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수성전 (1) >
“테네르?”
석화의 저주로 돌이 되어 재윤의 아공간에 들어 있던 그녀가 어떻게 이 괴상한 탑에 있는 것일까?
그것도 운명의 탑이 있던 자리에 새로 생겨난 탑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공간에서 사라졌네.’
어떻게 된 일인지 재윤의 아공간에서 이곳 탑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런데 테네르는 재윤이 들어오자 처음엔 살짝 반가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하여간.’
재윤은 픽 웃으며 아공간에서 초코바 2개를 꺼냈다.
그러자 테네르가 슬쩍 실눈을 뜨고는 그것을 확인했다.
곧바로 그녀는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뭘 좀 아는구나, 인간.”
“이 정도야 기본이지.”
재윤은 그녀의 손에 초코바들을 쥐어 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이동한 거야? 이 탑은 뭐고?”
“그건 나도 모르겠다. 갑자기 저주가 풀리며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고, 그대가 막 들어왔으니까.”
“어쨌든 저주가 풀렸다니 다행이네. 그보다 정말 고맙다, 테네르."
재윤은 테네르에게 흑화 용사 아르데아와 있었던 일을 간략히 얘기해줬다.
그러자 테네르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이구나, 인간. 비유적으로 말했는데도 그 말을 잘 알아듣다니.”
“내가 눈치 하나는 빠르거든.”
“하지만 이제부터 긴장해야 할거야.”
“각오하고 있다. 운명의 힘이 뭔가 농간을 부리겠지. 이미 안전지대 보호막도 모두 사라진 상태야.”
“그 정도는 약과일 거야. 운명은 어떤 식으로든 그대를 굴복시켜 흑화 용사 아르데아를 제거하도록 만들겠지.”
순간 재윤은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데 너 그런 말 막 해도 되는 거야? 그러다 또 돌로 변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라.”
“염려마라, 인간. 이 탑 안에는 운명의 기운이 미치지 않은 걸 확인했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운명의 힘도 알 수가 없다는 뜻이야.”
“이 탑이 대체 뭔데?”
테네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나도 지금 파악 중이야. 운명에 대항하는 어떤 특별한 힘이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본래 있던 곳과 관련이 있을 지도.”
“네가 있던 곳?”
“어딘지는 나도 몰라. 기억이 지워진 상태라서. 확실한 건 난 그대의 적이 아니니 안심해라.”
“기억이 지워졌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지?”
“그냥 느낌이야.”
“단지 느낌이라고?”
“응. 확실하니 염려 말라, 인간.”
테네르는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었다.
재윤은 끄덕였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뒤통수를 맞는 것도 피곤하니까.
“그럼 난 좀 쉬겠다. 이 탑에 대해 뭔가 파악하게 되면 연락하마.”
“그래. 푹 쉬어라.”
재윤은 흑요정의 탑을 나왔다.
그러자 루니스가 물었다.
“그 탑은 또 뭐죠?”
“흑요정의 탑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루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곳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 같아요. 흑화 용사와 마왕만 제거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표정은 침울해져 있었다.
그러자 데카투스가 말했다.
“너무 고민하지마라, 루니스. 여긴 네가 있던 라넨 대륙과 다르다. 뭔가 하나를 처치한다고 평화가 오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수많은 존재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세상이 분명해.”
루니스가 그를 노려봤다.
“그렇다고 당신처럼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잖아.”
데카투스는 그 사이 베르타에게 소주를 한 병 주문해 홀짝이고 있었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내 느낌인데 앞으로 지금보다 더 치열한 전투를 벌일 일이 많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 쉴 때는 좀 푹 쉬어둬. 항상 말하지만 루니스 넌 너무 경직되어 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루니스에게 술 한 잔을 권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녀는 재윤에게 물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은 피 그림자의 재앙을 해결한 후 마왕만 처치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무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는군요.”
“요즘엔 제가 오히려 당신에게 짐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됩니다.”
