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그는 대체 누구인가 (2) >
동굴을 나온 재윤은 귀룡 성으로 복귀해 곧바로 운명의 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루넬에게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혹시 그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 정도의 존재라면 두 명이 있어요.”
아루넬의 대답에 재윤은 놀랐다.
“두 명이라고요?”
“천마와 혈마입니다.”
순간 재윤은 놀랐다.
천마(天魔)와 혈마(血魔).
어느쪽이든 살벌하기 이를데 없는 이름들이었다.
“그 중 천마는 끔찍한 재앙입니다. 당신이 용사 루니스에게 들었던 그 고대의 전설적인 악마가 바로 천마이니까요. 반면에 혈마는 잠재된 재앙이에요.”
“잠재된 재앙이라면?”
“재앙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둘 중 당신이 만난 그 자가 누군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천마의 재앙은 아직 때가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당신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제마검에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천마가 기억을 잃은 상태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그가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아직 재앙이 아니니까요. 어떤 계기로든 기억을 되 찾는 순간이 그가 천마로서의 자신을 각성하는 때일 것이고, 그때부터 천마의 재앙이 세상을 덮치게 될 거예요.”
재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뒤바뀐 세상은 정말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마왕 데사오가 가장 무서운 존재라 여겼는데, 그런 마왕들이 마계에는 한둘이 아니고, 더구나 마왕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가 2명이나 존재할 줄이야.
게다가 그 중 1명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 이미 재앙 확정이라니!
“도대체 저의 힘으로 나중에 그 엄청난 재앙을 막아내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운명의 힘이 당신을 돕고 있어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답니다.”
아루넬도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기에는 적의 수준이 너무 강했으니까.
“그런데 혈마는 또 누구죠?”
“혈마는 천마와 대적하기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된 자라 했어요. 천마와 쌍벽을 이룰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악마로서의 길을 걷지는 않아요. 그러나 언제 재앙으로 변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어쨌든 악마의 능력을 가진 자니까요.”
천마와 대적하기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된 자라니!
재윤은 혹시 동굴 속의 노인이 혈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루넬의 말대로 천마가 기억을 잃고 있는 거라면?
섣불리 기억을 찾아줬다가는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천마로서의 자신을 각성한 순간 그 앞에 있는 재윤을 살려둘리 없을 테니까.
살고 싶다면 천마의 부하가 되어 재앙의 일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거야 말로 루니스가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가 혈마인지 천마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겠습니까? 만약 혈마라면 반드시 그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언젠가 천마가 나타날 때를 대비하려면 말이죠.”
재윤의 말에 아루넬이 끄덕였다.
“이 분리된 세계에 천마인지 혈마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잠들어 있다면 이곳 어딘가에 그 자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단서도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던전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특정한 누군가 그 비밀을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막막하네요.”
“운명의 힘은 당신을 도울 수 있을 뿐 모든 걸 다 알려줄 수는 없어요. 막막해도 최선을 다해보세요. 운명의 힘이 당신의 편인 것을 잊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재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명의 탑을 나왔다.
‘일단 괴물들을 찾아 해치우며 레벨부터 올리자. 아루넬의 말대로라면 그 과정에서 뭔가 단서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도시를 연결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 계속 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희망 성이 있는 세계로 왕복할 수 있는 게이트가 생겨난다고 했으니까.
* * *
한편 그때 마계의 마왕 데사오의 마궁(魔宮).
그녀는 소환진을 펼쳐 흑룡 데카투스를 몇 번이고 소환했지만 실패했다.
“아무리 날개 한쪽이 사라졌다고 해도 용이라 이건가. 그놈이 믿는 바가 있었군.”
데사오는 분통을 터뜨렸다.
괴상하게 변한 지구라는 세계로 지금 당장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당장 흑룡을 잡아 패대기치고 처참하게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흑룡을 마계로 소환하려 했는데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감히 나와의 연결 자체도 끊어버렸다.”
이는 흑룡 데카투스는 더 이상 그녀의 부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동안처럼 마음대로 그의 앞에 환영을 보내 명령을 내리거나 혹은 협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놈! 그렇다고 내가 네놈을 손볼 수 없다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망상이다.”
