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아루넬의 부탁 (1) >
화가가각-
암흑검이 흑룡 데카투스의 목을 가르고 빠져나왔다.
그 순간 데카투스는 경악했다.
그 경악은 이내 두려움과 공포로 변했다.
방금 전 일격으로 그는 목이 거의 잘려나갈 뻔했으니까.
‘이, 이런!’
이 상태에서 루니스의 공격이 이어지면 도망갈 틈새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버러지같이 생각했던 인간 놈에 의해 이런 불의의 위기를 맞이하게 될 줄은 그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그가 공연히 암흑의 용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결계 세계의 지배자다.
최악의 위기가 닥쳐오자 그는 곧바로 결계를 파괴했다.
그 순간 공간이 조각조각 분리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여파에 그 역시 그 분리된 공간과 함께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날아갔다.
“으윽! 이건 또 뭐야?”
재윤도 당황했다.
암흑검으로 데카투스의 목을 베었다 생각한 순간 갑자기 사방이 캄감해지더니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날려가고 있었다.
그 기운은 그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주변을 휘돌던 암흑의 폭풍이 점차 걷혔다.
‘여기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숲.
베르타도 루니스도 보이지 않았다.
루니스야 그렇다치고, 사실상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코인 나무 베르타까지 사라지다니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레벨이 그대로네.’
여전히 Lv64.
결국 흑룡 데카투스는 아까의 공격에 죽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용을 죽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요행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놈이 어떤 식으로든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갑자기 공간이 분리되어 흩어지는 듯 난리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일단 생명력 회복부터 하자.’
재윤은 지금 만신창이 상태였다.
아까 흑룡을 처치하겠다고 생명력을 20% 이하까지 떨어뜨렸으니까.
전쟁신의 투혼이 발휘되어 공격력은 증가했지만, 이대로두면 출혈이 지속되어 생명력은 계속 하락하고 말 것이다.
벌컥! 벌컥!
물약을 들이키자 생명력이 빠르게 차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곧바로 광혈의 막(Lv10)을 두르려 했지만 능력이 펼쳐지지 않았다.
‘광혈의 막!’
[광혈의 막을 펼칠 수 없습니다.]
설마 파투스가 0인 상태인 건가?
아니면 흡혈귀의 혈액이 1병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둘 다 아니었다.
【생명력] 642/1730
【파투스】 196/208
【혈액병 인벤토리】
-흡혈귀의 피 (희귀) 384병
상태창을 살펴보니 파투스는 물론이고 흡혈귀의 피도 충분했다.
‘이상해. 왜 광혈의 막이 펼쳐지지 않는 거야?’
재윤은 혹시나 싶어 암흑검에 검기(Lv10)를 주입해봤다.
[검기를 펼칠 수 없습니다.]
‘이런!’
광혈의 막에 이어 검기까지!
‘질풍 이동! 바람 이동! 혈광파!’
혹시나 싶어 다른 전투 능력도 모두 펼쳐봤지만.
[질풍 이동을 펼칠 수 없습니다.]
[바람 이동을 펼칠 수 없습니다.]
[혈광파를 펼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투스는 충분한데 전투 능력과 극 전투 능력 시전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가 대체 어디기에?’
여전히 안전지대 관리자들과 관리자 통신이 불가능했다.
흑룡의 결계에서 또 어디로 이동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심지어 운명의 나침반의 방향도 나오지 않았다.
나침반을 귀룡의 몸에 박아두었지만, 그 후로 상태창을 통해 그는 언제든 자침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태창에서 자침이 표시되지 않았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그런데 그때.
《 나는 건재하니 안심하라, 주인. 》
다름아닌 귀룡이었다.
《 귀룡! 지금 위치는? 》
재윤이 묻자 곧바로 그의 앞에 거대한 귀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
귀룡의 등에는 안전지대가 펼쳐져 있고, 또한 그 안에 올려놓은 3층 건물도 건재했다.
《 내 뒤를 따라온 건가? 》
《 당신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자동으로 소환 해제되어 아공간에 있었다. 》
그런 거였나.
어쨌든 귀룡이 건재하니 다행이긴 했다.
《 베르타와 루니스는? 》
《 그들 또한 조각난 결계의 여파로 알 수 없는 지점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들의 위치는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
재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룡도 알 수 없다면 그로서는 더더욱 그들의 위치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모두 무사하길 바랄 뿐.
