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국회의원들의 비리가 터지기 시작한 것은 최강철이 시합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11월 초에 발생했다.
여당 쪽에 2명, 야당 쪽에 1명이었는데 기업들에게 불법으로 정치 자금을 받고 대가성 청탁을 관계 기관에 압력 행사 했다는 것이었다.
의원들은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언론이 가지고 있는 자료가 너무 정확했고 심지어 돈을 받은 장면까지 사진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에 구속을 면하기 어려웠다.
최강철이 하루 훈련을 마치고 제우스로 들어간 것은 저녁 8시 무렵이었다.
미리 가겠다는 연락을 했기 때문인지 김도환과 정철호는 사무실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최강철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더욱 정중해졌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신문 봤습니다. 일을 마무리 짓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처음이라 먼저 잔챙이들만 쳤습니다. 대가리가 굵은 놈들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새끼들은 돈을 받아도 직접 움직이지 않고 청탁을 들어주는 것조차 지들이 직접 하지 않더군요.”
“그래요?”
“다른 놈들을 시킵니다. 기업들에게는 돈을 받아 처먹지만 연결 고리는 다른 자들을 이용해서 끊어버리는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사장님, 그자들은 반드시 잘라내야 할 자들입니다. 잔챙이들만 솎아내서는 새로운 곁가지들이 계속 생겨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수를 쓰든 회장님이 미국에 계실 동안 일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5개월이면 충분히 성과를 보여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최강철의 우려에 김도환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이제 남아 있는 놈들은 전부 국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놈들이었다.
여당의 중진들, 그리고 야당의 원내 대표를 비롯해 정치권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다.
한심한 일이다.
일본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 그런 영향력을 지닐 때까지 아무런 견제조차 하지 못했으니 이 나라가 제대로 지탱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김도환이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그자들의 비리 패턴을 분석해 놨기 때문이다.
패턴만 알면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최강철의 고개가 돌아간 것은 김도환의 자신에 찬 대답을 들은 후였다.
그가 그렇게 자신감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정철호가 이끄는 보안 팀의 맹활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안 팀은 정보 팀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는데, 추적은 물론이고 도청과 알리바이 조사 등 검찰보다 더욱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 실장님, 그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지금 과천에 있습니다. 다음 주쯤 풀어줄 생각입니다.”
“야마구찌 구미라고 했죠?”
“예, 회장님.”
“일본 정치인들과 야쿠자가 손을 잡고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었군요.”
“야쿠자들은 현재 양성화되고 있는 과정이라 정치권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정입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죠. 그들은 야쿠자들을 자신들의 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야쿠자가 개입되어 있다면 조심해야 됩니다. 앞으로 일을 하실 때 요원들 안전에 최선을 다해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저는 다음 주에 미국으로 넘어갑니다. 이번에 가면 3월까지 머물다 돌아올 생각이니까 사장님께서 잘 마무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최강철이 일어서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까지 따라 나왔다.
그들의 태도는 더없이 정중해서 가끔가다 최강철을 당황시킬 정도다.
* * *
동경, 긴자.
요시다가 야마구찌 구미의 2인자 마사끼를 만난 곳은 긴자에서도 가장 번화가에 있는 비밀 요정이었다.
이곳은 야마구찌 구미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에게만 출입을 허락할 정도로 비밀리에 운영되었다.
야쿠자, 특히 야마구찌 구미의 사회적 위치는 대한민국의 폭력 조직과 그 위상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들의 조직원수는 무려 5만 명에 달했고 운영하는 기업체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카운팅이 어려울 만큼 천문학적이라 알려져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지니고 있는 마사끼는 차기 오야붕 자리에 오를 거라 예상되는 잠룡 중의 한 명으로 동경을 기반으로 하는 시미사파의 적통이었다.
시미사파는 야마구찌 구미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계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고 전투부대의 숫자와 능력이 다른 파를 압도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사끼도 요시다를 대하는 태도가 더없이 정중했다.
그들은 여자를 들이지 않았다.
이곳 요정의 여인들이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으나 주빈인 요시다가 말없이 술만 들이켰기 때문에 마주 앉은 마사끼는 여자들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동안 술만 마시던 요시다의 입이 열린 건 마사끼가 술을 더 시키기 위해 벨을 누르려 할 때였다.
