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피 그림자의 천적 (1) >
철문이 열리고 드러난 공간.
강당처럼 거대한 규모의 밀실이었다.
그 밀실의 중앙에는 높이 4미터 정도되는 한 석상이 서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수많은 뱀으로 이루어져 있는 끔찍한 여성의 형상이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와 같은 모습.
‘재앙이 있다고 하더니 혹시 저 석상을 말하는 건가?’
확실히 석상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지긴 했다.
“주인님, 왠지 기분 나쁜 석상이군요. 제가 가서 저것을 부수겠습니다.”
제칸이 충성심을 발휘해 석상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누군가 재윤을 불렀다.
“잠깐만요. 절대 저 석상의 눈을 보면 안 돼요!”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재윤이 살려줬던 인면지주 소녀였다.
겁에 질려 도망칠 때와 달리 지금 그것의 얼굴은 뭔가 다급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재윤이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석상의 두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고 그것과 눈이 마주친 제칸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굳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제칸이 그 모습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저런!’
천만다행인 것은 제칸이 라이칸슬로프 상태로 재윤의 정면에서 석상을 가로막고 있어 재윤은 그가 돌이 되는 모습만 봤을 뿐, 석상의 눈빛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석상이 생기를 띠고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재윤을 노려봤지만, 그때는 재윤이 본능적으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밖으로 돌린 후였다.
이 모든 건 인면지주 소녀가 적시에 재윤에게 경고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인면지주 소녀는 부득이하게 석상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고, 그녀 역시 그 상태로 돌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타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다, 인간. 이런 것도 내가 예측했으면 미리 알려줬을 텐데 말이야.”
베르타는 재앙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저런 끔찍한 석상이 있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저 괴물 석상을 파괴하면 제칸과 저 인면지주의 석화도 풀릴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그대가 눈을 감고 싸워 이겨야 하겠지만.”
“걱정마라. 그런 건 자신 있어.”
재윤은 눈을 감은 그대로 밀실 안에 성큼 성큼 들어갔다.
오른 손에 암흑검을 쥔 그대로 밀실 안에 들어선 그의 움직임만 보면 눈을 감지 않은 듯 자연스러워보였다.
그것은 재윤의 높은 민첩 스탯과 전쟁신의 검술(Lv48)이 주는 초인적인 감각 때문이었다.
즉, 재윤은 유사시 눈을 감은 상태로도 적과 무리없이 전투를 벌일 정도로 기감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검기파!’
돌이 된 제칸을 지나자마자 재윤은 중앙의 석상을 향해 검기파를 정확히 쏘아 보냈다.
그러자 석상이 방패 형상의 막을 소환해 그것을 막았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석상은 움찔 한 걸음 물러났다.
곧바로 손에서 방패의 막이 사라지더니 거대한 양손 대검이 석상의 손에 나타났다.
석상은 그것을 사납게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휭! 휘휭!
대검에서 검붉은 오러가 번쩍였다.
섬뜩할 정도로 빠른 동작에 대검이 지나갈 때마다 공간이 갈리는 것 같았다.
캉! 카앙!
그러나 재윤은 가볍게 암흑검을 들어 대검의 공격을 방어해냈다.
청각으로 석상의 움직임을 간파한 것이 아니다.
그냥 전쟁신의 검술이 알아서 공격을 방어하는 것일 뿐.
그리고 공격과 동시에 반격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카캉! 촥!
암흑검이 번쩍이는 순간 대검이 튕겨올랐고 그것을 쥔 석상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연이어 번개처럼 도약한 재윤의 암흑검이 수평으로 선을 그렸다.
콰가각!
석상의 목이 잘려나가 바닥을 굴렀다.
이 모든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러나 재윤은 이 정도로 재앙이 파괴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석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강력했으니까.
츠츠츠!
아니나 다를까, 목이 잘린 석상이 그대로 먼지로 변해 흩어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시커먼 구름의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감히 나 제므라의 석상을 파괴하다니 겁이 없구나! 이 금지된 장소에 들어왔으니 대가를 치르리라.”
소름끼치는 음성과 함께 생겨난 것은 다름 아닌 환영체였다.
방금 전 파괴한 석상과 동일한 형상이지만 그것이 환영의 형태로 거대해져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환영인가?’
재윤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제므라라고 스스로를 말한 환영의 형상은 정확히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전쟁신의 강림(Lv5)이 자동 발동되었다.
스스스.
재사용 시간의 적용은 성에서 재윤의 의지로 환영을 만들어낼 때에 한한다.
지금처럼 초월적 존재가 환상 공격을 걸어올 때는 재사용 시간과 상관없이 전쟁신의 환영이 자동 생성되어 방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기세를 보니 어제 그놈보다는 약한 것 같은데?’
