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반격 (3) >
“데라칸이 죽었습니다!”
“코볼트 두목 쿨둔도 죽었습니다!”
오크 로드 투르보는 선두 쪽에 적의 습격이 있다는 소란을 듣자마자 즉각 달려왔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오크 지휘관 하나가 죽었다.
그뿐이 아니다.
흑주술을 통해 엘프 마을의 위치를 안내해야 할 코볼트 두목 쿨둔도 죽었다.
“크으윽! 찢어죽일 인간 놈!”
그는 분통이 터졌지만 도무지 그 인간 놈을 쫓을 방법이 없었다.
짙은 안개로 시야 거리가 너무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냄새도 금방 없애버린다.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종적이 묘연해져 버리니 문제였다.
“역시나 엘프들이 그놈을 돕고 있습니다, 로드.”
“이런 안개 속에서 정확히 습격을 해오는 건 엘프들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최대한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로드. 여기 있다간 피해만 계속 늘어날 겁니다.”
이 안에 있다간 모두가 방금 죽은 데라칸처럼 각개격파 당하고 말 것이다.
투르보 역시 그 심각성을 깨달았다.
엘프 소굴을 찾겠다고 이 안개 지역에 들어온 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그 소굴을 찾기나 했으면 이렇게 분통이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코볼트 쿨둔 놈이 죽은 이상 엘프 소굴을 찾기는 쉽지 않아졌다. 모두 돌아간다.”
“예! 로드!”
“흩어지지 마라! 지휘관들은 모두 내 근처에 모여 있도록 해라!”
그렇게 투르보의 오크 부대는 철수를 시작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아, 앞쪽에 인간 놈의 습격입니다, 로드!”
“뒤쪽에 고블린 놈이 나타났습니다!”
투르보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대열의 중간쯤에서 모여 있다보니 그들이 없는 선열과 후열을 동시에 공격해온 것이다.
“분산되지마라! 우선 앞쪽부터 간다!”
그러나 투르보가 갔을 때는 오크 병사들의 처참한 주검들만 널브러져 있었다.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다. 모두 전력을 다해 안개 지역을 벗어나라! 지휘관들은 절대 흩어지지 마라!”
“예, 로드!”
투르보는 오크 병사들이 죽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지휘관들을 더 이상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들을 철저히 자신 주변에 위치시켰다.
‘그놈이 나타나면 나 혼자의 능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
그때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전신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오크 지휘관들과 합공을 해야만 놈을 이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습격은 계속 이어졌다.
오크 병사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상대는 이 안개 속을 손바닥 보듯 하고 있지만, 투르보를 비롯한 오크들은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보니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투르보와 그의 부하들이 안개 지역을 벗어났을 때 살아남은 오크 병사들은 불과 일 백도 되지 않았다.
수백이 넘는 오크 병사들이 안개 지역에서 뼈를 묻은 것이다.
“쿠아아아아! 이 찢어죽일 인간 놈!”
병력 현황을 파악한 투르보는 미쳐 죽을 지경이었다.
‘흑주술 따위를 믿고 그 안개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엘프 소굴을 찾겠다고 코볼트 쿨둔을 따라 안개 지역으로 들어가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그로인해 그는 많은 부하들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데라칸을 제외하고는 지휘관들은 죽지 않았다는 것.
아직 8명의 지휘관이 건재했다.
그때 오크 지휘관 루다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로드! 병사들이 죽은 건 안타깝지만 코볼트 놈들로 대체할 수 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놈들의 전투력이 고블린들 못지 않습니다. 아쉬운 대로 물량 공세는 펼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로드! 정면으로 붙으면 우리가 우세합니다. 그 인간 놈의 기습에만 당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조건 이깁니다.”
지휘관들의 말에 투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코볼트 놈들을 식량으로 쓰기는 아깝지. 놈들을 선봉에 세워 우리 오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킬 것이다. 또한 작전도 바꿀 것이다.”
“환상 전투를 걸어 그놈들의 안전지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드?”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투르보 또한 환상 전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도 아닌 그런 환상 전투 따위는 그의 직성에 맞지 않았다.
이겨봤자 상대가 안전 지대 내에 처박혀 있으면 죽일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안전 지대를 약하게 만들 수 있으니 장기적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데는 나쁘지 않았다.
‘인간 놈! 더 이상 네놈의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 안전 지대가 무력화되면 그때 두고보자!’
굳이 그런 걸 동원하지 않아도 빠르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투르보는 부하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이동하며 주변을 샅샅이 경계해라! 그놈들의 흔적이 느껴지면 즉각 포위해서 죽일 것이다.”
이쪽도 안개가 피어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시야거리가 매우 넓은 편이다.
