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운명의 탑 (2)
운명의 시련?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재윤은 여성의 정체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각성자들의 특화 능력을 담당하고 있는 아루넬이라고 해요.”
“특화 능력?”
“당신이 이미 얻은 전투 능력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에요. 이걸 얻어야 진정한 각성자로서의 능력을 얻게 되죠.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자면 전직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전직이라니!
물론 재윤도 전직이 뭔지는 알고 있다.
게임에서 특정 레벨을 달성하면 전직을 통해 특화된 직업을 갖게 되는 건 상식적인 일이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것이 이 뒤바뀐 세상에서도 존재한다는 건가?
뭐 그렇다고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처음 각성자로서의 능력을 얻었을 때 놀랐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사소한 수준이니까.
“그래서 각성자가 20레벨을 달성하면 이곳으로 와 전직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비슷해요. 금방 이해하시는군요.”
“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니라서.”
“다만 실제로 전직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특화 능력을 하나 얻게 되는 것 뿐이랍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재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물었다.
“혹시 지구를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당신입니까?”
그러자 아루넬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럼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차원계를 지배하는 최상위 존재들과 운명의 힘이 작용해 벌어진 일이죠.”
“차원계? 최상위 존재? 그들이 누군데요?”
“당신도 저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에요. 저 또한 그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요. 그저 사명을 받은 대로 이곳에서 각성자들의 특화 능력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죠.”
재윤은 울컥해서 물었다.
“도대체 그들의 목적이 뭡니까? 왜 세상을 이 따위로 바꿔놓은 거죠? 갑자기 괴물들이 몰려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죽고 있고요.”
아루넬이 탄식했다.
“당신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본래라면 지구는 이미 멸망했어야 했습니다.”
“지구가 멸망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방대한 차원계에서 하나의 소세계가 뜻하지 않게 멸망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에요. 당신이 아는 상식에서 말한다면 블랙홀과 같은 재앙으로 행성 하나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죠. 그럴 확률은 무척 낮지만 방대한 우주의 시공간에서 보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에요. 하물며 차원계는 그와는 비할 수 없이 거대해요.”
재윤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국 차원계라는 곳에 있던 뭔가의 재앙이 지구를 멸망시킬 예정이었다?”
“아주 정확해요.”
“그 재앙이 대체 뭔데요?”
“그건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다만, 지구가 그렇게 멸망하지 않도록 그 재앙에 맞서는 존재들이 당신과 같은 각성자를 탄생시킨 것이랍니다.”
“그럼 그들이 왜 직접 막지 않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벌이는 겁니까?”
“직접적인 개입이 힘들었기 때문이에요. 반대 세력의 방해가 워낙 강력해 어쩔 수 없이 운명의 힘을 빌렸어요. 일종의 모험이죠. 이제 운명의 힘이 작용한 이상 더더욱 차원계의 최상위 존재들은 간섭하지 못해요. 철저히 운명의 룰을 따라야 하니까요.”
아루넬은 재윤을 위로하듯 말했다.
“당신이 무척 혼란스러울 것이란 건 저도 이해해요. 하지만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지금도 멸망의 재앙은 진행 중이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건 운명의 힘을 얻은 당신과 같은 각성자들뿐이니까요.”
“뭘 어떻게 막으라는 건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방법이랍니다.”
“레벨을 올려 강해져라?”
“운명은 당신에게 각성의 능력을 주었지만 재앙까지 물리쳐주지는 않아요. 강해지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습니다. 괴물에게 먹힐 수도 있고, 소중한 이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겠죠.”
재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론이 너무 허무해서다.
오직 강해지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
이곳에서 아무 얘기를 듣지 않았어도 재윤 스스로 그것만이 답이라 여겼다.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는 부모님을 찾고 있습니다. 혹시 부모님의 행방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신비한 공간에 있는 아루넬이라면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봤다.
그러나 아루넬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그런 걸 알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에요.”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다면, 생존해 계시는 지라도 알고 싶습니다.”
“안타깝군요. 제가 알고 있다면 알려드렸을 거예요.”
재윤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언젠가 이 괴상한 세상이 사라지고 본래의 지구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요?”
“시간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이미 변화된 것은 되돌릴 수 없어요. 멸망의 재앙을 막고 이 변화된 세계에서 새롭게 적응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과 같은 각성자들이 할 일입니다.”
아루넬은 그 말까지 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눈을 고요히 감았다가 뜨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운명의 힘으로 각성한 이들 중 최초로 이곳에 도달했으니까요.”