그래도 그녀는 고심에 빠져야 했다.
이곳 마궁에 있는 그녀와 최상급 마족 부하들은 아직 지구로 강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 흑룡이 있는 세계에 배치된 부하들의 힘만으로는 놈을 제거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른 분리된 세계를 담당하고 있는 부하 중 하나를 흑룡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콰아아아아!
잠시 후 그녀의 환영이 나타난 장소는 핏빛 그림자들이 사방으로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는 거대한 핏빛 그림자의 용오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데사오의 환영이 나타나자 그 용오름이 사라지더니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핏빛의 기운으로 가득한 그가 바로 천 년 전 라넨 대륙의 용사인 아르데아였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왔습니까, 마왕 데사오 님?”
“너는 이제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이동해라.”
그러자 아르데아가 의아한 듯 그녀를 노려봤다.
“저는 아직 이곳 세계를 피 그림자로 모두 뒤덮지 못했습니다만.”
“알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이 정도면 이곳 세계는 피 그림자에 거의 다 장악된 것이나 다름없다. 넌 흑룡 데카투스가 있는 세계로 이동해 놈을 처치하고 그곳을 피 그림자로 모두 뒤덮도록 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천 년 전에는 용사였지만 지금의 아르데아는 철저히 마왕 데사오의 하수인이 된 터였다.
따라서 그는 데사오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다.
아르데아는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그곳에도 이미 피 그림자가 일부 지역을 점령해둔 상태입니다. 이동이 쉽겠군요.”
“다만, 용사 루니스가 그곳에 있으니 조심해라. 루니스 옆에 있는 인간 놈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그러자 아르데아는 눈빛이 차가워졌다.
“루니스가 어디로 사라졌나 했는데 그곳에 있었군요. 이번에는 가서 끝장을 내도록 하지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다시 거대한 핏빛의 용오름으로 변했다.
그 용오름이 땅아래로 파고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분리된 다른 세계의 한곳에 위치한 피 그림자 지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 순간.
피 그림자에 둘러쌓인 한 조그만 숲.
건물을 제외하면 불과 10여미터 밖에 남지 않아 이제는 숲이라고 할 수도 없는 초라한 숲이었다.
그러나 마법사 로벨은 그 동안 사력을 다해 이 숲이 피 그림자의 재앙으로 점령당하지 않도록 지켜냈다.
함께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사실 얼마 전 재윤에게 얻은 대량의 식량 박스로 인해 식량 문제가 해결되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아르데아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로벨이 이 숲을 지금껏 지키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아르데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아르데아가 사라졌다면 더 이상 이 불편한 숲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루니스 님께 이 상황을 보고드리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아직도 건물 지하에 게이트는 남아 있었다.
이미 그 게이트가 어떤 곳으로 통하는지 로벨은 그간 알아냈다.
‘분리된 다른 세계로 통하는 게이트! 일단은 그곳을 통해 이동해 루니스 님이 있는 곳을 찾아야겠군.’
로벨은 사람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한 후 함께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 * *
한편 흑화 용사 아르데아가 나타나자 흑룡 데카투스는 단번에 그것을 눈치챘다.
그는 이미 이곳 세계에 위치한 피 그림자 점령 지역을 다 꿰고 있었기에 부하들을 보내 그곳을 모두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아르데아를 이곳으로 보냈군.”
데카투스는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여유로워보이는 미소와 달리 그의 속은 타들어갔다.
지금 상태에서 아르데아와 전투를 벌이면 그는 뼈도 못추릴 테니까.
더구나 마왕 데사오의 소환마법에 저항하느라 그의 마력은 대거 소진된 터였다.
마력을 빠르게 회복하고는 있지만 아르데아와 같은 강한 적에게 걸리면 도주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르데아는 피 그림자 지역 외에는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이곳으로 온 이상 피 그림자의 재앙이 숲을 순식간에 휩쓸 것은 당연한 일.
“으윽!"
그러던 데카투스는 돌연 몸을 떨었다.
갑자기 핏빛의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서 있는 바닥에 타원형의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나 번쩍이기 시작했다.