적들이 어느 쪽이든 습격해오면 먼저 알 수 있으니 아까처럼 당할 우려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즉각 반격해서 해치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투르보는 한 번이라도 재윤이 또 나타나 공격해오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안전 지대가 있는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
* * *
한편 재윤은 오크들이 짙은 안개 지역을 벗어난 후부터는 더 이상 그들을 쫒지 않았다.
기습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습을 당할 우려가 있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서다.
따라서 세붐과 함께 짙은 안개 지역 곳곳에 있는 드롭템들을 챙겼다.
오크들이 쓰러지며 적지 않은 아이템들이 떨어졌지만, 습격하는 와중이라 그런 걸 주울 틈은 없었다.
그럴 시간이면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했으니 말이다.
“저쪽에도 있네요, 군주님.”
“오! 고마워.”
그런데 안개가 짙다보니 드롭템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냥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체들은 그 사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드롭템들은 다행이 남아 있었는데, 여기에 엘프 로사엔이 또 큰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할 일이죠.”
“그래도 넌 내 부하도 아닌데 너무 부려먹는 것 같잖아.”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로사엔은 재윤이 안개 속에서 벌인 활약을 보고는 존경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위치를 알려줬다 하지만 재윤이 설마 고블린 세붐만을 데리고 오크 대군을 격파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신 분. 저 분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죽었을 거야.’
그녀에게 있어 재윤은 단순한 동맹의 군주가 아니었다.
엘프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인 것이다.
재윤이 아니었다면 엘프들의 힘만으로는 오크들을 상대하기 불가능했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쯤 그녀뿐 아니라 엘프 모두가 오크들의 푸짐한 식사거리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엘프들은 생명의 은인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친다.
로사엔 또한 재윤을 돕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여기 물약이에요.”
“수고했어.”
“그럼 또 저쪽에 다녀올게요.”
그녀는 바쁘게 움직이며 드롭템들을 주워다 재윤에게 바쳤다.
세붐 또한 그녀의 뒤를 따르며 부지런하게 드롭템들을 주워왔다.
덕분에 재윤은 느긋하게 있다가 세붐과 로사엔이 가져온 드롭템들을 아공간에 넣기만 했다.
사실 지금 그는 여러모로 뿌듯한 마음이었다.
‘로사엔 덕분에 뜻밖의 대승을 거뒀다.’
설마 오늘 오크 병사 수백 마리를 죽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처음 기습 작전을 떠올렸을 때는 그저 흑주술을 펼친다는 코볼트를 해치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기습을 해보니 안개 속의 기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약간의 피해를 줄 수 있으리라고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덕분에 현재 레벨은 33.
아까 크로거 군장 아르툼을 죽이고 레벨이 31로 올랐는데, 이곳에서 다시 2단계나 더 오른 것이다.
이는 오크 120마리를 죽이는 토벌 임무(B)를 무려 4번이나 완수했기에 가능한 일.
오크들의 전투력이 높다보니 토벌 임무의 보상도 좀비나 흡혈귀에 비할 수 없이 높았다.
오크 120마리를 죽일 때마다 2500코인이 보상으로 들어왔다.
임무 보상으로 받은 코인만 1만 코인이 넘었다.
그뿐이 아니다.
각 임무 완수 때마다 중급 운명의 상자가 2개씩 나왔다.
그러다 보니 아까 크로거 토벌 임무를 완수하고 얻은 것과 합쳐 무려 9개나 되는 중급 운명의 상자를 오늘 획득한 것이다.
거기서 나온 코인이 모두 합쳐 7200코인.
능력 강화석이 14개.
나머지는 모두 물약이었다.
그리고도 아직 두 개의 상자가 남았다.
오크 지휘관의 물약 상자 1
크로거 군장의 상자 1
물약 상자에서는 1000코인과 중급 생명력 회복 물약 5병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크로거 군장의 상자를 열어보니.
[중급 파투스 회복 물약 3병을 얻었습니다.]
[크로거 군장의 천막(전설)을 얻었습니다.]
‘천막? 이건 뭐지?’
그런데 무려 전설 3성 등급이었다.
대체 무슨 기능이 있기에 천막이 전설 등급인 것일까?
* 크로거 군장의 천막
-등급 : 전설(★★★)
-분류 : 파투스 도구
-설치 시 천막과 주변 반경 5미터 안전 지대 보호막 생성
-효과 : 천막 내 파투스 및 생명력 자연 회복
-수용 인원 : 5명
-지속 시간 : 4시간
-설치 시간 : 3분, 자동 설치 중 공격받으면 취소됨.
-재사용 시간 : 천막 철수 시점부터 12시간 후 재설치 가능
-설치 제한:Lv25
‘오! 이건?’
