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수성전 (2) >
재윤이 돌진해오자 혈의복면인들은 말이 필요없다는 듯 즉각 공격을 해왔다.
30미터 밖에 있던 혈의복면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재윤의 뒤쪽에서 번쩍 나타나 무기를 휘둘렀다.
쒸익!
파공음과 함께 날아드는 기다란 칼.
그것은 검이 아닌 도(刀)라고 불리는 무기였다.
도신에 피어난 짙은 빛은 검기와 같은 기운.
먼 거리에서 눈깜짝할 사이에 접근한 것도 모자라 군더더기 없는 빠른 동작으로 공격을 해오는 걸 보면 상당한 고수였다.
카앙! 촥-
재윤의 검이 도를 쳐냄과 동시에 바람을 갈랐다.
혈의복면인은 재빨리 도를 돌려 막으려 했지만 그때는 재윤의 검이 이미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후였다.
“크윽!”
혈의복면인의 목부위에 혈선이 생겨났고 그 부위가 갈라지며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1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곧바로 들리는 보상 알림.
재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1코인이라고?’
단번에 해치우긴 했지만 그것은 재윤의 전투력이 강해서였다.
혈의복면인은 어지간한 보스 급 괴물들 수준이었다.
최소 수천 코인에 상자 보상까지 획득해야 정상인데 고작 1코인이 보상이라니.
‘이런 식으로 나온다?’
운명의 힘이 주는 패널티일 것이다.
분명 운명과 관계가 틀어졌지만, 아루넬은 재윤이 적을 해치우면 코인과 경험치는 획득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어쨌든 1코인도 보상은 보상이니까.
‘그렇다면 경험치도 코딱지만큼 주려나.’
그 사이 두 명의 혈의복면인이 재윤에게 접근했다.
하나는 공중으로 솟구친 채 바람개비처럼 빠르게 회전해 재윤의 머리를 도로 내리쳤고, 다른 하나는 뒤쪽에서 재윤의 허리를 갈라왔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합공이라 꼼짝없이 당할 것처럼 보였지만, 재윤의 검이 크게 원을 그리는 순간 혈의복면인들의 몸에서 피가 숫구쳤다.
“크아악!”
“크악!”
한 명은 목이 날아갔고 다른 한 명은 가슴이 횡으로 갈린 채 널브러졌다.
[1코인을 얻었습니다.]
[1코인을 얻었습니다.]
역시나 보상은 동일했다.
심지어 지식도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적어도 E급 지식은 나와야 정상인데.’
S급 지식 획득 특성을 보유한 재윤이 동일한 종류의 적을 셋 이상 처치하고도 지식을 얻지 못한 경우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는 운명의 힘이 코인과 경험치 보상뿐 아니라 각종 지식과 아이템 획득률도 최악의 수준으로 낮춰놓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리라.
‘지금까지 얻은 건 어쩔 수 없으니 놔두지만 앞으로는 거의 얻지 못하게 하겠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모든 건 운명의 힘이 주관하는 것이니까.
‘이대로면 사실상 레벨 업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군.’
보스급 괴물을 수천 마리 해치워도 레벨 1을 올리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레벨 업이 아니어도 강해질 수 있다.’
이는 혈마의 무공인 마경 심법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레벨이 오르면 내공이 늘어나지만, 수련을 통해서도 내공이 쌓인다.
‘내공이 오르면 그만큼 더 강해지는 거니까.’
다만 마경 심법(Lv87)의 내공 수련과는 달리 전쟁신의 검술(Lv87)은 레벨이 올라야 경지가 상승하는 터라 그건 확실히 난감한 일이었다.
“저놈에게 벌써 셋이 당했다!”
“보통 놈이 아니니 조심해라!”
그 사이 재윤을 포위한 혈의복면인들은 수십 명.
그들은 재윤이 움직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포위해서 한 번에 공격을 해왔다.
‘혈광파!’
그 순간 재윤의 검에서 붉은 빛의 파동이 일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큭!"
"으윽!"
재윤을 포위했던 혈의복면인들이 뒤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광역기로 그들을 쓰러뜨리지는 못했지만 합공을 주춤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재윤에게는 그 정도 빈틈이면 충분했다.
재윤이 사방을 질풍처럼 이동하며 푸른빛 검신의 플루토를 휘두를 때마다 혈의복면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크아아악!”
“아아악!”
“흔들리지 말고 환마혈도진을 펼쳐라!”
“적은 하나뿐이다.”
그 순간 혈의복면인들이 일곱 명씩 조를 이루더니 각각이 합체되어 한 명의 거대 혈의복면인으로 변했다.
‘저건 또 뭐지?’