‘이건 소환진? 빌어먹을! 아르데아 놈이 소환 마법을?’
마왕 데사오가 그녀의 권능 중 하나를 아르데아에게 부여했음이 틀림없었다.
‘이딴 건 내게 통하지 않는다.’
데카투스는 소환진을 흩어버렸다.
마력이 많이 소모되어 강력한 본신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인간 남성의 모습으로 변해 비틀거렸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이 구슬의 주인을 깨워야 한다.’
데카투스는 손에 있는 구슬 하나를 꺼내쥔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아공간에 숨겨놓은 하나의 보물.
‘누구에게나 최후의 한 수는 있지. 마왕 데사오! 너는 내가 이 구슬을 우연히 얻었을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데카투스는 구슬을 보며 몸을 떨었다.
‘이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그를 깨우는 순간 그는 자칫 죽을 수도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그가 맞다면.
그냥 영원히 잠들었으면 하는 존재.
그가 깨어나는 것이 오히려 악몽일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도 데카투스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설령 그에게 죽더라도 깨워야 한다. 그의 성격이라면 마왕 데사오도 가만두지 않을 테지.’
데카투스의 모든 분노는 이제 마왕 데사오에게 향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마왕 데사오가 죽는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그는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스스.
잠시 후 그가 나타난 장소는 숲에 있는 한 지하 동굴.
구슬이 알려주는 위치를 따라 온 것이다.
그런데 동굴 안에 들어온 그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가 먼저 이곳에 들어왔다.’
폐쇄되어 있던 동굴의 입구가 열려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곳을 찾아낸 거냐?’
데카투스는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결계가 펼쳐져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
무슨 수를 써도 그 결계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가 저 안에 있는 게 분명한데.’
데카투스는 고심했다.
웬만한 특수 결계라 해도 그가 뚫지 못할 건 없었다.
‘이런 류의 것이라면 혹시?’
특정한 공간에 펼쳐진 인간들의 안전지대 보호막.
그와 거의 흡사했다.
물론 안전지대 보호막일 리는 없었다.
아마 어떤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두었을 것이다.
‘이 구슬을 가진 나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역시 지구의 각성자 놈들만 들어갈 수 있게 해놓은 게 분명하다.’
데카투스는 어이가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로서는 저 결계 안으로 들어가 구슬의 주인을 깨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놈이 왔었는지부터 확인해봐야겠군.’
곧바로 그는 마력을 끌어올려 동굴의 바닥에 쏟아부었다.
땅의 기억을 통하면 이곳에 누가 왔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추아악!
순간 바닥의 땅이 꿈틀거리더니 그 중 일부가 솟구쳐 올랐다.
그것들이 뭉쳐지며 뭔가로 변했다.
두 명의 인간과 고블린 하나.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데카투스의 안색이 세차게 일그러졌다.
‘용사 루니스와 그 인간 놈! 어찌 저들이!’
하필이면 저들이라는 말인가.
데카투스의 표정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 * *
재윤은 매일 한 개 씩의 도시를 연결했다.
그렇게 10여 일이 지나자 어느덧 20개의 도시를 연결한 도시 연맹의 맹주이자 이십성기(二十星旗)의 주인이 되었다.
적게는 천여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 넘는 도시들이 연결되고, 그 주변의 위협적인 던전이나 괴물들이 재윤에 의해 다수 제거되었다.
또한 마궁의 재앙 크시라의 죽음으로 도시들의 이면 공간에 존재하던 마인들의 위협도 사라졌다.
덕분에 재윤의 레벨은 계속 상승해 Lv75가 되었다.
이를 위해 재윤은 던전이란 던전은 다 찾아서 괴물들을 죽였다.
고블린 세붐을 시켜 던전 안을 구석까지 다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 동굴의 노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막막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찾아보면 언젠가 나오겠지.’
재윤은 다시 새로운 도시를 향해 이동하기 위해 귀룡의 위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귀룡의 앞에 나타났다.
‘저놈은?’
창백한 안색에 흑색 장발을 가진 미중년 사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재윤은 단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봤다.
흑룡 데카투스.
놈이 난데없이 재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