놀랍게도 안전 지대 효과가 있었다.
이 천막만 있으면 어디서든 4시간 동안 안전 지대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밤늦게 사냥을 하다가 안전 지대 복귀가 늦어질 경우 이 천막을 펼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뜻.
‘잘됐어. 이게 있으면 어디서든 안심하고 쉴 수 있다.’
4시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재윤으로서는 적당한 수면과 휴식은 물론이고 식사도 느긋하게 할만한 시간이니까.
천막은 잘 접혀 있어 커다란 배낭 정도 크기였다.
곧바로 그것을 아공간에 보관했다.
그밖에 소득이 있다면 코볼트 족장 쿨둔을 죽이고 단번에 C급 지식을 획득한 것 정도다.
놈은 흑주술 정도만 펼칠 줄 알지 전투력은 오크 지휘관들에 비할 수 없이 약했다.
그래도 단번에 C급을 주는 걸 보면 코볼트들 중에서는 제법 강한 모양이었다.
그때 로사엔이 다가와 말했다.
“지금 르티아 님께서 오시고 계십니다.”
“이곳으로?”
“네."
잠시 후 안개를 헤치고 엘프들이 나타났다.
두 명의 남자 엘프.
엘프 족장 르티아와 그를 수행하는 프라넬이었다.
르티아는 재윤을 보자마자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다, 강재윤. 그대 덕분에 우리 세마르 숲의 엘프들이 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 역시 로사엔처럼 숲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멀리서도 감지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재윤은 미소 지었다.
“고맙긴. 동맹이니 서로 돕고사는 거지.”
“우리에게 뭔가 요구하고 싶은 것이 없나? 그대가 아니었으면 이번에 우리 엘프들은 어렵게 구한 터전을 잃을 뿐 아니라 상당수가 죽었을 것이다. 비록 동맹이지만 일방적으로 은혜를 입었으니 그에 상응한 보답을 하고 싶다.”
보답이라!
재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하지. 오크들과의 전투가 끝나도 지금처럼 엘프들이 숲에서 나의 눈과 귀가 되어 준다면 많은 힘이 될 것 같다. 이번 전투는 로사엔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으니까.”
그러자 르티아의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그 말은 오크들과의 전쟁이 끝나도 우리와 계속 동맹을 유지하자는 뜻이군.”
재윤은 끄덕였다.
“인간과 엘프가 굳이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힘을 합쳐서 괴물들을 물리치고 끝까지 살아남는 게 현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거야 우리도 바라던 바다. 하지만 우리 세마르 숲의 엘프들은 모든 인간과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다. 오직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만 동맹으로 인정할 것이다.”
모든 인간을 믿을 수는 없다는 뜻.
엘프들이 순진한 것 같아도 이런 면에서는 단호했다.
“그리고 그 동맹의 증표임과 동시에, 오늘 일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로사엔을 그대의 휘하로 보내겠다. 이후로 설령 우리의 동맹이 깨진다 할지라도 로사엔은 그대의 부하로서 끝까지 충성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그러나 로사엔 또한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르티아 님의 명을 기쁘게 받들겠습니다. 강재윤 님은 세마르 숲 엘프들의 영원한 은인입니다. 이후로 저는 강재윤 님을 모시며 인간과 엘프들이 서로 화목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재윤은 황당했다.
아무리 도와줬다지만 자신의 부하를 내주는 르티아나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로사엔이나, 도무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겠다.”
물론 재윤으로서는 환영이었다.
오늘 오크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물론 재윤과 세붐이 그만큼 강한 것 때문도 있지만, 안개 따위에 제한받지 않는 로사엔의 사기적인 감지 능력 때문이었으니까.
앞으로 오크들 말고 또 어떤 엄청난 괴물들과 싸우게 될지 모른다.
숲의 꽤 방대한 영역을 손바닥 보듯 할 수 있는 로사엔은 보물 고블린 세붐 못지않은 유능한 부하가 되어줄 것이다.
* * *
잠시 후 재윤은 안개 지역을 나와 세붐, 로사엔과 함께 안전 지대 혜미로 복귀했다.
로사엔 또한 거주자로 등록해 안전 지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민철 등에게 그녀를 소개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윤과 세마르 숲 엘프들과의 영원한 동맹.
그 동맹의 증표로서 그녀가 재윤의 부하가 되었다는 말에 모두들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그래서 모두 로사엔을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안전 지대 관리자 한혜미가 다급한 음성으로 재윤에게 달려왔다.
“지금 오크 로드 투르보가 이곳을 향해 환상 전투를 걸어왔어요.”
재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었다.
이제 드디어 오크들과의 전쟁을 끝낼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