사람 일곱 명이 하나의 거인으로 합체되다니.
그냥 몸이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거인으로 변한 것이다.
거인의 손에는 일곱 자루의 도가 합체 변환된 거도(巨刀)가 쥐여져 있었다.
“크크, 각오하라!”
곧바로 거인들이 재윤을 포위한 채 거도를 휘둘렀다.
움직임과 파괴력이 좀전의 혈의복면인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쒸이익! 파파팟-
폭풍처럼 날아드는 거도에는 불가사의한 괴력이 실려 있어 그것과 격돌할 때마다 재윤은 뒤로 밀려났다.
‘마법인지 술법인지 모르지만 상대하기 피곤한 놈들이군.’
그러나 플루토에 생성된 검강의 위력 앞에 거인들의 거도가 잘려나가며 전세는 금방 반전되었다.
반토막이 난 거도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거인의 공격을 피하며 재윤이 훌쩍 도약해 놈의 목을 검으로 갈랐다.
촤악! 서걱!
그러자 거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그렇게 쓰러진 곳에는 거인이 아닌 일곱 명의 혈의복면인들이 모두 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다.
‘합체의 위력이 강한 만큼 상처를 입으면 다 같이 입는 식인가?’
합체거인의 어디든 치명상을 입히면 혈의복면인 모두가 같은 부위에 치명상을 입는 것이다.
“쿠아아악!”
그 사이 재윤의 검강에 또 하나의 거인이 허리가 잘려 쓰러졌다.
“처리하기 편하게 뭉쳐 있으면 나야 고맙지.”
한 놈을 죽이면 일곱 놈이 죽는다.
그런 식으로 재윤을 포위한 합체거인 다섯이 연달아 쓰러지자 그 주변으로 35명의 혈의복면인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자 멀리 뒤쪽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혈의복면인 하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환마혈도진(幻魔血刀陣)이 고작 한 놈에게 깨지다니 믿을 수 없군.”
“이런 괴상한 세계에 저같은 고수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처음 보는 검법이다만 정말 가공스러운 위력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저자를 상대하기 어려워 보이니 일단은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철수해라.”
철수 명령을 내리자 혈의복면인들은 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퇴각을?’
재윤은 추격할까 했지만 일단 성으로 돌아왔다.
또 어떤 존재들이 공격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이 성의 서쪽과 동쪽에도 일단의 적이 몰려와 성벽을 공격 중이었다.
서쪽에는 외뿔 거인 군단이, 동쪽에는 붉은 날개를 가진 거대 늑대들이었다.
양쪽 다 남문에 나타났다 데카투스에게 쫓겨갔던 거대 리자드맨들 못지 않은 기세의 괴물들.
희망 성은 남문 외에는 지형이 험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편이지만 그거야 약한 괴물들 얘기였다.
“크아악!”
“피하지 말고 공격해라!”
“우리 푸른 달의 전사들은 그 어떤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붉은 날개 늑대들과 맞서 싸우는 용맹한 전사들.
그들은 제칸을 비롯한 푸른 털의 라이칸슬로프들이었다.
라이칸슬로프들은 날개는 없지만 10여 미터씩 도약해 붉은 날개 늑대들을 붙잡아 그것들의 날개를 찢어버리고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일대일 전투력으로는 라이칸슬로프들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붉은 날개 늑대들의 숫자는 수천 마리가 넘었다.
세마르 숲의 엘프들이 화살을 쏘며 지원해주긴 했지만 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아군에도 피해가 속출했다.
“건방진 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것이냐?”
바로 그때 남쪽의 적을 쫓아버린 데카투스가 성의 동쪽으로 이동해 불을 쏟아냈다.
귀룡을 타고 멀리 이동할 때를 제외하면 재윤은 데카투스에게 날개를 돌려줬다.
지금도 마찬가지.
덕분에 본신의 전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된 데카투스는 흑룡으로서의 가공스러운 위용을 보여주었다.
적들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사기를!
붉은 날개 늑대들은 데카투스가 나타나자 기겁했다.
일부 겁 없는 녀석들이 데카투스를 향해 돌진했다가 수십 조각으로 찢겨나가는 걸 본 순간 놈들은 결국 퇴각하기 시작했다.
“모조리 태워주마!”
그 뒤를 데카투스가 따라가며 불을 내뿜자 붉은 날개 늑대들은 한 번에 수십 마리씩 통구이로 변해 떨어져내렸다.
그 사이 서문 쪽 상황은 처참했다.
외뿔 거인들에 의해 서쪽을 방어하던 각성자들 일부가 죽임을 당했을 뿐 아니라,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크카카카! 이거 오랜만에 먹는 인간 고기로구나.”
