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나를 따르라! (2) >
“천마! 그대는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 어찌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가? 어서 마계의 미물(微物)들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라.”
전쟁신의 음성이 사방을 울렸다.
그 소리가 사방을 울려 말 그대로 우레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천마가 큭 웃으며 말했다.
“공연히 신비한 척하지 마라. 너희들은 운명도 뭣도 아닌 그저 어둠 속에 웅크려 음모나 꾸며대는 쥐새끼들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로 이곳을 모조리 쓸어버려 이후로 두 번 다시 스스로를 운명이라 칭하며 건방을 떠는 놈들이 나오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러자 마왕들이 일제히 환호를 질렀다.
“이전부터 운명이라 자칭하는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순간 전쟁신의 두 눈에서 섬광같은 빛이 폭사되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건만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은 너희의 만용과 어리석음 때문이니라.”
그 말과 함께 그가 거검을 번쩍 휘둘렀다.
상공에서 거대한 검광이 전쟁신의 앞쪽으로 방사형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화아아악!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검광은 가히 빛의 속도로 휘몰아친 터라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천마가 재빨리 넓은 반경으로 검막을 펼쳐 일부를 소멸시켰지만, 그와 그의 뒤쪽에 있는 일부를 제외한 모두가 검광의 여파에 휩싸였다.
“커억!”
“크아아악!”
그것은 끔찍한 재앙과도 같았다.
일단 마족들 중 살아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운좋게 천마의 뒤쪽에 위치한 이들은 멀쩡했지만 그밖의 지역에 있던 마족들은 전쟁신의 검광에 스치는 순간 그대로 먼지로 변했다.
그와 달리 마왕들은 상당한 충격을 입어 비틀거리긴 했지만 대체로 버텨냈다.
그래도 무려 2만이 넘는 3군단과 4군단의 병력 중 다수를 이루는 마족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불과 백수십 명의 마왕과 소수의 마족이 살아남는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엄청나군.’
재윤도 그 상황에 놀랐다.
그와 데사오는 어쩌다 보니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전쟁신의 공격 범위 밖에 위치해 있어 멀쩡했다.
‘설마 진짜 신인가?’
사실 그동안 전쟁신이라는 호칭이 들어간 특화 능력을 얻긴 했지만, 그냥 상징적인 이름이라 생각했다.
운명의 탑에서 만났던 전쟁신도 실제 신이 아닌 그냥 신이라 불릴만큼 강한 존재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단 한 방의 검격에 마족 2만여 명을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걸 목격하니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언제 접근했는지 천마가 전쟁신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콰르르릉! 콰아앙! 콰쾅!
타오르는 듯한 붉은 광채로 휩싸인 천마의 검과 찬란한 푸른 광채로 휩싸인 전쟁신의 거검이 서로 격돌하며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놀라운 일은 가히 진짜 신과 같은 위용을 발휘했던 전쟁신을 향해 천마가 오히려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것.
비록 천마는 전쟁신이 보여줬던 가공스러운 광역 공격은 펼치지 못하지만 일대일 승부에서는 오히려 더 막강한 능력을 발휘했다.
“머뭇거리지말고 모두 쓸어버려라!”
심지어 천마는 전쟁신을 몰아붙이며 마왕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러자 상마왕 마크나스와 이베르칸을 필두로 3군단과 4군단의 마왕들이 전쟁신의 뒤에 위치해 있는 파투아의 전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호호호호! 살육에는 살육으로 돌려주마. 물론 백 배, 천 배로 말이야."
그중 상마왕 마크나스가 단연 발군이었다.
그녀의 무기는 거대한 사슬낫.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붉은 색의 거대한 낫이 수백 개의 환영을 그리며 전방으로 쏘아져나갈 때마다 적들의 머리가 몸체에서 그대로 분리되었다.
“크아악!”
“아악!”
그녀의 공격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적들은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상급 마족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자들.
게다가 마왕 급의 전투력을 지닌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마크나스의 사슬낫이 날아들면 여지없이 머리가 날아갔다.
물론 또 다른 상마왕 이베르칸 역시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마치 오우거와 같은 우람한 체구를 지닌 그는 적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며 접근해 한 대씩 후려칠 뿐이었다.
퍽! 퍼퍽!
“쿠아아악!”
“아아악!”
손가락으로 머리를 튕기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치기도 했다.
뭐든 그의 손에 맞으면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3군단과 4군단의 마왕들이 각각의 부하 마족들을 잃은 분풀이를 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퍼억! 콰직! 푸확!
물론 재윤이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레벨 96에 장착했던 마왕 안누스의 날개는 무려 일백 개나 되는 촉수를 한 번에 발출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해 막타만 노리며 전장을 휩쓸었다.
