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운명의 군주 (1) >
“맞아. 내가 테네르야. 그리고 이게 내 본 모습이다, 인간.”
놀랍게도 운명의 제1거점 관리자는 테네르였다.
이곳에 있는 그녀가 본신이고 그간 재윤이 만났던 테네르는 분신이었다는 뜻.
“분신이라고? 그럼 넌 흑요정의 탑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군.”
“분신인 나는 많은 것이 제약되어 있었다. 그때는 내가 분신인지도 알지 못했어.”
그러고 보면 테네르는 자신의 기억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을 항상 하긴 했다.
그것이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재윤은 항상 그랬듯이 습관처럼 아공간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냈다.
“일단 받아라. 본신도 이걸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테네르의 표정이 환해졌다.
“잊지 않았구나.”
초코바를 입에 물고 좋아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재윤은 픽 웃었다.
‘정말 테네르 맞네.’
물론 신비한 날개 때문인지 뭔가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느껴졌다.
천사 아니, 그 이상의 지고한 존재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위엄.
그러나 재윤은 본래 테네르에게 하듯 편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럼 이제 내게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봐.”
“간략하게 말하면 그동안 나는 파투아가 운명의 공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이곳 제 1거점을 특별한 공간에 숨겨두었다.”
“이곳이 숨겨진 장소라고?”
테네르는 끄덕였다.
“나까지 군주 파투아에게 굴복하게 되면 운명은 그에게 완전히 종속될 거고, 지금까지의 재앙과는 비할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이 차원계에 미치게 될 거야.”
파투아가 완전한 운명의 지배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
그것이 테네르 때문이었다니.
“그래서 나는 파투아에게 맞설 진정한 운명의 군주를 찾기 위해 분신을 만들어 파투아의 운명 시스템 속으로 투입시킨 거지.”
“그게 바로 내가 봤던 너의 분신이었던 거군.”
“맞아. 그대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흑요정으로서의 나는 파투아 운명 시스템에서 일종의 버그와 같은 존재였어.”
“버그?”
“특정한 조건을 가지면 누구나 나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되어 있었지만 실제는 내가 선택한 존재에게만 보였을 뿐이야. 그게 바로 그대 강재윤이었다.”
“왜 나를 선택한 거지?”
“그대는 군주 파투아가 선택한 존재였으니까.”
“파투아가 나를 선택해?”
테네르는 끄덕였다.
“그대에게 초반에 S급 능력들을 비롯해 유독 많은 행운이 주어진 것은 모두 파투아 때문이었어.”
S급 지식 특성부터 S급 특화 능력인 전쟁신의 검술!
거기에 희망 성의 성주가 되고 운명의 나침반을 얻게 하기도 했던 것.
그 배후에 파투아가 있었다는 뜻.
“대체 그가 왜 나를 선택한 거지?”
“그건 나도 궁금한 부분이야.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대를 이용하고자 했던 건 분명해. 그런데 그대가 그의 예상을 초월할 만큼 강해지자 뒤늦게 견제하려 했던 거고.”
그녀는 재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대야 말로 오히려 파투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운명의 군주가 될 자격이 있다 생각했어.”
그래서 그녀는 재윤을 은밀히 지원했다.
흑요정의 탑에 있는 수련의 던전도 사실 지금 이곳에 있는 테네르의 본신이 만든 것이었다.
그 또한 운명의 공역 제1거점 프리뭄의 관리자가 가진 권능이 있어 가능한 일.
“고마워, 테네르. 네가 아니었다면 나에게는 이미 희망이 사라졌을 거야.”
이 말은 진심이었다.
테네르가 미소지었다.
“하지만 이제 나의 힘으로는 한계에 도달했어. 앞으로는 그대에게 달렸다, 강재윤. 그리고 운명의 군주인 그대가 프리뭄의 주인이 되는 순간 이곳의 위치를 파투아가 즉각 알게 될 거야.”
이제부터 파투아와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테네르에게 들은 내용대로라면 파투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곳을 점령하고자 할 테니까.
“그럼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쳐들어오겠네.”
