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운명의 탑 (1)
“쿠아악!”
“쿠악!”
분노한 오크들이 달려오며 도끼를 집어던졌지만 세붐은 우습다는 듯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는 놈들을 계속 약올려 재윤이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잘하고 있다, 세붐!”
“이런 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오크들을 상대로 저같은 도발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붐이나 되니 가능한 일.
보통의 고블린에게 저 일을 시켰다간 벌써 도끼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재윤은 쇠막대를 손에 쥔 채로 담담히 전방을 쳐다보다 화살 하나를 소환했다.
이번에 새로 얻은 극 전투 능력인 질풍의 화살!
파투스가 2 포인트나 소모되긴 하지만 아직 한 번도 펼쳐본 적 없는 터라 오크들에게 그 위력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질풍의 화살!’
시동어는 필요없었다.
그냥 의지로 떠올리는 순간 소환되는 식이니까.
츠으으!
곧바로 거센 바람이 모여들더니 길이가 1.5미터 정도 되는 화살 형상으로 화했다.
워낙 커서 화살이 아닌 창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재윤은 오크들 중 하나가 20미터 이내로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날렸다.
쒸이익―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화살이 오크의 가슴에 적중, 그대로 놈의 몸이 박살났다.
“꾸우아아악!”
머리통이 떨어져 뒤로 날아가고 몸체는 조각나 그 파편들이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으! 끔찍하네!’
오크 하나가 무슨 수류탄이라도 맞은 듯 처참하게 박살났다.
일단 1000포인트의 데미지를 주고 추가로 10초 동안 도합 570포인트의 데미지를 더 주게 되는데, 오크의 몸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근데 저러면 피를 뽑을 수가 없잖아.’
이번엔 처음이라 그냥 위력도 살펴볼 겸 한 번 날려봤을 뿐이다.
앞으로는 보스급 괴물이 아닌 일반 괴물을 향해서는 질풍의 화살을 자제하기로 했다.
어차피 바람의 화살을 날려도 한 방이면 죽일 수 있으니까.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2포인트나 되는 파투스를 소모해 질풍의 화살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30코인을 얻었습니다.]
[오크에 대한 E급 지식을 얻었습니다.]
[소형 보급품 상자 1개를 얻었습니다.]
[소형 보급품 상자 1개가 안전 지대 기적의 보급 창고로 보관되었습니다.]
그 사이 오크를 죽인 보상에 관한 알림이 울렸다.
단번에 E급 지식 획득!
그거야 그렇다치고, 웬 소형 보급품 상자?
[소형 보급품 상자 내용물]
-치약 외 3종
아공간이 아닌 기적의 창고로 보관되었지만, 내용물이 뭔지는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치약과 칫솔, 비누와 같은 생필품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급품이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거였나?’
조금 전 안전 지대 기적에 1단계 보급 창고가 완성되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 보급 창고
-안전 지대에 소속된 거주자들이 괴물을 죽이면 일정 확률로 보급품이 드롭된다.
-드롭된 보급품은 자동적으로 보급 창고에 보관된다.
-보급 창고의 단계가 높을수록 보다 다양한 보급품이 드롭될 확률이 증가하고, 창고의 크기도 증가한다.
‘이렇게라도 저런 생필품을 구할 수 있다니 다행이네.’
식량도 중요하지만 사실 식량은 다른 방법으로도 구할 방법이 있다.
숲에서 열매나 버섯 등을 채취해 먹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칫솔이나 치약과 같은 공산품들은 지금 세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한편 오크 하나가 산산조각나 죽자 세붐을 쫓아오던 오크들은 움찔 놀랐다.
그들이 아무리 겁을 모르는 용맹한 오크라 해도 지금 상황은 끔찍할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역시나 세붐이 말한대로 오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쿠아악!”
“쿠악!”
오히려 재윤을 향해 접근하며 뭐라 소리쳐댔다.
“쟤들 뭐라는 거야?”
재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괴물들 중 말이 통했던 건 흡혈귀 보스 루나티쿠스와 노예로 거둔 세붐뿐이었다.
그 외 괴물들은 그냥 악쓰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나 세붐은 오크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재윤에게 잽싸게 통역해주었다.
“주인님의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빼먹겠다고 합니다. 저 뒤의 녀석은 주인님을 갈가리 찢어죽인다고 했고요.”
