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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생존-142화 (142/200)

142화.  < 친구입니다 (1) >

“환영인 것 같군요.”

루니스의 말이었다.

재윤도 끄덕였다.

“하긴 제정신이라면 본신으로 이 앞에 나타날리 없겠죠.”

흑발의 중년인 데카투스는 멀리서 볼 땐 실체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오자 반투명한 환영의 모습이었다.

“난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잠시 너희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시간을 좀 내줬으면 한다.”

데카투스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 본신의 마력을 적지 않게 소모한 상태이다보니 환영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

불같은 성격의 용사 루니스가 대뜸 환영을 공격해 없애버리기라도 하면 골치아플 것이다.

“대화라.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했던가?”

루니스는 무슨 꿍꿍이냐는 듯 데카투스를 노려봤다.

그간 그녀는 그에게 죽을 뻔한적도 있고, 심지어 포로로 붙잡혀 구타를 당한 적도 있다.

물론 그땐 그녀가 일부러 포로가 되긴 했지만, 당연히 흑룡이라면 이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재윤 또한 데카투스가 그간 온갖 악랄한 수단으로 그의 임무를 방해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부모님까지 노리는 극악함의 끝을 보여준 터라 그에 대한 적개심은 상당했다.

언젠가 반드시 죽인다고 결심한 것만 수차례.

다만 재윤이 의외로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어 데카투스는 자신의 대화 상대로 재윤을 지목했다.

“인간, 너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다.”

“말해라.”

재윤이 들어줄 의사를 보이자 데카투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간의 일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더 이상 너와 싸울 생각이 없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재윤 뿐 아니라 옆에 있던 루니스도 어처구니 없다는 듯 코웃음을 날렸다.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 들어줄 만하다, 데카투스.”

순간 데카투스가 울컥하는 표정으로 루니스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이내 화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면 헛소리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데카투스는 한 장의 두루마리를 소환해 재윤의 앞에 날려보냈다.

보호막에 걸려 들어오지 못하자 그는 그것을 그대로 펼쳐서 안의 내용을 보여주었다.

“보다시피 그 두루마리에는 이곳 세계 각 도시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를 비롯해 마왕 데사오의 부하들 명단이 다 나와 있다. 도시의 관리자들 중 마왕 데사오의 부하들은 물론이고, 던전에 숨어 있는 녀석들도 모두 지도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또한 아직 너는 모르겠지만 흑화 용사 아르데아도 이쪽으로 건너왔다. 그가 있는 위치 및 현재 피 그림자화가 진행되는 중심 지역들도 표시된 상태다.”

"......!"

순간 재윤은 무척 놀랐다.

데카투스가 설마 이런 걸 전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말과 그 두루마리의 내용이 사실인지 의심이 갈 것이다. 그것을 믿건 말건 그건 너의 자유다.”

“사실이라고 친다면 나에게 이걸 알려주는 이유는? 설마 마왕 데사오를 배신이라고 하겠다는 건가?”

“배신이라는 말은 적당치 않다. 나는 본래부터 마왕 데사오와 그리 맞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내가 너를 적대한 것은 마왕 데사오의 명령에 의해서였을 뿐, 이제는 내가 너와 싸울 하등의 이유도 없다.”

재윤은 데카투스를 노려봤다.

“실컷 나를 방해해놓고 이제 와서 손을 뺐으니 봐달라?”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하자는 것이다.”

“협상?”

“전쟁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는 건 비일비재한 일. 어차피 네가 마왕 데사오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나와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느냐?”

세상일은 정말 모른다더니.

어제까지 피 터지게 싸우던 흑룡으로부터 이런 제의를 받게 될 줄이야.

그러나 재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야 네가 믿을 수 있는 존재일 때의 얘기겠지.”

“내가 줄 수 있는 믿음은 그 두루마리에 다 있다. 네가 직접 확인해봐라. 내가 준 그 두루마리의 정보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내말을 무시해도 좋다.”

그 말을 끝으로 데카투스의 환영은 사라졌다.

재윤은 그가 준 두루마리를 잡아 다시 살펴봤다.