제므라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간 싸웠던 환영들과 비춰볼 때 마족 케사르나보다는 강하지만 마족 슈테나보다는 약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제므라는 전쟁신의 환영 모습으로 나타난 재윤을 보며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이 어찌 그 모습을?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얻었구나. 과연 그런다고 내게 통할 것 같은가?”
“통할지 안통하는지 겪어보면 되겠지.”
재윤은 그 말과 함께 제므라에게 돌진했다.
긴 말이 필요없다.
이 환영 전투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순식간에 제므라 앞으로 이동한 재윤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제므라 또한 방패와 검을 이용해 맞서왔다.
방패로 검을 쳐내고 그 틈을 이용해 반격을 가하는 동작이 매섭기 이를데 없었지만, 재윤의 공격은 제므라의 허점을 계속 파고 들었다.
팍! 푸확!
시간이 지날수록 제므라의 몸에 연속으로 상처가 생겨났다.
전투는 재윤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40레벨 재앙에 맞게 성주 명성 5레벨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쿠윽! 미련한 짓을 하는구나, 인간. 내가 지키는 이것은 인간인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다.”
“헛소리하지 말고 그만 죽어라.”
그냥 파괴되면 끝날 일인데 무슨 물건이 어쩌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재윤은 굳이 제므라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무슨 괴상한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는 일.
파괴 가능한 재앙이라면 단 1초도 지체없이 최대한 빨리 박살내는 것이 현명한 일인 것이다.
푹! 푸확! 촤아악-
결국 재윤의 검에 제므라의 두 팔이 잘려나가더니 이어서 어깨부터 허리까지 사선으로 동강났다.
그것이 끝이었다.
“끄아아아악!”
제므라의 환영체는 먼지로 변해 흩어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밀실 안에 가득했던 음침해던 기운도 그대로 소멸되었다.
[당신은 재앙을 파괴했습니다.]
[명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당시의 명성이 Lv7이 되었습니다.]
명성이 상승했다는 알림을 듣고 나서야 재윤은 비로소 재앙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명성이 상승하는 순간 환영의 힘이 대폭 강해졌음도 느꼈다.
스스스.
그런 느낌은 아주 잠깐일 뿐.
환영은 이내 소멸되며 재윤은 본신으로 돌아왔다.
[성주로서의 명성이 크게 올라 당신 소유 안전 지대의 단계가 일제히 상승합니다.]
[안전 지대 희망 성이 3단계(★)에서 3단계(★★★)가 되었습니다.]
[안전 지대 기적이 3단계(★)에서 3단계(★★★)가 되었습니다.]
[안전 지대 혜미가 2단계(★)에서 2단계(★★★)가 되었습니다.]
각 안전 지대의 단계가 모두 상승했다.
여명, 생존, 새벽도 혜미와 동일한 2단계 3성 단계였다.
그로인해 수용 가능 인원이 대폭 늘어났다.
오르도를 비롯한 각 안전 지대 관리자들이 즉각 통신을 보내오며 재윤이 재앙을 파괴해 명성 레벨이 상승한 것을 축하해줬다.
특히 희망 성 관리자 오르도는 너무도 기뻐했다.
《 성주님! 정말 축하드려요! 드디어 명성 Lv7이 되셨네요. 》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재앙을 발견해 파괴할 수 있었어. 성에는 별일 없지? 》
《 네, 성주님께서 명성을 올려주신 덕분에 희망 성은 더욱 안전한 장소가 됐어요. 》
《 좋아! 그곳을 잘 부탁해. 》재윤은 간략하게 오르도와의 통신을 마쳤다.
그 사이 밀실 안을 흐르던 음침한 기운은 사라졌다.
석화의 저주에 걸렸던 제칸은 물론이고 인면지주 소녀도 멀쩡하게 돌아왔다.
‘웬 상자가?’
재앙을 파괴한 장소에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열어보니 신비롭게 반짝이는 소검(小劍)이 나왔다.
* 아르데아의 의지
-분류 : 보물
-설명 : 흑화(黑化)한 용사 아르데아가 흑화 전 자신의 의지를 봉인해둔 물건이다. 오직 이 검으로만 흑화한 용사 아르데아를 소멸시킬 수 있다.
-사용 제한 : Lv85
‘이건 또 뭐지?’
재윤은 왠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흑화한 용사 아르데아란 자를 소멸시킬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다.
문제는 왜 Lv85 제한이냐는 것.
‘설마 이것도 재앙과 관계된 물건인가?’
물론 이 물건 자체는 절대 재앙은 아니었다.
재앙이라면 분류에 보물이 아닌 재앙이라고 적혀 있어야 했을 테니까.
