윤은 끄덕였다.
“그랬지. 설마 이때를 염두해둔 거였나?”
“물론 나의 분신은 당시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어. 그저 이곳이 특별한 장소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하지만 만약 이곳을 접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거점 이동은 불가능했을 거야.”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네.”
아까 재윤은 테네르로부터 파투아가 천마의 힘을 흡수해 재앙적 존재가 되었음을 전해 들었다.
그런 파투아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프리뭄을 공격해오는 터라 거점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것도.
재윤이 아무리 레벨 100의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지만 혼자서 파투아와 부하들 모두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즉시 거점을 이곳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재윤이 이곳 수용소의 주인이며, 또한 지구가 이미 운명의 공역으로 흡수된 상태라서 가능한 일.
"그런데 이곳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 거지?”
재윤이 묻자 테네르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알아둘 것이 있어. 일단 저기 있는 간수장 테르툼은 본래 제3거점 테르티움의 관리자야. 물론 그는 자신이 그런 존재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지만.”
거대한 크로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간수장 테르툼.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이 제3거점의 이름과 비슷했다.
“어떻게 된 거지? 저자가 왜 이곳의 간수장이 된 거야?”
“파투아는 그가 장악한 거점들 중 제2거점 세쿤둠의 관리자를 제외한 나머지 관리자를 모두 제거했어. 운명의 힘을 그의 맘대로 주무르는데 테르툼을 비롯한 관리자들이 반대했다는 이유야.”
테네르는 그들이 소멸되기 직전 운명의 힘을 소모해 간신히 살려두었다 했다.
그렇게 살아난 테르툼을 비롯한 관리자들은 본래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이곳에서 간수 노릇을 한 채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재윤이 수련을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죄수 상태였던 그를 고문했던 오우거 간수도 그중의 하나였다.
제7거점 셉티뭄의 관리자 셉티우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손을 좀 봐주려고 했는데 잊고 있었네.’
재윤은 당시 오우거 간수가 자신을 꽤나 괴롭게 했던 것이 떠올라 실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가 운명의 공역 거점의 관리자 중 하나였을 줄이야.
물론 셉티우스는 그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테네르에 의해 주입된 가짜 기억으로 인해 지금도 그 자신이 오우거인 줄 알고 있을 것이다.
한편 그때 오우거 간수 셉티우스는 재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몸을 떨었다.
“로드시여! 저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용서할 테니 신경쓰지마라.”
“로, 로드의 자비 잊지 않겠사옵니다.”
재윤은 그때라면 몰라도 이제 와서 셉티우스를 손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에 신경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파투아가 곧 이곳의 위치를 파악한 후 공격해올 터라 그에 대비하는 것이 시급했다.
테네르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그대가 운명의 거점들을 장악하는데 많은 힘이 될 거야.”
관리자들이 힘을 회복하면 제2거점 세쿤둠을 제외한 여섯 개의 거점을 재윤이 손쉽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죄수로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괴물들도 실상 각 거점을 지키던 운명의 전사들이야. 그들 또한 본래로 돌아오면 그대의 강력한 부하들이 되어줄 거고.”
재윤은 끄덕였다.
“그럼 어서 저들의 힘을 회복시켜야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에게 그럴 만한 운명력이 없어. 따라서 그대는 이제 운명력을 모아야 해.”
“운명력은 어떻게 모을 수 있는데?”
“그대를 신뢰하는 이들이 많을 수록 막대한 운명력이 쌓이게 될 거야.”
“나를 신뢰하는 이들이라고?”
“누구라 해도 상관없어. 그들이 각성자이건 비각성자이건, 혹은 인간이건 아니건, 그 어떤 존재라도 그대를 신뢰하는 마음이 많다면 무시못할 운명력이 그대를 향해 쌓이게 돼.”
테네르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모이는 운명력은 파투아가 강제로 각성자들로부터 투자와 회수를 통해 얻고자 하는 운명력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양이야.”
“하지만 과연 나를 신뢰하는 자들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재윤은 우려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날 진심으로 믿어줄 만한 사람들은 부모님밖에 없을 텐데. 아니지. 민철이 형이랑 예찬이가 있잖아. 그리고 세붐, 로사엔, 제칸도 날 믿어줄 거고. 그 외에는 용사 루니스와 환선 사부님 정도겠지.’
그러나 다른 이들은 얼마나 자신을 신뢰해줄지 미지수였다.
비록 재윤이 도움을 준 적이 있다해도 그런 이유로 그들이 재윤을 신뢰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흑룡 데카투스와는 친구가 되긴 했지만 그전에는 원수 관계였다.
또한 재윤이 그의 날개를 빼앗기도 하는 등 괴롭힌 적도 많은 터라 그의 신뢰를 바라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마왕 데사오도 마찬가지.
그리고 정말로 슬픈 일이지만 희망 성의 관리자 오르도와 초승달의 관리자 이예은을 비롯한 각종 안전지대나 도시의 관리자들은 태생적 한계가 존재했다.
