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 * *
일본 언론과 국민들의 반응도 대단했지만 한국 국민들의 반응은 그보다 더했다.
최강철의 의무 방어전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그 소란의 원인은 바로 방어전 장소가 일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자빠졌어. 왜 일본이야, 그건 절대 안 돼!”
“왜 우리의 영웅이 일본에서 방어전을 치러야 한단 말이냐. 이 협상은 다시 해야 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무슨 이유 때문에 일본에서 방어전을 치르는지 밝혀라.”
국민들의 불만이 폭주하자 언론이 나섰다.
언론의 목숨 줄은 국민들에게 달려 있으니 국민들의 의문과 불만을 해결해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시합 장소가 일본 동경으로 결정된 이유는 복잡하고도 간단한 것이었다.
바로 돈이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일본에는 있는 것.
바로 거액의 자금을 배팅할 수 있는 거대 프로모션의 존재였다.
한국에 난립되어 있는 프로모션의 수준은 아시아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역량도 작아서 최강철의 경기를 유치할 능력이 없었다.
더불어 시장도 적다.
일본은 막대한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시합을 유치해도 충분히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한국 시장의 규모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서의 시합 이유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불만에 차 있던 국민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결국 돈 때문이라는 건 사람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영웅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모멸과 수치로 물들였던 일본이 상대였기에 한국 국민들은 더욱더 커다란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과거 한국에는 걸출한 미들급의 스타가 있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복싱영웅 와지마 고이치를 KO로 때려잡고 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유제두였다.
그 당시 한국 국민들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와지마 고이치를 꺾은 유제두가 롱런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유제두는 복수전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바로 일본에서 말이다.
한국 국민들을 분노케 한 것은 경기 전날부터 설사가 계속되었고 시합 당일에는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유제두 선수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최강철의 일본 원정이 두려운 거다.
혹시라도 과거처럼 일본의 술수에 말려들어 최강철이 무력하게 타이틀을 뺏긴다면 한국 국민들은 전쟁도 불사할 수 있을 만큼 분노하게 될 것이다.
“깡철이 훈련에 돌입했다며?”
“신문에 보니까 그렇게 나오더라.”
“여전히 학교는 다니고?”
“쩝… 그놈 고집을 누가 말려. 기어코 학교는 다닌다네. 아우, 씨발 그놈의 고집. 기사에서 보니까 서울대에서는 그놈 때문에 학칙까지 바꿨다고 하더구만. 하여간 똥고집이야.”
“시합이 정해지면 열심히 훈련이나 할 것이지. 그 자식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류광일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최강철이 시합을 앞둔 상태에서 계속 학교를 다닌 게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것은 이번 방어전에 대한 걱정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기에 김영호의 목소리도 그리 밝지 않았다.
“그놈 학교 성적이 탑이라더라. 입학할 때도 수석 했다잖아. 그러니까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겠지.”
“도대체 그 자식은 슈퍼스타가 뭐 하러 공부를 해. 한번 경기를 치르면 엄청난 개런티를 받는 놈이. 이번에도 1,200만 달러를 받는다며?”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 저번에 잠깐 인터뷰한 거 보니 자신은 복서지만 학생이니까 본분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더라. 학업을 등한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나 뭐라나.”
“등한시는 무슨, 권투 선수가 시합 있으면 빼먹을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러냐?”
“기자 새끼들이 생지랄을 한다잖아. 어떤 놈은 최강철이 학교 공부 안 하고 훈련만 하는 거 아니냐는 취재까지 나갔대. 내가 알기로는 성적 가지고도 시비 거는 놈들이 많은가 보더라. 권투 선수가 공부 잘하는 게 신기한 일이지만 거기에 무슨 부정이 있는 것처럼 달라붙어서 지랄하는 놈은 또 뭐냐고.”
“미친 새끼들이 염병하는 거지. 하여간 한국 놈들은 영웅을 물 먹이려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그런 새끼들은 전부 한강물에 빠뜨려야 해.”