“그거야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고블린 세붐이 숨겨둔 상자를 얻지 못했다면 이곳의 위치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통로는 수많은 곳에 숨겨져 있죠. 당신이 들어온 통로는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특별히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운명을 극복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루넬이 재윤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화아악!
그녀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나와 재윤의 몸을 휘감았다.
“이제 당신은 운명이 결정하는 특화 능력을 얻게 될 거예요. 당신에게 어떤 인연이 주어지게 될지 저도 기대되는군요.”
“인연이요?”
“20레벨이 되었다고 특화 능력을 모두가 얻는 건 아니라서요.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너무 실망하지는 마세요. 당신은 최초로 이곳에 당도한 만큼 그에 대한 보상이 따로 주어질 테니까요. 부디 건투를 빌게요.”
그 말과 함께 아루넬의 모습이 사라졌다.
동시에 들려오는 알림.
[당신은 최초로 운명의 탑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스탯이 영구적으로 10 증가합니다.]
【레벨】 22
【생명력】 230/230(↑100)
【파투스】 94/97(↑40)
【스탯】
근력 20(↑10)
체력 23(↑10)
민첩 30(↑10)
지능 24(↑10)
순간 재윤은 솟구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스탯이 대거 증가했으니 당연한 일.
각성자 최초로 운명의 탑에 들어왔다는 것!
이에 대한 보상으로 스탯 총합 40포인트가 늘어나는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알림이 들려왔다.
[운명의 힘이 당신과 인연이 되는 특화 능력을 부여합니다.]
[고대 전쟁신의 가호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전쟁신의 검술을 배웠습니다.]
* 전쟁신(戰爭神)의 검술
-특화 능력(등급 : S)
-레벨이 오를 때마다 검술에 대한 이해도 및 숙련도 상승.
-레벨이 상승할수록 적의 검술 관련 전투 능력 습득 확률 증가.
‘오! 이건?’
재윤은 깜짝 놀랐다.
전쟁신의 검술이라니!
레벨이 오를수록 검술 실력이 늘어난다!
심지어 확률적이지만 적이 펼친 검술 관련 전투 능력을 습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의 모든 스탯 10 증가도 엄청나지만, 지금 이것에 비할 수는 없었다.
[전쟁신의 검술이 Lv22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당신의 검술에 대한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그 즉시 전쟁신의 검술 레벨이 재윤의 레벨과 동일하게 올랐다.
그리고 재윤은 검술에 대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레벨이 오를수록 검술의 경지도 더욱 높아질 터.
그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검사(劍士)로 각성한 것이다.
‘후!’
재윤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그 사이 그는 탑의 입구 밖으로 이동된 상태.
밖은 여전히 변이버섯들의 독안개로 가득차 있었다.
‘각성자라면 이곳은 필수적으로 와야하는 곳이다.’
이민철을 비롯한 각성자들도 레벨을 20까지 올리면 이곳에 와서 특화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20레벨이라 해도 특화 능력의 유무에 따라 전투력의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인연이 닿아야 한다니 그게 문제였다.
모두가 다 특화 능력을 얻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세붐이 어디로 갔지?’
독안개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세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파티는 재윤이 운명의 탑에 들어가는 순간 풀려버린 터라 파티창에도 안 보였다.
물론 노예 관련 창에는 세붐이 나와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세붐이 내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텐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재윤이 운명의 탑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밖의 시간이 정지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대략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상태.
‘그러고 보니 저쪽에 싸운 흔적이 있어.’
원래 세붐이 있던 장소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땅이 파이고 나무와 풀들이 대거 잘리고 부러져 있었다.
세붐의 특수 능력인 죽음 칼날이 펼쳐진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처참히 조각난 채로 널브러져 있는 오크 사체 2마리.
‘오크들이 습격했고 세붐이 싸우다 밀린 건가?’
그렇다면 오크들 중 상당히 강한 존재가 나타났음을 의미했다.
아무리 세붐이 아직 전투력 저하 상태라지만, 적어도 보스급 괴물이 아니면 세붐을 곤란하게 만들기 힘들 테니까.
재윤은 전투의 흔적을 차분히 살피며 따라갔다.
그리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쪽이군.’
* * *
한편 재윤의 예상대로 세붐은 습격을 받았다.
재윤이 운명의 탑에 들어간 지 대략 10분이 지났을 무렵.
세붐은 주변으로 일단의 적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는 걸 알아챘다.
‘오크 놈들이다!’
20마리가 넘는 숫자.
거기에 지휘관 급도 하나 있었다.
