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 * *
시간은 빠르다.
마이다스 CKC에서 15개 계열사를 통해 삼성전자를 매도하기 시작한 것은 6개월전의 일이었다.
현재 시가로 무려 5,500억이란 거액이 야금야금 매도되었는데 신규성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모든 주식을 처분해 버렸다.
물론 시장 상황이 워낙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호황과 가전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며 주가가 연일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거래량이 많았다.
최강철이 신규성의 전화를 받고 마이다스 CKC의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그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뉴스에서 보니까 결국 대한정의당에 입당하셨더군요. 김 사장님 성화가 대단했던 모양이죠?”
“예, 그 덕분에 시합이 끝나자마자 총알같이 날아왔습니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집사람한테 쫓겨날 판이에요.”
“하하하… 엄살이 심하십니다.”
“엄살이라뇨. 결혼한 지 불과 1년 반밖에 안 됐는데 사업하고 시합하느라 집사람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요. 이러다가는 정말 쫓겨나는 건 시간문젭니다.”
“회장님이야 돈 버느라 그렇지만 저는 뭡니까. 전 회장님 돈 벌어주느라 마누라한테 쫓겨날 판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죠? 6개월 동안 주식 파느라 내내 신경을 썼더니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회장님, 술 사주십시오. 이럴 때는 역시 술이 보약이에요.”
“하하하… 어디로 모실까요?”
“이왕이면 강남으로 갑시다. 오랜만에 분 냄새 좀 맡게 해주십시오.”
“사장님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웬일이세요. 그 말씀 정말입니까?”
“농담입니다. 같이 나가서 저녁이나 드시죠. 오늘은 모든 일을 끝냈으니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 봉사하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최강철이 밝게 웃자 신규성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방 거둬졌고 그의 안색은 다시 신중함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회장님, 정확하게 현금으로 5,537억입니다. 이 큰 돈을 정말 그냥 은행에 묶어놓을 생각이십니까?”
“그럴 겁니다. 대신 보유한 현금으로 달러를 매입하세요.”
“허어…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금 같은 시기에 이런 거금을 은행에 썩히다니요. 더군다나 회장님은 다른 주식들과 부동산까지 처리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돈을 전부 합하면 1조가 넘는단 말입니다. 그걸 전부 달러로 바꾸라고요?”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회장님은 확신을 하시는 것 같군요. 우리나라에 닥쳐 올 위기를 외환으로 보시는 거죠?”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음…….”
신규성의 입에서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긴, 최강철의 말대로 국가가 디폴트 상태에 몰린다는 건 외환 위기가 원인이다.
최강철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의 표정이 굳어질 대로 굳어졌을 때였다.
“부동산들은 어떻게 돼가고 있죠?”
“이미 반쯤 처분했습니다. 거기서 들어온 돈이 1,000억이 넘어요. 아이고, 그러고 보니 배가 터질 것 같네요. 워낙 큰돈들을 만지다 보니까 이건 뭐, 돈이 돈으로 보이지 않아요.”
“나머지는요?”
“지금 계속 매수자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해결이 될 거예요. 워낙 물건이 좋아서 사겠다는 자들이 많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세요. 삼전이 끝났으니 이제 다른 주식들도 처분하시고요.”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나라는 곧 위기가 찾아올 겁니다. 그때 우린 그 돈으로 바탕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요.”
“이번에도 맞는다면 난 회장님을 귀신으로 생각할 겁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왜 회장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군요. 더군다나 나라가 망할 정도면 그 돈으로 무슨 돈을 번단 말입니까. 나라가 망하면 은행도 자연스럽게 망하게 되어 있어요. 혹시 가진 돈을 전부 달러로 바꿔서 외국으로 도망갈 생각은 아니죠?”
“사장님은 아직도 왜 회사 이름이 마이다스인지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마이다스는 말입니다. 건드리면 모두 황금으로 만드는 마법의 손을 가진 인물이에요. 두고 보십시오. 나는 그 돈으로 수십 배의 돈을 벌어들일 겁니다.”
“마이다스가 회장님이란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 * *
대일기획의 민무일은 팀원들과 함께 초긴장 상태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거의 보름 동안 텔레비전에서는 최강철의 정치 입문 소식에 난리가 나 있었지만 그는 팀원들과 광고 촬영 계획을 마무리하느라 밤잠까지 설쳐가며 일을 했다.
피닉스그룹의 요구 사항은 간단했지만 무척 고달픈 것이었다.
1년 이내에 모든 광고가 방송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 전 직원들이 6개월 내내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회의실에는 광고팀장을 비롯해서 광고 촬영에 투입되는 주요 스태프들이 전부 앉아 있었는데 그들 역시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피닉스그룹이 제시한 시한에 맞추느라 팀원들의 얼굴은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메인 광고 모델이 대일기획으로 온다.
대한정의당 입당으로 정치판을 발칵 뒤집어놓은 당사자.
대한민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국민 영웅으로 불리고 있는 바로 그 사람, 최강철이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사장과 중역들이 직접 영접을 나가 있는 상태였고 피닉스그룹의 홍보 담당 임원까지 나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회의실에서 숨도 쉬지 못한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휴, 긴장 돼죽겠네.”
콘티 작가인 서정화가 온몸을 배배 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회의실 전체에 울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흘린 말이었지만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민 대머리 사장이 내시처럼 문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후 거짓말처럼 꿈속에서도 만나고 싶었던 최강철이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직접 눈으로 보게 되자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최강철입니다.”
굵고 낮은 목소리. 그러나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이기도 했다.
민무일이 급히 마주 인사를 하며 차례대로 광고에 참여할 팀원들을 소개해 주자 최강철은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는 민무일은 한숨을 길게 내려뜨렸다.