“정말로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도시를 연결하는 일이 더욱 빨라지겠군요. 그런데 대체 놈이 원하는 게 뭘까요?”

“데카투스가 마왕과 결별을 선언했다면 이해가 되는 일이죠. 우리 손으로 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뜻이 분명해요.”

그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가장 먼저 아르데아가 왔는지부터 확인해봐야 합니다.”

“지도를 보니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군요.”

피 그림자 재앙의 근원인 흑화 용사 아르데아.

그가 이곳 세계에 왔다면 지금쯤 엄청난 속도로 피 그림자의 재앙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 귀룡, 지도에서 아르데아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라. 》

대략 1시간 쯤 이동하자 피 그림자로 변한 광대한 지역이 나타났다.

그곳의 중심에 거대한 용오름이 형성되어 있었다.

흑룡이 준 지도에 표시된대로였다.

“정말이군요. 아르데아가 저기 있어요.”

루니스는 즉각 아르데아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용오름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르데아가 모습을 드러냈고 루니스와 격전이 벌어졌다.

흑룡과 싸울 때와 달리 루니스가 상당한 열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불리해질만 하면 귀룡의 안전지대로 도주했다가 힘을 회복한 후 다시 공격하는 방식으로 아르데아의 힘을 소진시켰다.

“용사 루니스! 네가 끝까지 나를 번거롭게 하는구나.”

밀리기 시작하다 아르데아는 결국 모습을 감춰버렸다.

루니스는 지친 기색으로 돌아왔다.

“아르데아가 이전보다 더 강해졌어요. 피 그림자의 재앙 지대가 넓어질수록 그 자의 전투력이 증가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안전지대 없이는 그를 상대하기 불가능해졌습니다.”

재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85레벨을 달성해서 그를 제거해야겠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니 서둘러야 합니다. 이대로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저와 당신이 힘을 합쳐도 그 자를 쓰러뜨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85레벨까지는 아직 10레벨.

요구 경험치가 많아져 1레벨을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단 근처에 있는 던전들부터 가보려 합니다.”

재윤은 데카투스가 준 지도에 표시된 던전들을 가리켰다.

* * *

흑룡 데카투스가 준 두루마리 덕분에 재윤은 도시들을 빠른 속도로 연결해나갔다.

또한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던전들을 놓치지 않고 들러 괴물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그렇게 5일 만에 다시 레벨이 한 단계 올라 76을 달성했다.

어느덧 제마검은 Lv34, 제룡검은 Lv31.

이 두 자루의 신화 무기들 또한 30레벨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레벨 업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러나 그만큼 위력이 강해진 상태라서 사냥이 편해졌다.

특히 흑룡이 알려준 던전에는 악마들이 많다보니 제마검이 그 진가를 발휘했다.

한편 그렇게 재윤이 빠르게 마왕 데사오의 기반들을 박살내고 도시들을 연결하는 모습을 흑룡 데카투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심지어 그들은 주기적으로 흑화 용사 아르데아를 공격해 놈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그러다 보니 마왕 데사오는 어떻게 손을 써볼 여지도 없이 당하고 있는 상황.

어느새 이곳 분리된 세계에 있는 그녀의 기반이 절반도 넘게 무너져버렸다.

‘지금쯤 데사오가 미쳐 날뛰고 있겠군.’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 고무적인 일은 마왕 데사오의 분노를 자연스레 자신이 아닌 재윤과 루니스 쪽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본래도 재윤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데사오였지만, 이번 일로 그녀의 모든 분노는 재윤을 향하게 될 것이다.

‘예상대로 데사오가 이제 나를 마계로 소환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 하긴 나에게 신경쓸 틈도 없겠지.’

데카투스는 그 사이 모든 마력을 회복했다.

부하들은 다 끌어모아 한 곳에 집결시켜두었다.

물론 그와 그의 부하들이 있는 이곳 최후의 거점은 재윤에게 준 지도에 당연히 표시하지 않았다.

‘보았느냐, 데사오? 너는 나를 너무 얕봤다. 비굴하게 네게 무조건적인 충성만 바치는 너의 권속들과 나를 동일시한 것부터가 너의 과오다.’