세붐이 전투력 저하 상태가 아닌 멀쩡할 때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순식간이었다.
신장이 다른 오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오크가 숲의 나뭇가지들을 휙휙 딛고 날아와 아래로 뛰어내렸다.
거대한 덩치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렵한 움직임.
그는 세붐을 보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정찰조와의 연락이 갑자기 끊겨서 추적해왔더니 세붐 네놈이었구나. 죽을 준비는 되어 있느냐?”
그에 이어 오크 병사들이 빠르게 주변을 포위했다.
세붐이 이를 갈았다.
“게루크, 네놈이!”
그가 바로 오크 지휘관 중 하나인 게루크였다.
세붐이 절대 잊을 수 없는 놈이었다.
그의 동생을 잡아간 원수였으니까.
“큭큭큭! 로드께서 네 동생 놈의 고기 맛이 제법 쫀득쫀득하니 좋았다고 하셨다.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고 말이야.”
“크으윽! 죽인다!”
곧바로 세붐이 칼을 앞으로 겨눴다.
츠으읏!
그의 칼 끝에 빛이 모여들더니 그대로 게루크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파앗―
세붐의 필살기 중 하나인 일검파!
단일 대상을 노리는 것인만큼 위력이 상당히 강했다.
게루크가 흠칫 놀라며 잽싸게 도끼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싱겁다는 듯 도끼를 아래로 털어내며 세붐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 상태가 정상이 아니로군.”
그는 이전에 세붐의 공격을 받아본적 있던 터라,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음을 단번에 간파했다.
“크윽! 닥쳐라!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세붐은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죽음 칼날을 시전했다.
일단은 오크 병사들부터 처치하고 게루크와 싸워야 할 것 같아서였다.
곧바로 그의 양손에서 붉은 빛의 칼날들이 쏟아져나갔다.
“모두 멀리 물러나라!”
그런데 게루크는 세붐이 죽음 칼날을 펼칠 줄 알았다는 듯 그가 자세를 잡자마자 부하들을 뒤로 멀리 물러나게 했다.
그러자 죽음 칼날은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고 소멸되어버렸다.
애꿎은 근처의 나무와 풀들만 베어버렸을 뿐이다.
“으으! 우라질!”
세붐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오크 지휘관이 있는 한 지금의 몸 상태로는 오크들과 싸워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그 사이 오크들이 다시 포위망을 좁혀오자 세붐은 잽싸게 그 중 두 놈을 공격해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포위를 뚫고 도주했다.
“쫓아라! 놈을 오늘 반드시 죽일 것이다!”
“예, 게루크님!”
동료 병사 둘이 죽자 오크 병사들의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게루크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세상 끝까지 세붐을 쫓아가 죽일 기세였다.
세붐은 얼마 가지 못해 멈춰야 했다.
그의 앞을 오크 지휘관 게루크가 훌쩍 날아와 가로막았으니까.
“크큭! 고작 여기까지냐?”
앞에는 게루크, 뒤쪽으로는 오크 병사들이 빙 둘러 포위한 채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포기해라. 네놈은 도망 못간다!”
“닥쳐라! 다른 놈은 몰라도 게루크 네놈만은 반드시 죽인다!”
세붐의 칼에서 빛줄기가 쏘아져나갔다.
그러나 게루크는 도끼를 들어올려 그것을 가볍게 막아내고는 곧바로 돌진해왔다.
“가소로운 고블린 놈! 이제 끝장을 내주마!”
훙훙! 휭휭휭휭!
거대한 도끼가 마치 폭풍처럼 공간을 갈랐다.
세붐은 전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계속 뒤로 밀려났다.
도끼와 칼이 격돌할 때 엄습하는 충격에 방어막이 빠르게 깎여나갔다.
“크으윽!”
어느새 방어막이 사라지고 세붐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비틀거렸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는 죽을 것이다.
푸확!
바로 그때였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오크 병사 하나가 머리가 터진 채 죽었다.
“쿠억!”
이어서 또 하나의 오크 병사가 복부를 움켜쥔 채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인간.
물론 그는 재윤이었다.
순간 세붐이 믿기지 않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그는 재윤이 한낱 노예에 불과한 자신을 구하러 와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주, 주인님!”
“조금만 버텨라.”
휘휙! 퍽퍽!
“쿠억!”
“크아아악!”
오크 병사들의 움직임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모두 체계적인 전투 훈련을 받아 공격은 물론 방어 능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어지간한 쇠막대 하나가 날아오는 걸 피하지 못할만큼 몸이 둔한 오크 병사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 오크 병사들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