방귀깨나 뀐다는 스타들은 대부분 촬영에 들어가는 상견례 자리에서 스태프들을 향해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뻣뻣한 고개를 슬쩍 숙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최강철의 태도는 그들과 완전히 달랐다.
저런, 저런.
스태프의 반이나 차지하고 있는 여자들이 최강철과 손을 잡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쯧쯧..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여자들이 뽑은 인기 순위에서 최강철은 지금까지 3년 내리 1위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만큼 꿈속에서조차 보고 싶던 워너비 스타란 뜻이다.
특히 오래전부터 몸을 배배 꼬고 있던 서정화는 최강철이 손을 잡자 대뜸 입을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여자이기 이전에 회사원이었고, 이 자리에는 사장과 발주처의 임원까지 있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숨기지 않았다.
“최강철 선수를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랬군요.”
“당신은 정말 좋아하고 있습니다. 최강철 선수를 처음 만난 이 순간을 저는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더 큰 추억을 드려야겠네요.”
빙긋 웃은 최강철이 손을 빼더니 가볍게 서정화를 품에 안아주었다.
허그다.
그러자 서정화가 최강철의 품에 안긴 채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최강철의 행동에 그녀는 이 순간을 영원히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먼저 인사했던 여자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인사가 끝나고 사장실에서 광고주인 피닉스그룹의 홍보 임원과 함께 촬영 스케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최강철은 그의 설명에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궁금증을 몇 가지 묻기만 했는데 더없이 진중한 모습이었다.
최강철이 촬영하는 광고의 콘셉트는 14개가 전부 달랐다.
복싱하는 장면들이 전부 몇 컷씩 들어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특성에 맞춰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특정 제품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콘티를 짜는 게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피닉스그룹의 이미지와 최강철의 이미지를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 광고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 * *
“광고를 찍는단 말이야?”
“예, 총장님.”
“도대체 그놈의 속셈이 뭔지 모르겠군. 입당을 했으면서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고 엉뚱하게 광고를 찍어?”
제1야당의 사무총장 문대국이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최강철의 대한정의당 가담으로 인해 총선 판 전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보유한 연구소에서는 며칠 동안 최강철로 인한 영향력을 분석한 결과 충격적인 보고를 해왔다.
가장 커다란 타격을 받는 건 집권당이었지만 그들 역시 상당한 피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은 당연히 최강철이 출마를 한다는 걸 전제 조건으로 깔아놓은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출마할 지역구는 여야를 구분하지 않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공천이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최강철이 나오는 지역구의 공천자는 그 누구라도 물벼락을 맞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만에 대한정의당은 최강철이 총선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입당 후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최강철은 엉뚱하게 광고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의원 생각은 어때?”
사무총장 문대국이 묻자 이민상의 살짝 숙여졌던 고개가 빳빳하게 올라왔다.
이민상은 문대국의 오른팔로서 이번 공천 심의에 참여한 야당의 실세 중 한명이었다.
“총장님, 최강철은 피닉스그룹의 광고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결과 14개 기업의 광고를 전부 찍는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놈은 지금까지 한 번도 광고에 출연한 적이 없잖아. 혹시 피닉스그룹과 밀접한 관계가 있나?”
“외형적으로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피닉스 관계자들조차 왜 최강철이 광고에 출연하는지 모르더군요.”
“그럼 돈 때문이야? 그 자식 복싱으로 번 돈을 전부 고아원과 장학금에 쏟아부어서 돈이 없다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아, 답답하구만.”
“광고를 전부 찍는 데 한 달이면 끝난답니다. 그래서 아직 확신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놈이 단순 가입으로 끝날지 총선에 개입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당의 움직임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그자들이 더 답답할 텐데?”
“지금 열심히 물속에서 움직이고 있겠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자들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훑은 바로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거든요. 그놈은 정말 미친놈입니다. 분당 땅을 판 돈으로 잠깐 삼성전자의 주식을 사기도 했지만 작년에 전부 팔아서 추가적으로 고아원을 설립하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최강철이 운영하는 고아원은 이제 45개에 달합니다. 주요 도시마다 전부 하나씩 만들었는데 엔젤재단의 장기 목표는 100개까지 설립하는 거랍니다.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고아원을 말입니다.”
“혹시 거기서 나오는 것도 없나?”
“없습니다. 저 역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파봤는데 최강철은 엔젤재단을 설립한 후 지금까지 500억 정도를 지원했습니다. 복싱하면서 번 돈과 분당 땅으로 이득 본 돈의 대부분이 들어간 것입니다. 총장님도 아시겠지만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뱃속을 채운 놈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휴우, 그래서 무섭다는 거야. 진정이 담겨 있다는 게. 아무런 사심 없이 그 짓을 하니까 국민들이 좋아할 수밖에.”
“어쨌든 계속 파보겠습니다. 무조건 죽여야 합니다. 이번 선거는 최강철을 죽여야만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여당 놈들이 더 커다란 피해를 보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야.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 이 의원이 그쪽과 선을 넣어서 합동 작전을 펼쳐 완벽하게 모가지를 잘라 버릴 건수를 만들어봐. 일단 우리가 먼저 살고 봐야 되지 않겠어?”
“예, 총장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야죠. 그놈은 정치를 너무 쉽게 봤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마음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국민들은 슬쩍 먹잇감을 던져주면 가차 없이 물고 뜯어버리거든요. 상대가 누구라도 말입니다.”
“정치의 생명은 국민들을 어떻게 잘 속이느냐에 달린 것이지. 이 의원을 믿고 있겠네. 만약 그놈이 움직인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 주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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