“파투아의 부하들이 곧 올 거야. 일단 그들의 공격을 버텨내는 게 중요해. 운명의 군주가 된 그대라면 고대의 전쟁신과도 맞서 싸울 수 있겠지.”
“고대의 전쟁신? 정말 그가 신이 맞아?”
“실제 신이 아니라 운명의 힘이 만들어낸 환영과 같은 존재야.”
“역시 그렇군.”
“그 말고도 고대의 용사, 고대의 정령, 고대의 기사등 각성자들에게 특화능력을 주었던 이들이 모두 파투아의 부하들이야. 운명의 힘을 통해 만들어진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절대 그림자처럼 약하지 않아.”
재윤은 놀랐다.
운명의 탑에서 고대의 어쩌고 했던 모든 존재들이 다 파투아가 운명의 힘을 통해 만들어낸 그의 부하들이었다니.
“염려마라. 그놈들이 오면 모두 쓸어버릴 테니까. 그런데 아마 오지 못할 거야.”
재윤은 각성한 천마에 대한 얘기를 테네르에게 해주었다.
그러자 테네르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파투아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운명의 힘이 작용하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그 역시 파투아가 운명의 힘을 이용해 창조한 그림자 중 하나이니까. 정확한 명칭은 고대의 천마. 따라서 그가 파투아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건 피조물이 창조자의 손을 벗어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야.”
천마가 파투아에 의해 창조된 존재였다니.
재윤은 충격적인 사실에 잠시 말을 잊었다.
“다만 천마는 파투아의 다른 그림자들과는 달리 좀 특이한 존재이긴 해.”
“어떤 점이 특이하다는 거지?”
“그 스스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각했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니까. 저주받은 악마의 운명으로 창조된 천마로서의 기억을 봉인하고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창조한 거야.”
“스스로 새로운 운명을 창조해?”
“그가 바로 혈마야. 하지만 파투아는 그조차도 이미 이용하고 있었어. 운명의 힘을 이용해 그가 다시 천마로 돌아가게 만들어버린 것도 파투아가 의도한 바였으니까. 기억을 되찾은 천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겠지만 결국 파투아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순간 재윤은 천마의 슬퍼보이는 눈빛이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마가 잊고 싶었던 기억.
그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젠장! 구슬을 빼앗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재윤이 천마라 해도 그런 기억을 되찾으면 죽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파투아라는 사악한 존재가 운명의 힘을 이용해 만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결코 쉽지 않을 거야. 그대가 내키지 않더라도 천마와의 승부는 불가피한 일이니까.”
“그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재윤은 문득 물었다.
“그럼 나는 파투아처럼 그림자들을 창조할 수 없는 거야?”
“그대가 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하지만 그러려면 파투아처럼 사악해지지 않으면 안 돼.”
“그게 무슨 뜻이지?”
“그것에 소모되는 운명의 힘. 그것은 바로 지구와 같은 소세계를 침공해 엉망으로 만들어야 얻을 수 있으니까.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각성자로서 성장하는 이들의 에너지를 흡수해야 얻을 수 있어.”
“그럼 파투아가 지구를 그렇게 만든 이유가?”
“맞아. 운명의 힘을 얻기 위해서야. 그것이 1의 운명력을 투자해서 100이나 1000의 운명력으로 회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투자와 회수라고?”
“마치 씨앗을 심어 열매로 수확하는 것처럼, 인간들에게 각성의 힘을 부여해 레벨을 올려 강해지면 회수하는 방식. 따라서 운명의 주인이자 군주가 된 그대를 제외한 다른 각성자들의 운명력은 곧 파투아가 수확하게 될 거야. 그로써 그는 막대한 운명력을 얻게 되겠지.”
테네르는 우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대가 하겠다면 나는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걱정 마. 하늘이 무너져도 그딴 짓은 안 해.”
그러자 테네르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역시 그렇지?”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냐? 운명력이 아무리 대단한 힘이라도 아무런 죄도 없는 자들을 희생해서 얻어야 한다면 나는 절대 하지 않는다.”
