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92화 (192/308)

[192]

* * *

정철호는 최강철의 경호를 위해 한국에서부터 5명의 요원을 데리고 미국으로 날아왔다.

그가 최강철을 경호하기 시작한 것은 시합을 헌즈와의 경기가 확정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대부분의 요원이 보안 업무를 위해 파견 나간 상황이었지만 그는 특별 팀을 구성해서 최강철의 경호를 담당했다.

김도환의 지시로 인해서였다.

최강철은 단순한 복싱 선수가 아니었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란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그런 김도환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은 수많은 적을 양산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성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정철호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보스가 훈련할 동안 기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과 호텔로 찾아드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공식 인터뷰가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의 몸은 전부가 무기였다.

16년 동안 군에 몸을 담으며 각종 무술은 물론이고 살상 기술들을 배웠고, 수많은 군인 중에서도 최고로 뽑히는 요원이었다.

그는 인터뷰할 당시 최강철의 옆에 서 있었다.

헌즈가 근접해 있던 경호원들을 제치고 최강철의 멱살을 잡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수도가 헌즈의 목을 찌르기 위해 날아갔다.

만약 급하게 최강철이 말리지 않았다면 헌즈는 시합을 하기도 전에 그의 공격으로 인해 반쯤 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목에 닿았던 수도를 천천히 거둬들인 후 최강철의 행동을 지켜봤다.

수많은 전투에서 실제 격투를 벌였고 가상의 적들과 대련을 해봤지만 최강철 같은 눈은 처음이었다.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워서 섬뜩한 느낌을 받을 만큼 보스의 눈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싸워오면서 적의 눈을 피한 적이 없었고 기세로서 밀린 적이 없었는데, 막상 최강철의 눈을 확인하자 슬그머니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만약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저런 눈을 가진 자는 본 적이 없었고 서늘하게 피어오르는 기세는 사막의 공포라는 전갈처럼 지독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요원들을 배치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할 때도 최강철의 눈이 잊히지 않았다.

삐익, 삐익.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을 때 귀에서 급한 신호가 울렸다.

“뭐야?”

“실장님, 교민회장이란 분이 찾아왔습니다. 어쩔까요?”

“내가 나가보겠다.”

정철호는 방문을 두드렸다.

지금 보스는 스태프들과 함께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찾아온 사람의 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이성일이 문을 열고 나와 물었으나 그의 시선은 최강철을 향해 있었다.

“보스, 교민회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교민회장요?”

“LA 한인 타운 교민회장이십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대답을 들은 최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 쪽으로 다가왔다.

정철호의 몸이 옆으로 비켜나자 백발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 왔는데 청년의 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들러 있었다.

나이를 추측할 수 없었다.

노신사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 덮여 있었지만 허리는 꼿꼿했고 얼굴은 붉은빛이 감돌았다.

“최강철 선수, 나는 교민회장인 김동인이라고 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어요?”

“예, 어르신. 들어오시죠.”

최강철이 정중하게 인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하자 김동인과 청년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 후 최강철과 일행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여러 번 고민을 하다가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한국에서도 최강철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지만 여기서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최강철 선수가 이겨주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지만 우리의 성의를 가져왔습니다. 호성아, 그것 좀 열어봐라.”

“예, 할아버지.”

노신사가 눈짓을 하자 청년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더니 주섬주섬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음식들이었다.

불고기가 있었고, 잡채, 계란말이, 김치, 그리고 된장찌개까지 없는 게 없었다.

음식이 꺼내지자 노신사의 눈이 최강철을 향했다.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우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소.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 이런 음식을 가져온 게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 교민들은 최강철 선수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최강철 선수, 우리와 같이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마침 저희들도 식사를 하기 위해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호텔방에서 밥 먹으면 뭐라고 하겠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안 그래요, 관장님?”

“그거야, 뭐.”

옆에 서 있던 윤성호가 빙그레 웃으며 동의를 해왔다.

코치로서는 당연히 말려야 했지만 김동인의 따뜻한 눈을 마주한 순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같이 밥을 먹겠다는 건 자신들의 음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었다.

그건 20여 가지의 음식을 바닥에 편 김동인의 입에서 나타났다.

“오늘 내가 하루 종일 음식 하는 걸 지켜봤어요. 그리고 내가 일일이 먹어본 것들입니다. 음식을 통에 담는 것도 내가 직접 했으니까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최강철 선수, 얹히지 않도록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일행들은 그가 내놓은 음식들을 먹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펼쳐진 진수성찬을 먹기 시작했다.

김동인은 자신이 직접 먼저 음식을 먹었는데 하나씩 집어 먹은 후에는 최강철이 먹는 모습을 푸근한 눈으로 지켜봤다.

그의 눈은… 너무나 따뜻해서 한겨울의 눈을 녹이는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역사적인 날이다.

드디어 시합 날의 태양이 떠오르자 아침부터 라스베이거스는 흥분과 긴장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급하게 움직이며 부산을 떨었다.

금세기 최고의 결투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조급함으로 인해 허둥대고 있었다.

결국 이번 경기를 중계하는 건 KBS였다.

MBC 측에서는 협의까지 깨면서 이번 경기를 욕심냈지만 KBS 사장까지 나서면서 강하게 항의를 했기 때문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비록 공영방송이었으나 KBS는 최강철의 경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MBC와 혈투를 벌였던 것이다.

삼 일 전에 현지로 날아온 김영국과 정민철은 자신들의 중계석을 확인하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좋은 자리 다 뺏기고 코너 쪽에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야, 정 PD,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린 뭘 보고 중계방송하란 거냐. 뭐가 보여야 중계방송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어차피 일어서서 하실 거잖아요. 이것도 간신히 잡은 겁니다. 다른 나라 애들은 저쪽이에요.”