데카투스는 냉소를 피워냈다.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 너의 모든 기반이 다 사라지게 만들어주마.’

그와 함께 그는 아공간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 인간 놈이 아주 잘해주고 있으니 굳이 이 구슬로 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어졌군.’

지난 번에는 궁지에 몰린 터라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 구슬의 주인을 찾아갈 생각을 한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최후의 재앙을 깨워 마왕 데사오도 함께 죽게 만들자는 것.

아니, 이 괴상한 판에 뛰어든 모든 녀석들이 다 멸망하게 만들자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재윤 덕분에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조용히 재윤과 마왕이 싸우는 걸 지켜보며 몸을 추스르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인간 놈도 이제 나와 협상할 생각이 생겼겠지.’

그는 재윤과 이제 본격적인 협상을 벌일 것이다.

마왕 데사오와 싸우는 걸 도와주는 대신 날개를 돌려 달라고.

그렇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데사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있지만, 빼앗긴 한쪽 날개를 찾는 것이었다.

‘이런 비참한 꼴로 언제까지 살 수는 없는 일.’

한쪽 날개가 없는 용이라니.

어디 가서 용이라고 말하기도 창피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강적과 전투를 벌일 때가 아니면 본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최근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그 인간 놈은 결코 쉽게 날개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대체 뭐로 구슬려야 그놈이 날개를 내줄지 모르겠군.’

이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재윤에게 지도를 내준 것으로 일단 협상의 여지가 있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날개를 돌려받는 건 별개의 문제다.

그것을 돌려받는 대신 그 이상의 것을 줘야 할 것이다.

콰르르릉! 콰아앙!

“쿠아아악!”

“아아악!”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있는 던전의 입구 쪽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난리가 나는 소리가 났다.

침입자가 있다는 뜻.

‘감히 어떤 놈이!’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곳은 그의 부하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그의 부하들 중 다수는 본래 세계에 남아 있고, 이곳에 있는 부하들은 그와 함께 이 괴상한 세계로 떨어진 녀석들이다.

그중 환공작 베라는 죽었지만, 그 못지 않은 능력을 가진 부하들이 다섯.

그 밑에 있는 녀석들은 이곳 세계에 와서 굴복시킨 괴물들이었다.

따라서 흑화 용사 아르데아나 혹은 용사 루니스라도 오지 않는 한 이곳이 무너질 염려는 없었다.

그 2명이야말로 이 분리된 세계에 있는 최강자들.

당연히 그들 중 누구도 이곳에 올 수 없었다.

아르데아는 피 그림자 지역을 벗어날 수 없고, 루니스는 재윤이라는 인간 옆에 붙어다니기 때문이다.

‘큭!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운도 더럽게 없는 녀석이군.’

하고 많은 던전 중에 하필 이곳을 발견해 들어왔다는 건가.

아마도 간 부은 인간 각성자 패거리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구슬을 아공간에 넣은 후 느긋하게 부하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래도 뭔가 떠들썩해야 할 던전이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부하들 중 단 하나도 그에게 와서 보고하는 이가 없었다.

‘이럴 수가! 누군가 벌써 이곳까지 들어왔다.’

여기는 그의 휘하에 있는 다섯 명의 강력한 부하들을 뚫어야만 올 수 있다.

그런데 입구에서 소리가 들리자마자 벌써 이 앞에 당도한 자가 있다니.

‘용사 루니스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설마 마왕 데사오라도 온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

마계에 있는 데사오는 아직 강림이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팟-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의 앞에 환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불명의 노인.

그런데 그로부터 피어나는 기세 앞에 데카투스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서, 설마?’

그를 본 순간 데카투스는 전신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노인이 슥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흐, 흑룡 데카투스입니다.”

데카투스의 음성이 떨렸다.

지금 나타난 노인이 혹시 그가 맞다면?

‘믿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봉인을 풀고 나온 건가?’

그렇다.

저 노인은 그가 최후의 발악을 위해 찾아갔던 그 동굴에 있어야 할 존재였다.

데카투스는 악몽을 꾸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듯 아무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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