상마왕 마크나스의 사슬낫 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다고 적들은 단번에 죽지 않는다.
적들 또한 대부분 마왕들 못지 않은 불가사의한 생명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태에는 전투 능력이 대폭 하락한 상태라 막타를 통해 해치우기는 매우 수월했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적을 죽이는 숫자는 재윤이 모든 마왕들 중에 압권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마왕들은 일일이 적의 최후를 확인하는 것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은 터라 재윤이 막타를 친다고 해서 기분나빠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뒤처리를 확실하게 해주자 기뻐할 정도였다.
“호호호호! 나룬, 네가 아주 기특한 행동으로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이후에 네게 아주 특별한 포상을 내려주마.”
“포상이라니 영광입니다.”
재윤은 물론 그 따위 특별 포상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음탕한 여마왕 마크나스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녀의 사슬낫이 움직이는 것만 주시해도 막타거리들이 끝도 없이 나타났으니까.
‘오늘 죽인 녀석들의 경험치만 다 획득해도 레벨 100은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자 무척이나 뿌듯했다.
다만 한편으로 마음이 개운치 못한 것은 있었다.
그가 막타로 죽이고 있는 적들의 모습이 마왕들과 완전히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용사 루니스를 연상케할 만큼 정의로워 보이는 눈빛의 전사들.
딱 봐도 성녀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성스러운 여성 사제.
신력이 무척이나 뛰어나 보이는 고위급 신관.
고결한 눈빛과 기상을 가진 엘프들과 인간 마법사들.
지금 재윤은 그들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마왕의 모습으로 말이다.
누군가 만약 이 상황을 멀리서 그냥 지켜보고 있다면 사악한 마왕들에 의해 그들과 맞서는 정의의 세력들이 몰살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적들 중에는 전쟁신만큼은 아니어도 가히 상마왕 못지 않은 전투력을 지닌 존재도 있었으니까.
따라서 마왕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재윤은 눈치껏 그런 강한 적들을 피해 상마왕들의 뒤를 따르며 막타 마무리에만 열중했다.
콰르르르!
그때 천마와 싸우던 전쟁신이 돌연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콰아아앙!
급작스러운 강력한 일격에 충격을 입은 천마가 뒤로 쭉 밀려났다.
그러나 천마는 별것 아니라는 듯 금세 다시 반격을 하려했다.
그 순간 전쟁신의 검에서 햇살같은 광채가 폭발하듯 발산되었다.
화아아악!
그 광채는 천마와 전쟁신의 거리를 아득히 멀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근접해서 전투를 벌였던 그들의 거리가 더 이상 시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파투아에 속한 모든 존재들도 전쟁신과 함께 멀어져갔다.
“감히 이 따위로!”
천마는 전쟁신이 특별한 결계를 펼쳐 후퇴하는 것을 알고 코웃음 쳤지만 그 결계는 쉽사리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이 결계를 깨뜨리는 동안 너희들은 잠시 쉬도록 해라.”
그렇게 전쟁신이 결계 방어진을 침으로 양측의 전투는 잠시 중단되었다.
천마 진영이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마족들 대부분이 몰살당하고 마왕들도 적지 않게 희생된 터라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된다 해도 마계의 세력이 대폭 줄어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상황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물론 재윤이었다.
비록 어쩌다 마왕이 되었지만 그는 결단코 마왕들의 편이 아니었다.
물론 운명을 가장한 세력인 파투아의 편도 당연히 아니었다.
양쪽이 알아서 서로 싸우며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데다, 그 와중에 대량의 막타를 통해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게 됐으니 그로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귀룡을 소환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건데.’
이곳 공역에서 귀룡을 소환하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마왕들, 특히 천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귀룡을 보면 그 즉시 천마는 재윤의 정체를 간파하고 말 테니까.
천마 뿐이 아니다.
귀룡을 보게 되면 파투아 측에서도 재윤의 존재를 대번에 알아내고 말 것이다.
‘서두르지 말자. 기회는 분명 올 거야.’
천마나 전쟁신과 싸워도 패하지 않을 만큼 강해지는 게 중요하다.
그때는 어디서든 귀룡을 소환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성급하게 움직이기 보다 상황을 계속 지켜보자.’
아까 처음 전쟁신의 광역 공격을 봤을 때만 해도 그와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천마에게 밀리고 있는 걸 보자 재윤의 생각이 달라졌다.
말만 신(神)이지 진짜 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신도 천마처럼 아주 강력한 어떤 존재일 뿐이다.
그 말은 곧 재윤이 레벨을 올리고 계속 강해지면 이길 수 있다는 뜻.
‘레벨을 100으로 올리면 해볼만 할 지도 몰라. 특히 환족왕 사부님의 초월환령검을 완벽하게 터득할 수 있다면.’