“대충 그럴 거라 생각은 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눈빛과 말투만 보면 짐작이 가능했으니까.
푸확!
“꾸어어억!”
곧바로 날아간 바람의 화살에 오크 하나의 머리가 터졌다.
[32코인을 얻었습니다.]
[소형 보급품 상자 1개를 얻었습니다.]
[소형 보급품 상자 1개가 안전 지대 기적의 보급 창고로 보관되었습니다.]
[소형 보급품 상자 내용물]
-컵라면 외 2종
이번에는 컵라면과 삼각김밥과 같은 간편 음식 종류가 들어있는 보급 상자였다.
그러고 보니 보급품 상자의 내용물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랜덤으로 그때 그때 내용물이 달라지는 건가?’
퍽! 퍽!
계속해서 재윤은 쇠막대를 빠르게 휘둘러 오크들을 처치했다.
이 쇠막대는 기본 공격력 22에 추가로 민첩의 250%만큼 데미지를 준다.
현재 민첩은 20.
따라서 도합 72의 데미지였다.
거기에 잔혹의 팔찌가 가진 기본 공격력 30 추가까지 합치면 무려 102.
퍽!
“꾸어어억!”
오크들은 정확히 쇠막대 세 방을 맞으면 쓰러졌다.
두 방에 죽는 녀석도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운좋게 약점을 타격해서 치명타가 터진 덕분이었다.
[오크에 대한 지식이 E급에서 D급으로 상승했습니다.]
지식 등급 상승!
모두 여섯 마리를 죽이고 마지막 한 놈만 남았다.
그러나 그놈 또한 죽기 직전이었다.
재윤이 일부러 두 다리를 부러뜨린 후 마지막 일격을 남겨두고 살려둔 상태였으니까.
“세붐! 이놈에게 오크들의 근거지와 병력 상황을 알아내라.”
세붐이 오크들과 말이 통하니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붐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습니다. 이놈들은 무슨 고문을 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오크들의 근거지 중 한 곳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려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잘됐군.”
퍽!
재윤은 오크 하나를 마저 처리했다.
그리고는 혈액 채취 도구를 꺼내 근처에 널브러진 오크들의 피를 뽑았다.
오크의 피 6병 확보!
처음 죽인 녀석은 역시나 몸이 완전 박살나 혈액을 채취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보물이 있는 곳에 가서 보물을 얻고, 네가 말한 오크 근거지로 간다.”
그러자 세붐이 움찔 놀랐다.
“주인님! 승산이 없습니다. 오크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놈들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 오크 로드 투르보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같은 놈 여럿이 있어도 그놈과 정면으로 싸우면 절대 못이깁니다.”
오크 로드의 전투력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건가?
세붐의 말대로라면 재윤도 오크 로드와 싸워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두려워할 건 없었다.
오크들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쌓아 A급 지식을 획득하기만 하면 그래도 해볼만 할 테니까.
“오늘은 싸우려는 게 아니야. 놈들의 숫자 정도만 파악해둘 생각이다. 어서 출발해.”
“예, 주인님.”
* * *
안개로 뒤덮인 숲을 뚫고 솟아 있는 거무튀튀한 건물의 옥상.
10여 마리의 강인해 보이는 오크들이 흑색 갑옷을 입은 오크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블린 놈들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그놈들의 소굴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딘가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번쩍이는 흑색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
그가 바로 이 일대의 숲을 장악한 오크들의 로드 투르보였다.
그는 인상을 구겼다.
“세붐 그놈은 그리 쉽게 도망칠 놈이 아니다. 동생 놈의 복수를 하겠다고 잔뜩 독이 올라 있는 놈이야.”
그는 쇠덩이같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놈을 찾아라. 살아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 뒤통수를 노릴 놈이니 반드시 찾아 죽여야 한다.”
“예, 로드. 그래서 정찰조를 여러 개 짜 숲을 뒤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인간들의 안전 지대를 발견한 건 없나?”
“아직까지는 없지만 영역을 넓혀가며 주변을 뒤지고 있으니 곧 발견될 겁니다.”
투르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프 놈들의 동향은?”
“이곳을 정찰하던 세 놈을 발견해 두 놈은 처리하고 하나는 사로잡았습니다. 온갖 고문을 해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고문이라니!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독하기로 따지면 우리보다 더한 것들이지. 엘프는 그냥 죽여 없애는 게 답이다.”