“키키! 입에서 살살 녹는 걸?”
“오늘 실컷 인간 고기로 포식하겠다.”
외뿔 거인들은 신장이 5미터에서 10미터까지 다양했다.
키의 크기만큼 그것들의 전투력도 다양했는데, 어떤 녀석들은 수십 미터를 가볍게 점프해 성벽을 뛰어넘기도 했다.
그러다 성벽이 무너지자 그곳을 통해 외뿔 거인들이 신이 난다는 듯 몰려왔다.
이대로 성안으로 그것들이 진입하면 성의 거주자들에게 끔찍한 재앙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
“물러서지 마세요! 저놈들도 맞으면 죽습니다! 공격은 제가 막아줄 테니 파투스를 아끼지 말고 모든 화력을 쏟아 부어요!”
거대한 방패를 앞세우며 거인들의 앞을 막아서는 덩치좋은 청년.
그는 10미터 장신의 외뿔 거인의 괴력을 방패로 어렵지 않게 받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뒤로 밀쳐 넘어뜨리기도 했다.
인간이 낼 수 없는 초인적 괴력!
레벨 60의 메인 탱커!
재윤을 제외하면 각성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
다름아닌 이민철이었다.
“쿠오오오! 가소로운 인간 놈 따위가!”
“난쟁이 놈이 감히!”
“한 입에 집어 삼켜주마!”
분노한 외뿔 거인들의 공세가 이민철에게 집중되었다.
“형님! 힘내세요! 저도 왔습니다!”
그러자 레벨 57의 소년 탱커 김지호가 가세해 이민철에게 집중되는 공격을 분담시켰다.
기적 아파트의 각성자 중 하나인 김지호는 이제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능숙한 탱커가 되어 있었다.
“좋아. 조금만 버티자. 그럼 곧 지원군이 올 거다.”
“예, 형님!”
그들을 향해 메인 힐러 박은빛이 소환한 물의 정령이 지속적으로 치유의 빛을 펼쳐줬다.
동시에 윤현성을 비롯한 딜러들은 거인들을 향해 각자의 공격기를 재사용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퍼부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외뿔거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대로라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을 찰나.
외뿔 거인들이 돌연 무력하게 쓰러지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악!”
“카아아악!”
푸른빛이 번쩍일 때마다 거대한 거인들의 몸에 핏빛의 사선이 길게 생겨났고, 그 사선을 따라 거인들의 몸체가 갈라졌다.
물론 재윤이었다.
북문의 혈의복면인들을 쫓아버린 후 곧바로 성으로 복귀한 그는 서문의 상황이 심상치않자 즉각 이동해 외뿔 거인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오오! 재윤아!”
“강재윤 대표님이시다!”
“성주님이 오셨다!”
재윤에 의해 외뿔 거인들이 무력하게 쓰러지는 것을 본 이민철 등이 환호했다.
끔찍스럽게도 강했던 외뿔 거인들이 재윤 앞에서는 그저 허수아비와 다름없었다.
“와아아아!”
“역시 최강입니다!”
모든 각성자들의 자존심이자 희망과 같은 존재!
그들은 재윤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사기를 회복했다.
“우리도 힘을 냅시다!”
“거인들을 다 해치워버리자고요!”
각성자들이 재윤과 합세하자 가득이나 패닉 상태에 빠져 허둥대던 외뿔 거인들은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쫓지 마세요. 일단 성으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합니다.”
“예, 성주님.”
그런데 그 사이 성의 남쪽 광장에도 한바탕 난리가 벌어져 있었다.
일단의 괴물들이 땅굴을 파고 올라온 것이다.
땅굴 파기 전문가인 코볼트 군단!
다행히 땅굴 공격을 미리 감지한 세붐이 고블린 부하들과 함께 포진해 코볼트들과 맞섰다.
그러다 동쪽의 늑대들이 데카투스에게 쫓겨가자 한숨을 돌린 제칸이 라이칸스로프들을 이끌고 와 코볼트들을 모조리 죽였다.
재윤이 도착했을 때는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수고들 많았다.”
재윤은 제칸과 세붐 등을 칭찬했다.
특히 느닷없는 내부로의 침투를 눈치챈 세붐이 아니었다면 성안에 적지않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때 붉은 날개 늑대들을 불태우며 동쪽으로 향했던 흑룡 데카투스가 입에다 뭔가를 물고 돌아왔다.
붉은 날개 늑대였는데 덩치가 몇 배는 더 컸다.
몸체의 길이가 가히 10미터는 되어 보였는데 날개의 색이 루비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데카투스는 그것을 재윤 앞에 내려놓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