무척이나 난해해 마경심법이나 환선공보다 더욱 수련이 어려운 것이 바로 초월환령검이다.
그건 특별한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아직 재윤은 그것의 실체조차 잡지 못했다.
‘귀룡을 소환해야 환족왕 사부님을 만나 초월환령검을 배울 수 있는데 당분간은 쉽지 않겠군.’
***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
노기에 찬 중후한 음성이 그 공간을 울렸다.
“천마가 이곳을 공격해 올 것이란 예상은 다들 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러자 누군가 대답했다.
“천마가 우리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두 강재윤이 종적을 감추며 벌어진 일이에요. 놈이 가진 기억의 구슬을 천마가 얻게 될 경우 그는 우리의 세력 하에 들어오게 되는 데, 지금 그게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천마의 재앙!
그것은 애초부터 파투아에서 의도한 것이었다.
그들은 운명의 힘을 통해 천마를 마음대로 통제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기억 봉인의 구슬.
그 구슬은 단지 천마의 기억을 돌려놓는 용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파투아의 세력이 되도록 만드는데 있었다.
문제는 재윤이 그 구슬을 소지한 채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것.
파투아에서 재윤을 찾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천마를 통제할 힘이 깃든 구슬 때문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천마는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강재윤이라는 인간 녀석 하나가 이렇게 골치를 썩이게 될 줄은 몰랐군.”
“애초부터 강재윤은 우리의 손바닥 위에 있던 녀석입니다. 각종 S급의 특별한 행운을 몰아주었던 것도 그 때문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하필이면 아루넬이 운명의 돌을 가져가 놈을 통제하기가 불가능해졌어요.”
그러자 중후한 음성이 노기어린 음성을 다시 발했다.
“지금은 푸념할 때가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강재윤이라는 놈을 찾아야 한다. 천마는 지금도 흡혈귀가 피를 갈구하듯 그 구슬을 얻으려 할 것이다. 그것을 찾아 천마에게 건네주면 그를 우리의 하수인으로 만들 수 있다.”
“마왕들이 천마의 휘하로 들어간 이상 그들을 이용해 강재윤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 놈을 찾을 방법이 없는 건가?”
“놈은 부모가 있는 곳으로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그곳으로 그들을 보내려 합니다.”
“그들이라면?”
“놈이 절대 눈치채지 못할 존재들입니다. 철저히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의심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도 자신들이 우리의 하수인인지 알지 못하니 완벽하게 놈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중후한 음성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보다 베르타는 어찌 되었느냐?”
“그 또한 종적을 완전히 감춘 상태입니다. 아루넬처럼 우리를 배신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에게 지속적으로 우리의 뜻을 전하고 있지만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베르타가 제 임무를 다했으면 우리가 강재윤의 종적을 놓칠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대체 그 인간 놈이 뭐라고 아루넬에 이어 베르타까지 그놈에게 붙은 것인지 모르겠군.”
순간 섬뜩하도록 차가운 여성의 음성이 울렸다.
“염려마세요. 가증스러운 베르타 놈에게는 그에 대한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야 마땅하다. 감히 감시자로서의 본분을 잊고 하찮은 인간 놈에게 붙어 우리를 배신한 징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베르타뿐 아니라 본래 그가 속했던 세계 또한 곧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는 곧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될 테니 피눈물을 흘리게 되겠죠."
“최후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라. 지금이라도 본래 감시자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해라.”
“그렇게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어리석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군.”
베르타가 속했던 세계의 파멸.
그 세계의 안전을 담보로 파투아에 가담했던 베르타가 배신을 한 이상 그 조치는 즉각 이루어졌다.
***
한편 그때 재윤은 난데없이 베르타의 음성을 전해들었다.
《 강재윤! 너는 진정 운명과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느냐? 》
《 갑자기 그걸 왜 묻는 거냐? 》
조용히 아공간에 있던 베르타가 갑자기 질문을 해오자 재윤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베르타의 음성이 무엇 때문인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슬퍼보이는 음성.
어떻게 보면 짙은 절망이 느껴지기도 했다.
《 부탁이다. 지금은 그냥 내가 묻는 것에 대답을 바란다, 인간. 》
《 운명을 자칭하는 파투아 놈들을 말하는 거라면 그놈들을 이길 자신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무조건 싸워서 이길 것이다. 》
그러자 베르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믿겠다, 강재윤. 나의 제한된 기억으로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없으나 그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한 종자들이다. 그대가 그들을 물리치고 혹시라도 진정한 운명의 힘을 얻게 되면 그때 부디 나와 내가 속했던 세계를……. 》
베르타에게도 본래 그가 속했던 세계가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멈췄다.
[베르타가 소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