《 나침반의 자침이 보이지 않는데? 》
《 그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다. 이런 경우는 당신이 지시하는 대로 나는 움직일 뿐이다. 》
귀룡 또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재윤이 모든 걸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또 내가 해야할 일이 있는 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동해 나침반이 작동할 수 없게 된 건가.
【생명력] 1730/1730
【파투스】 208/208
그렇게 잠시 귀룡의 안전지대 안에 앉아 있으니 생명력과 파투스가 완전히 회복됐다.
그러나 전투 능력이 펼쳐지지 않는 건 여전했다.
상황이 막막했다.
재윤은 안전지대 내부 건물 1층 소파에 잠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일단 이 근처를 탐색해봐야겠지.’
어떻게든 다시 나침반의 자침이 나타나도록 뭔가 문제를 해결해야 하리라.
그러던 그는 정신적 피로감이 엄습해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깜빡 잠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여기는?’
다름 아닌 마족 드로시아의 방.
그의 앞에는 신비한 자줏빛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 마족 드로시아가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서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또한 많이 지쳤을 테지.”
그녀는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마왕 데사오 님의 마력구. 그것만 돌려줘. 그러면 더 이상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닥치고 꺼져라.”
“어리석구나.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단다. 너 혼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드로시아가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재윤에게 입맞춤을 해왔다.
다시 또 그녀의 무서운 유혹이 시작되려는 순간.
재윤은 초인적인 의지로 눈을 번쩍 떴다.
'으!'
거실의 소파에서 깜빡 잠들었기에 가능한 일.
만약 본격적으로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면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드로시아에게 넘어가 모든 걸 넘겨주고 나서야 눈을 떴을 테니까.
꿈이니 그러려니 할 게 아니다.
꿈속에서 드로시아에게 마력구를 넘겨주는 순간 아공간에 있는 마력구가 실제로 넘어간다.
그건 본능적인 직감.
물론 기우일 수도 있지만 그 사실을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잠을 자면 안 된다.’
이제 옆에 루니스도 베르타도 없다.
귀룡은 이런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혼자서 꿈에서 깨어날 수는 없는 일.
결국 방법은 하나 뿐이다.
잠을 안 자는 것 !
그리고 괴물들을 죽도록 사냥해 레벨 70을 달성한 후 마왕의 마력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잠을 안 자고 버틸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불가사의한 체력 스탯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잠을 안 자고 계속 버텨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러나 이제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 * *
잠시 후 재윤은 안전지대에서 나왔다.
동시에 귀룡을 소환 해제했다.
아무도 없는데 굳이 이곳에 코인을 소모해 안전지대를 유지시킬 필요가 없는 일.
어디서든 휴식이 필요하면 그곳에서 귀룡을 소환하면 될 것이다.
‘파투스 전투 능력을 쓸 수 없지만 그렇다고 괴물 사냥을 못하는 건 아니지.’
【스탯】
근력 60
체력 43
민첩 61
지능 50
막강한 스탯 효과는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또한 특화 능력인 전쟁신의 검술(Lv64)도 마찬가지.
암흑검을 쥐고 한 놈 한 놈 처치하면 경험치를 얻어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쉬잉-!
그런데 그때 뭔가가 재윤을 향해 날아왔다.
창이었다.
길이가 짧은 단창!
누군가 재윤을 노리고 그것을 던진 것이다.
카앙!
재윤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그것을 쳐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뻘건 불덩이가 날아왔다.
‘마법?’
각성자들이 펼치는 화염구인데 그 크기가 엄청났다.
재윤은 빠르게 옆으로 이동해 피했다.
콰아앙! 화르르르!
재윤이 서있던 곳에 화염이 폭발하며 일대가 시뻘건 불에 뒤덮였다.
“투창에 화염폭까지 피하다니!”
“보통 놈이 아니다.”
“모두 한꺼번에 덤벼!”
그 순간 수풀을 헤치고 다섯 명의 사람이 재윤을 향해 돌진해왔다.
그 중 덩치가 좋은 사내가 던진 도끼가 재윤을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캉!
재윤은 가볍게 쳐낸 후 그들을 노려봤다.
“당신들은 누군데 다짜고짜 날 공격하는 거지?”
그러자 그 중 하나가 큭 웃었다.
“사냥감 주제에 제법 세보이잖아.”
“죽이면 경험치가 제법 될 거야.”
“다른 놈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서두르자!”
건장한 체격의 백인 2명과 흑인 3명.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마치 자동 통역을 하듯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거야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뒤바뀐 세상에서는 이세계에서 온 사람들과도 자동으로 말이 통하니까.