다만, 이 물건으로 소멸시켜야 할 대상인 흑화한 용사 아르데아라는 존재가 바로 재앙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아! 왜 또 이런 게 내 손에 들어와?’
70레벨 재앙인 마왕의 마력구도 지금 감당이 안 되는 판에 85레벨 재앙과 관련된 물건이 손에 들어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그러다 돌연 고개를 돌려 인면지주 소녀를 노려봤다.
“너 정체가 뭐지?”
그렇지 않아도 인면지주 소녀가 처음부터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다.
보스 급 괴물도 아닌데 말이 통했으니까.
그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이곳 세상에서는 워낙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지니까.
하지만 그렇게 사라졌던 인면지주 소녀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 석화의 저주를 알려준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아까 살려줬다고 은혜를 갚겠다는 것도 아닐 테고.
“정체를 속여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역시나 인면지주 소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인면지주가 아닌 인간 소녀의 모습.
나이는 10대 후반 아니면 20대 초반?
눈빛은 매우 맑았고 동시에 강인해 보였다.
한 눈에 봐도 절대 평범해 보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저는 라넨 대륙의 용사 아르데아님의 기사 세렌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재윤 앞에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르데아 님은 라넨 대륙을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대륙은 그 분을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분의 모든 것을 다 파괴했죠. 그로 인해 상심한 그 분을 악마가 유혹해 흑화하게 만들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세렌이라고 하는 소녀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 재윤은 잠시 침묵한 채로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르데아 님은 그렇게 흑화하여 재앙의 근원이 되셨죠. 그 재앙이 바로 피 그림자입니다.”
“피 그림자?”
“그렇습니다. 피 그림자는 파멸의 재앙입니다. 그 재앙은 점점 더 확산될 것이고 특별한 힘이 아니면 절대 저항할 수 없습니다. 흑화한 아드레아 님을 그대로 두면 세상은 피 그림자로 뒤덮여 완전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황당한 얘기였지만 재윤은 비로소 피 그림자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라넨 대륙의 용사란 자가 흑화되어 만들어낸 재앙!
그게 바로 피 그림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 용사의 기사 세렌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저는 진작 죽어 없어졌어야 할 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금단의 마법으로 지금껏 버티고 있었습니다.”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솔직히 당신이 누군지는 저도 모릅니다. 악마의 부하 제므라가 지키고 있는 아드레아 님의 의지를 되찾을 자를 기다리고 있었죠.”
“이 검을 말하는 겁니까?”
재윤이 신비한 빛이 나는 검을 들어보이자 세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직 그 검이 가진 기운만이 흑화한 아드레아 님이 만들어낸 피 그림자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인면지주와 미노타우루스들이 피 그림자의 천적이 아니었나요?”
재윤이 묻자 세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본래 그것들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것들이 그같은 힘을 가진 건 그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 때문이었죠. 비록 이곳 밀실 안에 숨겨져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 검이 기운의 일부를 이곳 지하 세계에 발출했고, 그로인해 이곳에 살고 있던 인면지주들과 미노타우루스들이 피 그림자에 대항하는 기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열쇠도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듣고 보니 더욱 황당한 얘기였다.
재윤은 그 덕분에 인면지주와 미노타우루스들을 처치하고 관련 지식 효과로 피 그림자 저항력과 공격 능력까지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건 물론 아드레아 님의 의지가 벌인 일이었습니다. 비록 흑화된 상태이지만 그 분은 누군가 그 검을 가지고 와서 자신을 소멸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죠.”
누군가 대왕 인면지주와 미노타우루스 로드를 처치하면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자연스레 이곳으로 들어와 악마의 부하인 제므라를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소검을 얻게 된다.
이것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아드리아 의지가 안배한 일이었다는 얘기였다.
“그럼 아까 당신이 저를 미노타우루스들에게 안내해준 이유가 바로?”
“짐작대로입니다. 미노타우루스들을 처치해야 당신이 또 하나의 열쇠를 얻을 수 있어서 제가 인면지주로 변신해 알려드렸어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그러니까 결론은 저보고 그 흑화한 용사를 없애달라는 말이군요.”
“부탁합니다. 천 년도 넘는 이 불행한 재앙을 종식시킬 분은 아드레아 님의 의지를 얻은 당신 뿐입니다.”
“천 년이라고요?”
“라넨 대륙에서 천 년도 이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케렌의 모습은 그 사이 더욱 흐릿해졌다.
“이제 그만 이 불행하면서도 끔찍한 재앙을 종식시켜 주시길 부탁합니다. 부디 아드레아 님께 영원한 안식을……"
그 말을 마치지 못하고 세렌은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