“마사끼 상, 탈취된 금액이 전부 얼마죠?”
“1억 엔 정도 됩니다.”
“많군요. 내가 듣기로는 2명이 잡혔다고 하던데 그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아직… 지금 행방을 쫓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참…….”
손에 들고 있던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은 요시다가 탁자를 통통 두드렸다.
그가 뭔가를 생각할 때 늘 하던 버릇이었다.
“마사끼 상, 당신 생각에는 어떤 놈들 짓인 것 같습니까?”
“한국의 조직들을 전부 조사했지만 전혀 나오지 않더군요. 당한 놈들에게 들어보니 습격해 온 놈들은 조직에 있는 놈들과 분위기가 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군 쪽에서 움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한국 정부는 그런 일을 할 만큼 배짱 있는 놈이 없어요. 내가 아는 한국군은 임의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정권을 잡은 자들은 쿠데타를 성공시킨 전력이 있기 때문에 서울 근방 부대와 특수부대들은 전부 측근들로 채워져 있단 말입니다. 그런 놈들이 우릴 건드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에요.”
“그렇긴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정권을 잡은 자들은 일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권을 잡기 힘들었으니까요.”
마사끼가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막상 군에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요시다의 말에 의해 단박에 날아가 버리자 인정을 하면서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사건이 일본에서 벌어졌다면 단 며칠 만에 놈들의 정체를 밝혀냈겠지만 바다 건너 한국에서 벌어졌으니 걸리적거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다.
여기서 서투르게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눈앞에 있는 자는 일본 정치의 핵심 요직에 있는 자이고 그 뒤에는 더욱 거대한 산이 버티고 있었으니 조심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요시다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입에서 나온 것은 독촉이었다.
“서두르세요. 어르신의 진노가 대단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애써 한국에 마련해 놓은 조직이 무너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최대한 빨리 배후를 캐내어 소멸시켜야 합니다.”
“무조건 찾아내겠습니다. 돈을 가져갔으니 환전을 해야 할 것이고 그리되면 꼬리를 잡아낼 수 있습니다. 저희 오야붕께서는 전 조직을 동원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놈들을 찾아내라며 역정이 크셨습니다. 의원님, 야마구찌 구미는 명예를 생명처럼 압니다. 도전한 놈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철저히 응징하는 게 저희 조직의 철칙입니다. 우리가 지닌 최강 조직을 동원해서 놈들의 목을 따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 * *
최강철의 출국이 다가오면서 대한민국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비록 아직 시합이 2달이나 남아 있었지만 그가 출국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방송의 생명은 시청률이고 그 시청률은 국민들의 관심사로부터 나온다.
그랬기에 MBC에서는 최강철의 출국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집 방송을 마련했다.
이번 특집 방송은 그동안 진행해 왔던 딱딱한 방식에서 벗어나 유명한 연예인들을 출연시켜 전문가들과 이야기 나누는 방식을 적용시켰다.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은 이창래였다.
그는 이번 경기의 중계방송을 무리 없이 따냈는데 저번 방어전을 KBS에 양보해 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세상은 같이 먹고살아야 탈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그동안 최강철의 도움으로 독점 중계방송을 했지만 KBS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창래는 경영층을 설득해서 향후의 경기는 한 번씩 나눠 먹는 것으로 이면 계약을 했던 것이다.
처음 시도하는 포맷이었기에 이창래는 직접 스튜디오까지 내려와 들어오는 연예인들을 마중했다.
오늘 출연하는 연예인은 일요 드라마 ‘청춘’에서 주인공으로 나와 인기를 끌고 있는 김준혁과 댄스 가수 박석진, 그리고 새로 방영되는 ‘뉴욕의 사랑’ 여주인공 미녀 탤런트 유진선이었다.
그들을 섭외하게 된 배경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지녔다는 것과 최강철의 광팬들로 상당한 복싱 지식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특히 유진선은 미모의 여자 탤런트임에도 얼마나 최강철을 좋아했는지 전문가들 정도만 알 정도의 복싱 룰까지 줄줄 꿰고 있을 정도였다.
프로그램의 진행은 이종엽과 윤근모가 맡았다.
