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91화 (191/308)

[191]

* * *

경기가 3일 전으로 다가오자 대한민국이 전부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 침묵의 의미는 복잡했고 고요 속에서 다가오는 태풍을 맞이하는 것처럼 긴장으로 가득 찼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연일 새로운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에 대해서 떠들었고 북미 자유 협정, 그리고 연말에 있는 대통령 선거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한곳으로 쏠려 있었다.

그냥 쏠린 것이 아니다.

어떤 뉴스도 최강철에 관한 뉴스를 당해내지 못했다.

미국에서 마무리 훈련 중인 최강철에 대한 뉴스와 헌즈에 관한 소식이 나오면 그 신문은 불티나게 팔렸고 방송의 시청률은 가뿐하게 50%를 넘겼다.

윤문호 교수가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나간 건 아내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는 큰아들부터 대학에 다니는 둘째와 셋째까지 전부 참석했는데 메뉴는 아내가 좋아하는 소갈비였다.

덩치가 남산만 한 아들 셋이 먹어대자 8인분을 시켰어도 부족했다.

“이놈들아, 아버지 지갑 거덜 난다.”

“이럴 때라도 실컷 먹어야죠. 엄마, 고맙습니다. 태어나게 해주셔서.”

“말로만?”

“그럴 리가요.”

아내가 입을 삐죽이자 아들들의 주머니에서 하나씩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회사 다니는 놈이 개중에 낫다.

큰아들은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해 백화점에서 스카프를 사왔는데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무늬가 새겨진 것이었다.

둘째와 셋째는 대학생답게 용돈을 아껴서 준비한 꽃다발과 립스틱을 사 왔다.

비록 금액은 얼마 나가지 않겠지만 아내는 얼마나 좋은지 입이 바보처럼 벌어졌다.

이런 게 가족 아닌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정성이다. 아들들의 정성만 있다면 아내의 가슴을 소녀처럼 뛰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그러게 말이다.”

“요즘 신문에서 보니까 회사원들이 집엘 잘 들어가지 않는데요.”

“왜?”

“아무래도 최강철 선수 때문인 것 같아요.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오니까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마시나 봐요. 기다리기가 너무 힘든 거죠.”

“형, 나는 그 사람들 심정이 이해가 가. 사실 나도 그렇거든. 우리 친구들은 요새 농구도 안 해. 꼭 넋이 나간 애들 같아.”

“회사도 그래. 직원들이 나사 빠진 사람들처럼 멍해. 휴게실에 가면 온통 최강철 선수 이야기뿐이고.”

“이거 정말 지면 안 되는데…….”

큰형의 말을 들은 막내가 한숨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는 최강철의 이야기가 나오자 밥맛도 떨어졌는지 들고 있던 숟가락까지 내려놓았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아버지, 이번에 최강철 선수가 지면 타격이 클 것 같아요. 국민들한테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서 어쩌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지 몰라요.”

“후우… 그래, 아버지도 그게 걱정이다.”

“혹시 최강철 선수가 떠나면서 무슨 말 한 거 없어요?”

“그 친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그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만 하고 떠나더라.”

“이겨야 해요. 정말 이겨줬으면 좋겠어요. 꼭…….”

* * *

세계적인 관심이 쏠려 있는 최강철과 헌즈의 대결이 점점 다가오자 모든 외신이 라스베이거스로 집중되었다.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언론들로 인해 몸살을 앓았고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유명 스타들이 찾아왔기 때문에 복싱 기자 외에도 연예 기자들까지 달려들어 온통 카메라투성이었다.

언론들의 귀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최강철 대신 헌즈에게 집중되었다.

헌즈는 언론을 전혀 피하지 않으며 수시로 인터뷰를 가졌는데 아예 최강철을 상대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입은 거칠었다.

시합이 성사되기 전 최강철이 했던 도발을 아직까지 잊지 못했는지 신랄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이번 시합에서 허리케인이란 아이에게 진정한 복싱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겁니다. 그 친구는 정신을 잃은 채 오랫동안 캔버스에게 잠들 테니 시합이 끝나면 침대를 링 위에 올려주시오.”

거만한 미소.

인터뷰에 응하는 그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달려 있었는데 벌써 승자가 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토마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문가들은 헌즈의 압도적인 우세를 점치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오랫동안 최강철의 뒤를 쫓으며 기사를 써왔고 인간적으로도 그를 좋아했기에 가진 판단일지 모르나 이번 시합도 기적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머스 헌즈.