이번에 아르데아와 싸워 이긴 것도 루니스가 아닌 재윤이었다.
그렇다고 재윤의 전투력이 루니스나 데카투스보다 높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루니스는 자신이 이전처럼 재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천만에요. 용사인 당신이 옆에 있어줘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사실 저 혼자였다면 정말 막막했을 겁니다. 당신과 로벨, 그리고 데카투스가 함께 있어줘서 운명과 싸워볼 배짱도 생겨난 거죠.”
그 말에 루니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힘내세요. 이전에 약속드린 대로 당신의 동료로서 이곳 지구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돕겠어요.”
뒤에 있던 데카투스와 로벨도 밝은 표정으로 한 마디씩 했다.
“나 또한 맹약을 지킨다, 인간.”
“저도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돕겠습니다, 강재윤 님.”
재윤은 미소 지었다.
“모두 고맙습니다.”
그 사이 귀룡은 멀리 희망 성의 모습이 보이는 상공에 이르렀다.
* * *
안전지대 보호막이 사라진 지 1일이 지났다.
기적과 혜미를 비롯한 안전지대의 인원은 모두 희망 성으로 이주했다.
이제 안전 열차는 운행되지 않으며 더 이상 절대 방어의 보호막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안전지대라는 말은 더 이상 적합한 표현이 아니었다.
그냥 희망 성과 도시 초승달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다음 날.
오르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재윤에게 보고했다.
“성주님, 도시 루크와의 게이트 연결이 끊겼습니다. 그쪽 세계로 더 이상 이동이나 통신이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적지 않은 불이익이 있을 거라고 하더니 드디어 하나씩 드러나는군요.”
도시 루크를 비롯한 47개의 도시가 연결되어 있는 세계.
이제 운명의 힘과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재윤은 그곳으로 갈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한편으로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그곳 세계에는 재윤이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있다.
다름 아닌 그의 사부인 혈마.
그가 언제 나타나 기억 봉인의 구슬을 달라고 할지 모르는데, 두 세계의 연결이 끊겼으니 그가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할 것이다.
‘아니야. 사부님의 능력이라면 그런 것들에 제약받지 않을 지도 모르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위협이었다.
사부 혈마와의 결투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이룬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는 터라 다른 무엇보다 강해지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적입니다!”
“괴물들이 쳐들어오고 있어요!”
희망 성을 향해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초승달의 관리자 이예은으로부터도 급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 성주님! 지금 이곳으로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떼로 오고 있어요. 도시의 각성자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
안전지대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라 초승달에도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도시의 규모가 큰 만큼 방어가 더욱 어려웠다.
각성자들의 방어망이 뚫릴 경우 괴물들은 도시로 진입해 비각성자들을 마구 학살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군.’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것은 보호막이 있을 때의 얘기일 뿐, 이제는 전쟁이 벌어지면 희생자가 나오는 건 불가피했다.
‘어쩔 수 없어. 이제는 다함께 힘을 합쳐 싸워 이겨야 한다.’
곧바로 재윤은 루니스와 로벨을 불러 말했다.
“도시 초승달도 지금 괴물들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두 분은 당분간 초승달의 방어를 담당해주세요.”
“맡겨주세요.”
“그럼 지금 즉시 이동하겠습니다.”
마법사 로벨은 공간이동 게이트를 열어 루니스와 함께 초승달로 이동했다.
그 사이 희망 성의 각 성문과 성벽에는 방어병력이 빽빽하게 배치되었다.
지금은 운명의 탑이 사라졌지만, 편의상 운명의 탑이 있던 방향을 북쪽으로 정했는데, 성에는 동문, 서문, 북문, 남문의 4개 문이 존재했다.
그 중 남문을 향해 리자드맨 군단이 대거 몰려오고 있었다.
도마뱀의 머리에 인간의 몸체를 지닌 리자드맨들은 키가 보통 180cm에서 2미터 정도다.
그런데 지금 몰려오는 것들은 신장이 모두 3미터가 넘었다.