“이제 3개월 조금 넘게 남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려. 씨발, 다른 건 몰라도 이번만큼은 꼭 이겨줘야 되는데…….”
“난 동경에서 경기한다는 게 너무 마음이 걸려. 쪽발이 새끼들이 무슨 지랄을 할지 모르잖아.”
“무조건 한국에서 음식을 공수해 가야지. 교민들도 이젠 못 믿겠어. 그렇게 먼 곳이 아니니까 깡철이 먹을 건 준비해서 가야 한다고.”
“그걸 누가 준비해?”
“깡철이 엄마 있잖아.”
“말은 쉽다. 그걸 혼자서 어떻게 해. 스태프들도 있을 텐데 그렇게 많은 걸 어떻게 준비하냐!”
“그럼 우리가 준비해 줄까?”
“씨발,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 * *
민정당의 국회의원 유기춘과 검찰총장 정용범은 고급 요정 ‘월영’으로 들어갔다.
유기춘은 벌써 3선 의원으로 서울에 지역구를 가진 중진이었고 정용범은 현 정권의 실세 중 실세였다.
달빛이 물든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있은 황자연이 살포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이곳 ‘월영’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마담으로 30대 중반이었지만 아직도 20대 처녀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영감님들, 어서 오세요.”
“황 마담 잘 지냈나. 더욱 예뻐졌군그래.”
“호호… 거짓말 하지 마세요. 요즘 어린애들만 찾으시면서요. 저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 점점 시들어가고 있답니다.”
황자연의 얼굴에서 고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달빛에 비춘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뇌쇄적인 미소가 담겨 있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심장이 벌렁거린 유기춘의 입에서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아이고, 이런. 그런 참담한 말이 어디 있어. 자네는 우리 모두의 연인일세.”
“말씀만이라도 고마우세요.”
“말만 그런 게 아니라네. 난 지금도 자네가 나에게 정을 준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남들이 흉 봐요.”
“껄껄걸… 그래, 요시다 상은 오셨나?”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세요. 오신 지 5분 정도 되었어요.”
“아이구, 이런 결례를. 정 총장 얼른 들어갑시다.”
황자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를 향해 너스레를 떨던 유기춘이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는데 무척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황자연이 부지런히 걸어 나가 멋들어지게 지어진 한옥의 밀실로 데려갔다.
조심스러운 몸짓.
문을 여는 손길 하나에도 기품이 배어 있어 그녀가 요정에서 일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황자연이 문을 열어주자 유기춘과 정용범이 상석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요시다 상,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희들이 늦은 결례,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나도 방금 왔습니다. 그만하고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럼…….”
능숙한 일본어로 인사를 나눈 자들이 자리에 앉는 걸 보며 황자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 역시 일본어를 할 줄 안다.
정식적으로 배운 건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고급 요정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국을 이끄는 자들이 일본인에게 저자세로 대하는 것을 보면서 수치심이 솟구쳐 올라왔으나 그녀는 곧 얼굴을 다시 고친 후 그들이 떠드는 것을 지켜봤다.
놈들은 자리에 앉은 후에도 한참 동안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느라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기춘의 고개가 돌아오며 황자연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황 마담, 우리 봉황으로 준비해 주게. 그리고 애들은 미리 얘기했던 애들로 데려오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뒷걸음으로 물러난 황자연이 문을 닫은 후 몸을 돌렸다.
병신 같은 놈들.
국민들을 이끈다는 놈들이 한 상에 10만 원이나 하는 봉황을 처먹어대니 국민들 등골이 휘어질 수밖에.
“요시다 상, 요즘 뜸하셨습니다. 그래, 어르신께서는 잘 계시죠?”
“그럼요, 아주 건강하시답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일본 정치계의 대부인 히데끼를 말하는 것이었다.
히데끼는 일본 관동을 대표하는 귀족 가문의 적장자로서 일본 정치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관동 절반이 그의 재산이라고 알려질 만큼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유기춘과 정용범은 일본 동경대를 졸업한 자들로 히데끼와는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현재 한일 양국 정치인들로 은밀하게 결성된 ‘국화와 칼’의 멤버들이었다.