네가 불세출의 복싱 영웅이란 건 인정한다.

하지만 너는 너무 어리석구나.

허리케인은 절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친구가 아니야.

“왜 그래?”

“뭘?”

“왜 얼굴을 찡그리고 있냐니까?”

“그냥 저 자식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져.”

“자신감이 너무 과하긴 하지.”

복싱 전문 잡지 링의 기자 마틴이 옆에 있다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는 토머스 못지않은 경력을 지닌 베테랑으로 주요 시합이 있을 때마다 예상 평을 썼는데 그 정확도가 상당할 정도로 복싱에 대한 식견이 뛰어났다.

그랬기에 토머스는 슬그머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봐, 마틴. 자네는 승률을 어떻게 보나?”

“6 대 4.”

“누가?”

“당연히 헌즈지. 그 이유는 자네도 잘 알잖아.”

“만약 최강철이 이긴다면?”

“그땐 난리가 나는 거지. 진정한 복싱 영웅의 탄생 아니겠어?”

“휴우…….”

“왜 한숨을 그렇게 길게 내쉬는 거야? 뭐 문제 있어?”

“아냐, 그냥 걱정돼서.”

“혹시 허리케인한테 걸었어? 얼마나 걸었는데?”

“난 너처럼 도박 안 한다.”

“하하하… 토머스 너무 그러지 마라. 기자와 복서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존재가 되어야지 정을 주면 안 돼. 그렇게 되는 순간 공정한 기사를 쓰기 어렵단 말이야.”

“씨발, 그게 내 마음대로 돼야지. 이상하게 허리케인 그놈한테는 그게 안 돼.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 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기자회견장에 올 거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이번 기자회견은 무척 재밌을 거야. 헌즈의 도발은 워낙 유명하니까 그렇다 쳐도 허리케인도 만만치 않잖아. 아마, 두 놈이 마주치면 불꽃이 튈 거다.”

마틴이 말을 하면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기도 할 거다.

두 선수의 시합에 쏠린 귀들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공식 기자회견은 엄청난 기사거리를 양산해 줄 절호의 기회였다.

최강철은 계체량을 끝내고 기자회견장으로 걸어들어 갔다.

검은색 정장에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노타이 차림이었다.

멋지다.

그동안 경기를 치르기 전 최강철의 모습은 감량으로 인해 약간 마른 듯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핏이 살아나고 있었다.

계체량에서 보여준 그의 체중은 정확하게 69.8㎏이었다. 한계 체중보다 1㎏이 모자랐지만 웰터급으로 시합을 할 때보다는 거의 3㎏이 늘어난 체중이었다.

들어서는 그를 향해 수많은 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최강철은 지금까지 언론 인터뷰를 거절하고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공식 석상에 얼굴을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헌즈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에 최강철은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해준 후 자신의 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기자들은 난리였다.

벌써부터 질문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는지 아직 헌즈가 들어오지 않았고 사회자가 마이크도 잡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대편에서 헌즈가 걸어 나오자 기자들의 카메라가 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다.

헌즈는 마치 시상식에 나서는 영화배우처럼 손을 흔들면서 나왔는데 여전히 여유가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단상에 올라와 잠깐 주먹을 들어 포즈를 취해준 헌즈가 먼저 와 있던 최강철을 향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이, 꼬맹이. 오랜만이다.”

“이 자식아, 네 눈에는 내가 꼬맹이로 보이냐? 멀대같이 키만 큰 놈이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뭐라고?”

“앉아, 이 새끼야. 너랑 실랑이 벌이기 싫으니까.”

눈을 부릅뜨는 헌즈를 잠시 노려보던 최강철이 눈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헌즈는 어이가 없었던지 한참 그대로 서 있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 대면한 것은 처음인데 나이도 어린 놈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링 위에서, 그리고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 최강철은 도발을 했지만 정중함을 잃지 않았었다.

이윽고 사회자의 멘트로 공식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질문은 두 선수에게 번갈아가며 하는 것으로 규칙이 정해졌기 때문에 한 명씩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재밌는 점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인터뷰를 해온 헌즈보다 최강철에게 질문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헌즈보다 최강철에게 관심을 쏟아부었다.

헌즈의 순서가 오면 손을 들지 않던 기자들이 최강철의 순서가 오면 벌 떼처럼 손을 들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사회자가 지목하는 데 애를 먹었다.

“허리케인, 지금까지 언론을 피한 이유는 뭡니까?”