또한 몸에서 피어나는 기세는 오우거를 능가했다.
“으으! 무슨 리자드맨들이 저렇게 큰 거야?”
“큰일이다! 항상 보호막이 우릴 보호해 줬는데.”
각성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다.
남문에 배치된 각성자들의 리더인 최진석도 거대 리자드맨들의 기세 앞에는 주눅이 들고 말았다.
특히 질서정연하게 진군해오는 리자드맨들의 뒤쪽에 그것들보다 두 배는 더 큰 거대 리자드맨이 보였다.
7미터도 넘는 거대 리자드맨의 모습이 보이니 그 앞에서 얼어붙지 않을 각성자들은 없었다.
“공격하라! 저 성에 있는 인간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라!”
“쿠와아아아!”
“캬캬캬! 인간들을 다 죽이자!”
“성을 빼앗아라!”
리자드맨들이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
어떤 녀석들은 높다란 성벽을 훌쩍 뛰어 올라오기도 했다.
“건방진 놈들! 어딜 기어 올라오는 거냐?”
그때 상공에 거대한 흑색의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의 눈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는 순간 뇌전들이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파지직! 파직!
시퍼런 뇌전의 빛줄기가 사슬처럼 리자드맨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에 스친 리자드맨들은 그대로 진저리치며 쓰러졌다.
“쿠아아악!”
“쿠아악!”
이어서 용의 입에서 검붉은 화염이 쏟아져나오는 순간 남문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돌진해오던 리자드맨들에게는 대재앙이 벌어졌다.
“피, 피해라!”
“으으! 용이 나타났다! 피해!”
그러나 검붉은 화염은 마치 불꽃의 강물처럼 땅을 따라 흘러가며 리자드맨들을 숯덩이로 만들었다.
“쿠으아악!”
“캬아악!”
그렇게 리자드맨들이 일방적으로 몰살당하자 7미터 거구의 지휘관이 인상을 구기더니 그대로 날아올랐다.
“저 용은 내가 맡겠다. 모두들 진군하라!”
그의 무기는 창과 도끼를 합쳐놓은 무기인 미늘창.
창대 끝 뾰족한 도끼와 창날에 붉은빛 광채가 피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날아오르자마자 그때를 노려 날아든 용에게 그대로 잡아먹히고 말았다.
으적! 끄지직!
용은 공중에서 리자드맨 지휘관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그것을 본 리자드맨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느냐? 모조리 죽여주마.”
물론 그 용은 흑룡 데카투스였다.
그렇게 데카투스에 의해 남문을 향해 진군해오던 리자드맨 군단이 패퇴했다.
“오오! 저 거대한 용이 우리를 지켜주다니!”
“세상에! 성주님의 동료 중에 용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네요.”
“저 용이 있는 한 보호막이 없어도 이 성은 안전할 거예요.”
희망 성의 거주자들이 환호했다.
각성자들 뿐 아니라 성벽에 배치된 라이칸슬로프, 고블린, 엘프 부대 또한 사기가 급증했다.
현재 제칸의 부하들과 세붐의 부하들, 그리고 세마르 숲의 엘프들도 모두 희망 성에 집결한 상태였다.
한편 그때 재윤은 성의 내성에 위치한 탑 위에서 관리자 오르도와 함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남쪽은 데카투스가 잘해주고 있군요.”
“문제는 북쪽입니다.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어요.”
재윤도 그쪽을 보는 중이었다.
피처럼 붉은 옷을 입고 복면을 쓴 자들.
그들로부터 마치 마인들과 같은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각성자들은 아닌데.’
각성자라면 재윤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저들은 비각성자들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전투력이 느껴졌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위험한 자들이군. 저들이 성으로 접근하면 적지않은 희생자가 생긴다.’
그 전에 막아야 할 것이다.
팟-
내성의 탑 위에 있던 재윤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지더니 성의 북문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성밖으로 뛰어내린 후 혈의복면인들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