현재 국회의원 중에는 ‘국화와 칼’의 멤버는 전부 합해 15명이나 달했고 일본과 관련된 정치 현안이 발생되면 언제나 한목소리를 내며 정치 세력화 되는 중이었다.
정치인의 기본은 자금이고 그들의 자금은 일본에서 나오기 때문에 벌써 오래전부터 친일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수많은 정치인이 기업들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게 들통 나 감옥에 들어가도 그들만큼은 절대 그럴 일이 없었다.
그들의 정치 자금은 일본을 통해 들어와 깨끗이 세탁되기 때문에 검찰이나 검찰, 심지어 정권에서도 추적이 불가능했다.
“며칠 후면 칠순이라고 하시던데 그때는 저희들도 넘어가서 축하해 드릴 예정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저희들의 정신적인 우상이십니다.”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시죠. 어르신은 저희 일본 의원들에게도 그런 존재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갑자기 오시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 어르신께서 급히 보내셨어요. 정보에 의하면 이번에 한국 정부에서 정신대 관련한 항의를 대대적으로 할 계획이라는군요. 어르신께서는 그걸 걱정하고 계십니다. 왜 한국은 과거에 연연해서 자꾸 지난 일을 들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늘 필요할 때마다 써먹은 수법이죠. 한국 정부에서 뭔가 일본 쪽에 얻어내고 싶을 때마다 하는 짓이니 별일 아닐 겁니다.”
“제가 온 건 그걸 빨리 알아내 달라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쪽에서도 준비를 할 테니까요. 더불어, 어르신께서는 우리 멤버들한테 선물을 주고 오라는 지시가 계셨습니다.”
“아… 매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물이란 단어에 유기춘과 정용범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지금 요시다가 말한 선물은 돈을 주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둘은 서로를 힐끗 바라본 후 웃음을 머금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자꾸 받다 보면 이제 안 주면 서운할 지경이다.
“대답은 동경에서 듣겠습니다. 저는 내일까지 우리 멤버들을 만난 후 돌아갈 예정이거든요.”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자, 그럼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즐기십시다. 우리 동지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저절로 즐거움이 피어나는군요.”
“조금 있으면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들어올 겁니다. 여자는 한국 여자가 최고지요. 요시다 상, 안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음식이 들어오면서 세 명의 여자가 같이 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절색들이다.
‘월영’이 한국에서 가장 비싼 요정이라더니 나온 여자들의 미모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술잔이 오고 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요시다의 자세가 점점 풀어져 갔다.
그는 오늘따라 파트너의 미모가 마음에 들었는지 술잔을 거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윤미영은 유쾌하게 떠드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연신 미소를 흘렸다.
그녀도 일본말을 알아듣는다.
비록 지금은 요정에서 일하고 있지만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슬쩍 미소가 지워진 것은 요시다의 입에서 최강철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최강철의 방어전이 일본에서 열립니다. 두 분도 이번 시합에 대해서 알겠지요?”
“그럼요, 한국도 지금 난리가 아니에요.”
“두 분은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얼굴이 잔뜩 붉어진 요시다가 눈빛을 빛내며 묻자 유기춘과 정용범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물들었다.
평소의 요시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놈이 아니다.
워낙 철두철미해서 교묘한 화술로 대화를 진행하는데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그가 술에 취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대답할 일도 아니었다.
놈의 빛나는 시선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이제 곧 정치 자금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상대방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두 사람이 쉽게 대답하지 않자 술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낸 요시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커억… 그냥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세계 복싱계의 전문가들은 최강철이 우세하다고 하던데 두 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상식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최강철의 전적이 워낙 좋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그놈은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요. 엔도가 잘하지만 아무래도 최강철이 더 강할 것 같군요.”
“아뇨, 이번 경기는 엔도가 이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조건 엔도가 이겨야 하기 때문이죠. 어떤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지금 일본 경제가 침체를 겪고 있어요. 일본이 살아나야 두 분이 삽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 정치인들도 다시 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엔도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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