“훈련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헌즈 선수는 계속해서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기자들 사이에서는 허리케인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건 헌즈가 멍청하기 때문입니다. 시합을 앞둔 선수가 훈련에 집중하지 않고 인터뷰나 하고 있는 게 정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최강철의 대답에 기자들의 얼굴에서 슬금슬금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제 막 시작인데도 최강철의 태도를 보니 오늘 대박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헌즈 선수는 허리케인의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오로지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차 말했던 것처럼 저런 꼬맹이는 5회 이내에 끝낼 수 있단 말입니다.”

가뜩이나 초반부터 열이 받은 헌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건방진 자식, 감히 누구에게 설교를 해.

이 새끼 넌 내가 반드시 죽여주마.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여전히 시선을 앞에 둔 채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허리케인, 헌즈 선수가 5회 이내에 KO승을 장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회는 너무 깁니다. 나는 저 멀대를 3회에 끝낼 생각입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최강철은 기자들을 향해 자신 있는 말투로 대답했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그의 대답을 들은 헌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정말 가소로워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때 지금까지 정면을 주시하고 있던 최강철의 고개가 천천히 헌즈 쪽을 향해 돌아갔다.

“넌 이 새끼야, 일어나는 게 취미냐? 왜 인터뷰하다 말고 벌떡벌떡 일어나고 지랄이야!”

최강철의 도발에 일어나 있던 헌즈가 불쑥 다가와 멱살을 틀어쥐었다.

옆에 있던 경호원들이 말렸으나 헌즈의 완력을 당할 수가 없어 두 명이나 뒤로 튕겨 나갔다.

워낙 큰 키의 헌즈였기 때문에 최강철은 멱살을 잡힌 채 허공으로 끌려 올라갔다.

그러나 최강철의 눈은 더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놔라, 헌즈. 이 새끼야, 이거 새로 산 양복이야. 옷 구겨지면 넌 진짜 죽는다!”

뒤늦게 달려온 경호원들이 뜯어말렸기 때문에 소란은 가라앉았으나 헌즈는 분함을 참을 수 없는 듯 연신 뜨거움 콧김을 불어냈다.

차라리 한바탕 붙었다면 덜 분했을 것이다.

허리케인 이 자식은 교묘하게 사람의 감정을 건드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한 말은 오직 링에서 허리케인을 죽여 버리겠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최강철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기 때문에 인터뷰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

반면 최강철은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기자들의 질문을 하나씩 받아넘겼다.

그에게 쏟아진 질문들에는 당연히 헌즈의 플리커 잽과 공포의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관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최강철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플리커 잽이 상당한 위력을 보였겠지만 나한테는 안 됩니다. 그의 플리커 잽은 서커스에서 멀대들이나 하는 광대 짓에 불과한 겁니다. 공포의 스트레이트라 부르는데 그것 역시 과장된 겁니다. 그는 레너드의 아웃복싱을 잡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경기에서 졌습니다. 헌즈의 스트레이트는 듀란이나 쿠에바스같이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다니는 선수들에게나 위력이 있지, 레너드나 나처럼 빠른 발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아웃복싱을 하실 겁니까?”

“그건 경기 당일에 보시면 될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헌즈 선수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유리 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펀치는 면도날보다 더 날카롭고 미사일 같은 위력이 있습니다. 한 방만 걸리면 헌즈는 죽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결국 헌즈는 참지 못했다.

도발을 참지 못한 헌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또다시 최강철을 향해 몸을 날렸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미리 중간 지점을 차단하고 있던 경호원들의 벽에 가로막혔다.

그럼에도 헌즈의 분노 섞인 몸짓에 인터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미친 것 같았는데 트레이너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최강철을 향해 마구 욕설을 질러댔다.

흥미롭게 지켜보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대던 마틴의 입이 함지박하게 열린 건 헌즈가 퇴장하고 난 후였다.

“와우, 대박. 이봐, 토머스 가자고. 빨리 뿌려야지!”

“이래도 6 대 4냐?”

“아니, 정정해야겠어. 5 대 5다.”

“역시 베테랑이야. 크크크… 내일 경기 정말 기다려져. 우리 허리케인이 아주 작정하고 나왔구만.”

“헌즈는 오늘 잠자기 힘들겠다. 허리케인 정말 대단하네.”

“내가 말했잖아. 허리케인은 심리전에도 엄청 강하다고. 가자. 소문난 잔치라 그런가, 시작부터 화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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