새로운 포맷을 시도했지만 그들을 빼고는 최강철 특집 방송을 제작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은 최강철의 주요 경기를 거의 다 중계했기 때문에 시합 진행 과정은 물론이고 현지 분위기도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종엽의 오프닝 멘트가 시작되는 순간 담당 PD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복싱 특집 방송을 하면서 이런 포맷은 처음이었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최강철 선수와 로이드 허니건 선수의 대결을 맞이하여 두 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이 경기를 기다리는 국민들의 반응을 초대 손님들과 함께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출연자분들을 소개드리겠습니다.”
이종엽이 신호를 보내자 출연자들이 자신의 소개를 해나갔다.
사실 예의에 불과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의 소개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출연자들의 인사가 끝나자 이종엽의 능숙한 진행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틀 후, 최강철 선수가 허니건과의 대결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데요. 막상 출국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민국 전체가 엄청난 긴장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김준혁 씨 주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정말 난리가 아닙니다. 촬영장에서도 온통 최강철 선수의 시합 얘기뿐이에요. 특히 저는 최강철 선수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에 더욱 이 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준혁 씨는 왜 최강철 선수를 좋아하는 거죠?”
“아, 그렇게 물으시니까 조금 당황스럽네요. 최강철 선수를 좋아하지 않는 국민들이 있을까요. 하지만 굳이 이야기한다면 저는 그 사람의 인간성을 꼽고 싶습니다. 최강철 선수는 언제나 경이적인 복싱을 펼치며 사람들을 열광 속에 빠뜨립니다. 저는 허리케인의 경기를 볼 때마다 전율에 빠질 정도였어요. 그러나 더욱 저를 감동시킨 건 그의 솔직함과 사회에 대한 희생입니다. 파이트머니로 받은 돈을 전부 고아원과 장학금으로 쏟아붓고 있는 게 과연 일반인의 생각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더군다나 자신은 아직 전셋집에 살면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는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유진선 씨에게 묻겠습니다. 유진선 씨는 여자분인데 최강철 선수의 경기를 지금까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봤다면서요?”
“예, 저는 최강철 선수가 챔피언이 되기 전부터 봤어요.”
“여자분이 복싱 경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드문 일인데요.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북미 타이틀전 시합을 우연하게 본 것이 계기였어요. 저는 그때 최강철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는데 시합에서 이기고 두 팔을 번쩍 드는데 얼마나 멋있던지. 그때부터 허리케인의 경기라면 무조건 봤어요.”
“그렇군요. 박석진 씨도 엄청난 광팬이라고 알려졌는데요. 이번 경기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저는 무섭습니다. 허니건이 워낙 강해서 혹시라도 최강철 선수가 질까 봐 지금부터 떨고 있어요.”
“허니건 선수의 경기를 봤습니까?”
“봤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송해 준 방어전을 전부 봤는데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저는 사람들이 왜 그 선수를 야수라고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막상 경기를 보니까 알겠더군요. 하지만 저는 결국 최강철 선수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요. 허리케인은 야수의 공포를 충분히 휩쓸어 버릴 겁니다.”
“하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양 선수의 동영상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경기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도답게 담당 PD는 출연자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경기 장면 중간중간 화면을 스톱시키는 기술을 적용했다.
그때마다 이종엽과 윤근모는 출연자들의 의견을 물으며 흥미를 끌어 올렸다.
의도적이다.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대답했으니 시청자들의 공감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을 향해 다가가면서 진행자와 출연진들은 최강철의 승리를 기원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집중시켰다.
화면에서는 거리에 나가 인터뷰한 국민들의 반응을 고스란히 담긴 화면을 내보냈기에 현장감이 팍팍 살아났다.
“드디어 이틀 후 최강철 선수가 결전이 벌어지는 미국으로 떠납니다. 국민 여러분의 간절한 성원처럼 최강철 선수가 이겨주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공항으로 배웅 나가시는 분 있나요?”
프로그램을 끝내며 재미로 던진 질문이었다.
미리 대본에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종엽이 가는 길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 유진선의 입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저는 배웅이 아니라 최강철 선수와 같이 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뉴욕 쪽에 촬영이 잡혀 있는데 공교롭게도 최강철 선수와 함께 타고 간대요. 정말 대박이죠?”
“우와, 그렇다면 유진선 씨 가는 길에 최강철 선수와 인터뷰 좀 해주세요. 명예 기자로 임명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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