재윤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보다 기왕 나온 김에 하나 더 물어보자. 천마 사부님이 파투아가 창조한 그림자라면, 그동안 내가 봤던 이들 중에도 그 비슷한 존재들이 또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더 이상 그런 불행한 존재들이 없으면 했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실은 언제나 가혹한 것 같았다.
테네르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물어볼 줄 알았다.”
곧바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들을 들으며 재윤의 표정은 이내 굳어졌다.
‘그들이 그림자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문제는 그들은 자신들이 파투아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저 그들의 뒤에서 파투아가 음흉하게 그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테네르가 재윤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대가 진정한 운명의 지배자가 된다면 그땐 많은 걸 바꿀 수 있을 거야.”
“그럼 설마 지구도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건 나도 몰라. 운명의 지배자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해. 파투아가 모아놓은 막대한 운명력을 모두 빼앗는다면.”
“그놈의 운명력을 빼앗을 수도 있나 보네.”
“그대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파투아가 가진 모든 운명력이 그대의 것이 될 거야.”
그러자 재윤의 눈이 빛났다.
“그럼 더더욱 이겨야지.”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파투아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빼앗은 막대한 운명력을 이용해 지구를 본래로 되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결의를 다지는 순간 신비한 알림이 그의 귀를 울렸다.
[당신은 운명의 공역 제1거점 프리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
한편 그때 운명의 공역 제2거점 세쿤둠.
거대한 부유섬 위에 세워진 찬란한 황금빛 성의 대전.
중후하면서도 노기찬 음성이 그 공간을 울렸다.
“강재윤이 운명의 군주가 되었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
그가 바로 또 다른 운명의 군주이자 이 모든 음모의 주인인 파투아였다.
그리고 대전 아래 시립해 있는 이들.
그들은 그가 운명의 힘에 의해 창조한 존재들이었다.
“덕분에 도통 그 위치를 알 수 없던 신비의 프리뭄이 모습을 드러냈지 않았습니까, 로드?”
“맞아요.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해요.”
그들의 말에 파투아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
“어둠 속에 숨어 흔적을 보이지 않던 프리뭄이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은 물론 내가 바라던 일이다. 이제 나는 프리뭄을 얻고 진정한 운명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곧바로 옥좌에서 일어난 그의 몸에서 가공스러운 기세가 피어나왔다.
“로드! 운명의 지배자이시여! 출전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대전에 있는 모두가 부복하며 외쳤다.
파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강재윤을 죽이고 프리뭄을 점령하라!”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재윤이 프리뭄의 군주가 되자마자 파투아는 즉각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기가 충천한 채로 출전을 나서는 파투아의 부하들 앞을 한 명의 붉은 머리 청년이 가로막았다.
“너희들은 한놈도 가지 못한다.”
그는 물론 천마였다.
그가 나타난 순간 주변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섬뜩한 붉은 안광만 강렬히 번뜩이고 있었다.
“으으! 저럴 수가!”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
가히 미증유와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천마의 기세 앞에 모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파투아는 오히려 반색하는 눈치였다.
“왔느냐? 과거의 너를 각성했으면 이제 네가 누군지 알았겠구나.”
그러자 천마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파투아를 노려봤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내가 네놈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물론이다. 그것은 네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파투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순간 천마의 두 눈에서 핏빛의 안광이 쏘아져나왔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그딴 건 세상에 없다. 운명도 마찬가지다. 한낱 허상에 불과할 뿐인 그 힘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파투아?”
“허상인지 아닌지 알려주마.”
파투아는 신비한 소검(小劍) 한 자루만 손에 쥔채 앞으로 나섰다.
천마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파투아를 공격했다.
곧바로 둘의 무기가 격돌했고 경천동지할 만한 대결투가 벌어졌다.
콰르르릉! 콰앙! 쿠콰콰쾅!
둘의 경지는 엇비슷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파투아는 천마에게 점차로 밀리기 시작했다.
천마가 차갑게 웃었다.
“나를 창조했다고 기고만장하더니 아직도 고작 이 수준이냐?”
붉은 광검이 번쩍이는 순간 파투아의 가슴이 쩍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