“로드께서 마침 식사 때가 되신 것 같아.”
그러자 투르보가 배를 만지작거리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고보니 배가 고프구나. 엘프가 인간 고기보다 더 야들야들한 맛이 있지.”
“당장 대령시키겠습니다.”
곧바로 오크 병사들이 엘프 하나를 데리고 올라왔다.
신비로운 금발을 가진 엘프 소년.
그의 전신은 무슨 고초를 당했는지 만신창이 상태였다.
그럼에도 눈빛이 죽지 않았다.
“퉤! 더러운 오크 새끼들! 나는 여기서 죽지만 너희들은 조만간 그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크큭! 어서 죽여달라고 난리구나.”
투르보는 곧바로 달려들어 엘프 소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그렇게 엘프 하나가 오크의 먹잇감이 되어 사라졌다.
* * *
“바로 저곳입니다.”
오크들을 해치운 이후 재윤은 세붐과 함께 빠른 속도로 달려 지도에 그려진 장소에 도달했다.
오크들을 만난 장소가 안전 지대 혜미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그 말은 오크들이 혜미를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
그런 사태가 당장 오늘이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보니 서두른 것이었다.
“그래. 딱 지도에 그려진 그림 그대로네.”
뾰족한 탑모양의 건물.
그리고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거대 버섯 괴물들.
변이버섯이라 불리는 그것들의 모양은 다양했다.
“그런데 저 버섯 놈들은 잘 죽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 땅속으로 들어가 다시 회복한 후 나오는 터라 저놈들을 죽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오크 놈들도 저곳은 안 건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세붐은 지난 번에 이곳에 와서 변이버섯들과 한 번 붙어본 모양이었다.
쑤욱! 쑥! 쑤우욱!
그런데 그때 변이버섯들의 숫자가 처음보다 급격히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변이버섯들도 재윤과 세붐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까?
땅속에서 끝도 없이 솟아나오는 것이 언뜻봐도 수천 마리는 되는 듯했다.
동시에 버섯들 주위로 녹색의 기체 같은 것이 계속 뿜어져나와 그것들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으! 이상하군요.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일단 뒤로 피하십시오, 주인님. 저 독안개에 휩싸이면 마비 증상이 옵니다.”
세붐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재윤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일단 피하기로 했다.
‘저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무식할 정도로 용맹한 오크들이 왜 저것들을 가만뒀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수천 마리로 불어나는 변이버섯들을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대체 저 탑 안에는 무슨 보물이 있기에 저런 괴상한 놈들이 지키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그때 재윤은 이상한 알림을 들었다.
[이곳은 자격을 갖춘 이만 들어올 수 있는 운명의 탑.]
[자격을 갖추었다면 독안개가 그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레벨이 20에 이르지 않았다면 돌아가라.]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음성.
평소에 들리던 알림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저 탑 안에 있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말하는 것 같았다.
‘레벨 20 제한이라고?’
그렇다면 현재 레벨 22인 재윤은 자격을 갖춘 상태다.
재윤은 일단 정말로 독안개가 아무런 데미지를 주지 않는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만약 방금 전 알림이 거짓말이라면 보호막의 내구도가 독안개에 의해 깎여나갈 것이다.
스윽.
곧바로 재윤은 독안개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정말이군.’
놀랍게도 보호막의 내구도는 단 1 포인트도 하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변이버섯들이 옆으로 물러나며 재윤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주인님! 위험해요!”
세붐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너는 거기서 대기해라.”
재윤은 그렇게 말한 후 독안개 안을 걸어서 탑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곳은 세붐이 따라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오직 레벨 20을 달성한 각성자만 진입이 가능한 곳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탑의 1층으로 들어가는 순간 재윤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입구가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전 들어온 입구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방은 알 수 없는 빛으로 차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아주 기괴한 공간.
재윤은 지금껏 이런 곳을 단 한 번 경험한 적 있다.
처음 각성자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렀던 공간.
‘설마 여긴 시간의 틈새라는 곳인가?’
아니나 다를까, 이전에 재윤의 앞에 나타났던 인형 형태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인형의 형체가 점차 뚜렷해지더니 마치 천사처럼 신비롭고 성스러운 얼굴을 가진 여성으로 변했다.
“드디어 운명의 시련을 뚫고 이곳까지 왔군요.”
그녀는 재윤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