그런데 이들은 재윤을 보자마자 말도 없이 기습을 날렸다.
재윤이 피하자 더욱 과감하게 공격해왔다.
그 수법도 매우 악랄했다.
달려오며 재윤을 향해 작은 열매 크기의 뭔가를 던졌는데 그것은 독탄(毒彈)이었다.
검으로 쳐내는 순간 폭발하며 독에 중독되게 만드는 무서운 암기.
물론 재윤은 높은 독 저항을 가진 덕분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웬만한 사람은 즉시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상적인 인간들이 아니다.’
눈빛에서 검은 기운이 감돌았다.
이전에 빙의인간과 비슷했지만 그와 비할 수 없이 강한 기세.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인정사정 봐줄 필요가 없다.
재윤은 그대로 돌진해 자신에게 독탄을 던진 백인 여자의 목을 검으로 갈랐다.
이어서 화염 마법을 날린 흑인 남자의 가슴을 베었고, 방패와 도끼를 쥔 백인 남자의 목을 찔렀다.
“으아악!”
“크아아악!”
“아악!”
순식간에 3명이 쓰러졌다.
“크아악!”
그리고 다시 또 한 명이 창을 휘두르려다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마인에 대한 E급 지식을 얻었습니다.]
코인이나 다른 드롭템은 없었다.
다만 지식을 얻었다.
* 마인(魔人)
-획득 지식 등급 : E
-마인에게 주는 피해 5% 증가
‘마인?’
빙의인간이 아닌 마인으로 분류되는 자들이었다.
재윤은 마지막 남겨놓은 흑인 남성의 목에 암흑검을 가져다댔다.
“너희들은 뭐냐?”
“쉣! 더럽게 걸렸네. 어서 죽여.”
흑인 남성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냥 좀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
죽음이 처음이 아니라 꽤 많이 겪어본 듯한 표정.
‘정말 정상이 아닌 놈들이네.’
재윤은 더 물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 생각에 곧바로 그의 가슴을 베어버렸다.
“으아악!”
그렇게 다섯 명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이내 그대로 환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타앙!
바로 그 순간 재윤을 향해 총알이 날아들었다.
멀리서 재윤의 머리를 조준하고 쏜 총알!
‘총까지?’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무리 날쎄도 총알을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미리 예측해서 몸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정확히 조준해 발사된 총알을 말이다.
그러나 재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비록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투스를 소모하는 전투 능력을 펼치지는 못하지만 그의 스탯은 인간의 한계를 몇 번은 초월한 상태. 그래서 그는 고개를 살짝 흔드는 것만으로 총알을 피해버렸다.
탕! 타앙! 타타타-
그러자 곧바로 총알이 무더기로 날아들었다.
재윤은 번개처럼 근처의 바위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여긴 대체 뭐지?’
설마 파투스 무기로 총을 만든 자가 있는 건가?
아니면 드롭템으로 얻은 장비일까?
그러나 지금껏 만난 각성자들 중 총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무슨 상관인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마인들임을 알게 된 이상 공격을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까.
투타타타! 타타탕!
총알을 피하는 재윤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빠르면서도 그림자처럼 묘연했다.
멀리서 재윤에게 계속 사격을 하던 이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뒤쪽에 재윤이 나타나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끝이었다.
촥! 촤악!
“크아악!”
“아아아악!”
두 명의 남자가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그들이 쥐고 있던 소총들도 함께 연기로 변했다.
[마인에 대한 D급 지식을 얻었습니다.]
드롭템도 없고 코인 획득도 없지만 지식 등급은 올랐다.
그리고 그때 다시 들리는 알림.
[운명의 탑 아루넬이 당신을 찾습니다.]
[가장 가까운 운명의 탑에 들러 주세요.]
그와 함께 재윤의 앞에 마치 길잡이를 하듯 환한 빛무리가 숲의 한쪽으로 길게 이어져 나타났다.
‘저 빛무리를 따라가면 운명의 탑이 있나 보군.’
아루넬이 무엇 때문에 찾는 지는 모르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재윤은 빛무리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300여 미터 정도 이동하자 안개가 자욱한 지대가 나타났다.
그 안으로 진입하자 낯익은 탑형 건물 하나가 보였다.
운명의 탑이었다.
재윤은 즉각 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각성자님. 다행히 운명의 힘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어 주었군요.”
항상 여유있는 미소를 흘리며 반겨주던 아루넬이 무슨 일인지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