담당 PD인 정문기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어이없게도 한참 뒤쪽에 여러 나라의 중계진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젠장.

도대체 몇 개국에서 날아왔는지 셀 수도 없다.

손에 들고 있는 자료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내밀자 다행스럽게 중계방송하는 건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이건 우연이야, 뭐야,

예전 마크 브릴랜드전에서 만났던 구시켄 요코가 알은척을 하면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일본 중계진은 KBS가 차지한 곳보다 훨씬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링의 중앙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이게 뭐냐고.

저놈들은 지들 나라 선수가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좋은 곳을 차지하고 지랄이야.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일본 중계진을 바라보는 김영국의 눈은 그런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또 뵙는군요.”

“그러네요. 반갑습니다. 요코 씨는 이번에도 해설을 위해 오신 건가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은지 방송국에서는 아직 저를 교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워낙 식견이 높아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요코 씨는 오랫동안 챔피언을 지내셨기 때문에 경기를 보는 눈이 뛰어나다고 알려졌거든요.”

“하하, 감사합니다.”

구시켄 요코가 일본인답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칭찬에 대한 답례를 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정민철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는 해설 위원으로서 같은 일에 종사하는 구시켄 요코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요코 씨, 당신은 이번 경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미국의 전문가들은 전부 헌즈 선수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던데 당신도 그렇게 판단하고 계신가요?”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피지컬 쪽에서 워낙 차이가 나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가 그런 판단을 내리지만 권투는 상대성이 너무 많은 경기거든요. 제가 봤을 때 허리케인은 레너드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레너드보다 월등한 인파이팅 능력이 있지만 스텝의 스피드나 펀치 속도, 그리고 방어술도 뛰어나죠. 지금까지 헌즈가 싸운 선수들과 근본적으로 레벨이 다른 선수기 때문에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좋은 평가를 해주시는군요.”

“그냥 전문가로서 드린 말씀입니다. 저는 결코 허리케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엔도 선수를 그렇게 박살 냈는데 호감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허리케인은 스포츠맨으로서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했습니다. 경기를 치르면서 상대를 그렇게 만드는 건 치졸한 행동입니다.”

“뭐가 치졸한데요?”

“허리케인은 일부러 잔인한 짓을 했어요. 그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가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는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그런 선수는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질문에 괜찮은 평가를 내리던 구시켄 요코가 이상한 말을 꺼내면서 최강철을 비난하자 김영국의 얼굴이 슬그머니 굳어졌다.

이놈이 미쳤나.

이제 보니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그 얘기를 꺼내기 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코 씨, 당신은 혹시 일본에서 최강철 선수에게 한 행동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그 시합에 일본 정치인이 개입되어 훈련을 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일본 원정 시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자가 최강철 선수한테 독침까지 썼어요. 누가 누굴 치졸하다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이죠?”

“그건 말도 안 되는 핑계요. 우린 그런 짓을 하지 않았소.”

“우리는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요. 요코 씨는 일본이 정의롭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말을 하려거든 이만 돌아가십시오.”

“한국 사람들은 여전하군요. 방송하는 사람들이고 같은 복싱에 종사한다고 생각해서 왔는데 잘못 온 모양이네요.”

“일본은 강제로 한국을 침탈해 놓고 지금까지 한 번도 정식으로 사과한 적이 없어요. 그래놓고 최강철 선수를 비난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뭐가 정의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과 우리가 왜 계속 대화를 나눠야 한단 말입니까?”

* * *

시합 당일이 되자 당연하다는 듯 대한민국이 멈췄다.

간간히 다니는 버스 외에는 거리에서 차량을 구경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췄다.

오로지 득실대는 건 지자체에서 마련한 합동 응원 장소와 경기를 중계방송해 주는 맥줏집, 다방들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집에 틀어박혀 가족들과 경기가 시작되기를 학수고대하는 중이었다.

그건 연예인들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연예인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야구단 돌개바람의 회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야구 경기 대신 단골 맥줏집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돌개바람의 회장은 연기 20년 차인 손정호였는데 그는 10여 편의 드라마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펼쳐 보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돌개바람의 상징은 그가 아니라 절정의 인기 영화배우 황호성과 매니저를 맡고 있는 이민경이었다.

둘은 연인 사이기도 했는데 이민경은 황호성 때문에 일요일마다 야구장으로 출근해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민경 씨, 술 더 시켰어?”

“아휴, 회장님 너무 드시지 마세요. 그러다가 시합도 못 봐요.”

“아냐, 아냐. 이럴 때는 무조건 마셔야 해. 그래야 열심히 응원할 수 있어. 안 그래?”

“그럼요!”

손정호의 말에 16명의 회원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그들 역시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시합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종업원을 부른 것은 황호성이었다.

그는 조각처럼 멋있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운동신경마저 뛰어나서 돌개바람의 에이스 투수였다.

맥주가 나오자 손정호를 시작으로 회원들이 맥주를 목구멍으로 퍼부었다.

여름철, 운동을 하고 땀을 흠뻑 흘렸다면 모를까, 이제 겨우 아침 9시가 넘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술을 마셔대는 건 평상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그들에게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가족들을 팽개치고 일요일 아침부터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원수를 진 사람들처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특징은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고 말이 많아지는 것이었지만 호프집의 분위기는 평상시보다 훨씬 조용했다.

그리고 그런 조용한 목소리도 텔레비전을 통해 특집 방송에 대한 오프닝이 펼쳐지자 아예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들 안다.

왜 그들이 이렇게 마음 졸이고 있는지를.

그들은 떠들고 싶어도 떠들 수 없었다. 애써 밝은 척을 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어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