테네르의 말에 의하면 그들 역시 고대의 천마처럼 파투아가 운명력을 통해 창조한 그림자들이기 때문이다.
‘정말 얼마 없겠구나.’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재윤은 담담히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을 진정으로 믿어주는 소수의 마음이라도 고맙게 받으리라고.
“그대를 알고 있는 모두에게 뜻을 보냈어.”
그때 테네르가 눈을 감았다 뜨고는 말했다.
재윤은 놀랐다.
“벌써 뜻을 보냈다고?”
“시스템의 알림을 통해 전달된 상태야. 이제 기다리면 돼. 그들의 선택에 따라 그대에게 막대한 운명력이 쌓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녀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 초조한 상태였다.
‘최소한 거점 관리자들만이라도 회복시킬 만한 운명력이 들어와야 할 텐데.’
그래야 파투아와의 전쟁에서 승산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죄수로 갇혀 있는 운명의 전사들까지 모두 회복될 만한 운명력이 모이게 되면 승산은 말할 수 없이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
누군가에게 신뢰 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쩌면 정말로 믿었던 대상에게조차 외면당할 수 있으니까.
***
[강재윤이 운명을 가장한 세력 파투아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며 당신에게 긴급히 지원을 요청합니다.]
[그를 돕는 순간 당신은 파투아의 분노를 사게 되어 큰 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강재윤을 지원하겠습니까?]
그때 김지현은 고블린 세붐과 엘프 로사엔 등이 구해다 준 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그녀는 전투 능력 각성자는 아니지만 괴물 요리 능력을 각성했고, 어느덧 50레벨을 달성한 터였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만든 요리는 각성자뿐 아니라 비각성자들에게도 각종 이로운 효과를 줄 수 있었다.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그러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재윤이가 최후의 전쟁을 준비하는데 도와달라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알림이 다시 한 번 반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아들 걱정에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던 그녀였다.
망설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 엄마가 무슨 일을 당해도 널 도우마, 아들아.”
그녀에게는 파투아의 분노가 어쩌고 징벌이 어쩌고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츠으읏!
갑자기 그녀의 몸을 알 수 없는 빛이 휘감았다.
눈부시게 휘돌던 그 빛이 사라진 순간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바로 그때 강두성 역시 김지현의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 김지현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눈채채지 못했다.
‘뭐? 재윤이가?’
그 역시 아들 재윤이 최후의 전쟁을 하며 긴급히 지원을 요청한다는 알림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다른 각성자들이나 흑룡 데카투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부탁해 밖으로 나가 각종 괴물 사냥을 하며 레벨을 올려두었다. 어느덧 레벨 65.
어떻게든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어서였다.
홀로 고독하게 무시무시한 존재들과 싸우는 아들이 너무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지금 도와달라고 알림을 보냈다.
“아암! 간다. 이 아버지가 가서 도와주마, 아들아.”
분노니 징벌이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몸이 부서져 죽는다고 해도 갈 것이다.
그렇게 강두성 부부는 동굴 속에서 순식간에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재윤에게 들려오는 알림.
[김지현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대량의 운명력이 쌓였습니다.]
[강두성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대량의 운명력이 쌓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재윤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부모님이 즉각 지원을 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윤에 대한 신뢰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대량의 운명력이 쌓였다는 알림이 두 번이나 울렸다.
그때 이민철은 강두성 등이 사라진 동굴 안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또한 그들이 사라진 것에 관심을 둘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재윤이 다급히 지원 요청을 한다는 알림이 들렸으니까.
“재윤아! 내 힘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와주마.”
그에 이어 장예찬도 기꺼이 수락했다.
“하하하! 친구가 도와달라는데 당연히 가야지. 날 안 불러줬으면 화냈을 거다."
그들 또한 파투아의 분노나 징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재윤의 부하들인 로사엔, 세붐, 제칸 등도 망설이지 않았다.
“즉각 가겠어요, 마스터.”
“흐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때를 기다렸습니다, 주인님.”
화아악! 츠읏! 츠으읏!
그들은 알림이 들려오는 즉시 주저없이 대답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눈치를 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반응은 강두성 부부보다 약간 늦었을 뿐 거의 동시나 마찬가지였다.
[대량의 운명력이 쌓입니다.]
[대량의 운명력이 쌓입니다.]
......
재윤은 자신의 친구들과 부하들이 기꺼이 자신을 믿어준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고마워, 민철이 형. 고맙다, 예찬아. 세붐, 로사엔, 제칸! 모두 고맙다.’
이제 남은 이들이라면 환선과 루니스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들이 재윤을 지원한다는 알림이 들려왔다.
[환선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루니스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이어서 대량의 운명력이 쌓였다는 알림도.
‘사부님! 역시 무사하셨군요. 루니스 님 고맙습니다.’
천마에게 환선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존을 확인하니 안심이었다.
또한 그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던 루니스 역시 이 알림을 통해 그녀의 생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대충 다 된 것 같네.’
재윤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알림들을 들으며 재윤은 깜짝 놀랐다.
[박은빛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윤현성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한혜미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이경수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