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 * *
돈 킹이 돌아갔다.
아마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비행기를 탈지 모르겠다.
일본의 경제력이 세계 2위에까지 올랐다고 어느 뉴스에서 봤지만 이 정도의 제안을 해올 줄은 정말 몰랐다.
경제가 휘청거린다는 소릴 들었음에도 이 정도로 큰 베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이유가 있겠지.
자신과 엔도의 시합은 양국이 초미의 관심을 갖게 되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명성을 감안한다면 전 세계 복싱 팬들의 눈이 한꺼번에 몰릴 테니 일본으로서는 어쩌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돈 킹이 떠난 후에도 최강철은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아직 시합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미국에서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는 윤성호한테 연락하지 않았고 김도환에게도 정보를 주지 않았다.
세상이 시끄러워져 자신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부터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지게 된다.
나중에… 늦출 수 있을 때까지 늦춘 후 시합이 결정되면 그때 알려줘도 된다.
나는 자유가 좋다.
예전엔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학교생활이 점점 좋아졌다.
시합이 잡히기 전까지 최강철은 마음껏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며 살았다.
동아리에도 자주 갔고 체육대회도 참여해서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김철중과 일당들은 마치 그를 신처럼 섬기며 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격의가 없어져 스스럼없이 농담을 했다.
여전히 사람들을 만났고 여전히 수업 시간에는 정신을 집중했다.
최강철은 사람들을 만날 때 될 수 있으면 자신의 말보다 상대의 말에 집중했고 그가 살아온 과거에 대해서 주로 물었으며 사상과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들었다.
인간간의 관계는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이익, 정, 의리, 혈연, 지연, 학연, 사랑, 미움, 증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감정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간다.
최강철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놈과는 상종조차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과연 누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종교에 나오는 성인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런 것들은 보통의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통상적 범주였으니 최강철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그가 가장 중점적으로 본 것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가진 적이 없었다.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변명은 부끄러움에 다름없다.
자신이 풍요로운 삶을 살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지만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한 건 자신의 불행을 탓하며 인생의 여유를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강철이 서울 외곽에 고아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작년 여름 방어전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부터였다.
고아원을 만들어놓고 정부의 지원금을 착복하는 놈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
그런 자들은 아이들을 노예로 생각하며 인생 자체를 망가뜨려 고아로 태어난 저주를 평 생동안 잊지 못하게 만드는 죄를 지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아로 태어난 것은 그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오로지 어른들의 잘못이었고 사회는 그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서울 외곽에 건물들을 구입해서 최상의 시설을 만들어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최강철은 고아원들을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별도의 회사 ‘헤븐’을 만들어 원장이나 보모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그동안 고아원에 문제가 발생한 원인 중의 하나가 관리 공무원들의 소홀이었다.
일선 업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수많은 고아원을 관리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고아원들은 미친 자들로 인해 수렁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최강철이 우선적으로 설립한 고아원은 세 군데였다.
‘헤븐’은 비영리단체였고 오로지 최강철의 자금으로 운영되었는데, 처음에는 7명의 직원으로부터 시작했다.
국내에서 가장 좋은 고아원을 만들고 싶었다.
최상의 시설과 케어 시스템을 구축해서 고아들이 꿈을 지닌 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최강철은 자신이 구상한 이 ‘휴먼 프로젝트’를 점점 키워갈 생각이었다.
맨 처음 고아들을 봤을 때 느꼈던 그 감동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의 고마움보다 훨씬 커다란 감동이었고 기쁨이었으니 그는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죽는 그날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 *
엔도의 통합 타이틀 도전 사실은 일본에서 먼저 터졌다.
시합이 정해졌다는 사실을 돈 킹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하루 일찍 기사가 터졌으니 타이칸 프로모션 쪽에서 일부러 흘렸거나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 분명했다.
<후지산의 호랑이 엔도, 드디어 허리케인 속으로 뛰어들다.>
동경일보가 터뜨린 특종에는 시합 일자와 장소가 적혀 있었고 두 선수의 개런티가 얼마인지까지 적어놨을 정도로 세부적이었기에 일본 언론을 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실 확인이 먼저다.
동경일보가 메이저 신문사였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일본 언론은 사실 확인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사실이 확인된다면 이 건 핵폭탄에 버금가는 뉴스였으니 당분간 일본의 전 기자들이 이 시합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확인되기까지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돈 킹과 타이칸 프로모션의 아끼야마가 공식적으로 두 선수의 시합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의 언론까지 전부 난리가 났다.
최강철이 벌인 듀란과의 세기적인 대결에서 일본 국민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관심을 두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남의 잔치기 때문이다. 그것도 속국이라 생각하고 있는 한국이었기에 그들은 두 선수의 대결을 폄하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이번 시합은 다르다.
일본의 영웅 엔도의 출전이었고 상대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허리케인이었으니, 이 대결은 일본 복싱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정도로 중요한 경기였다.
간절한 바람과 자존심의 회복.
일본 언론은 물론이고 일본 국민들은 시합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그러한 열망에 사로잡히며 들끓기 시작했다.
* * *
최강철은 이성일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이성일은 김연경과 사랑에 빠진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소개를 주지 않다가 어쩐 일인지 오늘 불쑥 나오라는 말을 했다.
그녀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했고 아름다운 목걸이를 샀다.
그러고 싶었다.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그녀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약속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홀 안에서 서빙하던 종업원이 다가오다가 최강철의 얼굴을 보고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재빨리 손가락을 들어 입으로 올렸다.
“조용히 하시고, 이성일이란 사람이 와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안내해 주세요.”
“예… 예.”
종업원은 사색이 된 상태로 그를 맨 안쪽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레스토랑의 홀은 어두워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기에 아무런 탈 없이 자리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이성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놈의 옆에는 김연경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최강철을 보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자식아, 왜 이렇게 늦었어.”
“선물 좀 준비하느라고. 연경 씨, 제가 꽃을 사왔어요. 받아주시겠어요?”
“고마워요.”
긴장하고 있던 김연경이 앞으로 내밀어진 장미 다발을 받아들며 당황함을 숨기지 않았다.
꽃이란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존경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성일은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누가 보면 네가 프러포즈하는 줄 알겠다. 미친놈아, 친구 여자 친구한테 꽃다발을 선물하는 놈이 어디 있어!”
“내 맘이야.”
“아이고, 속 터져. 앉아라, 뻘쭘하게 서 있지 말고.”
“응, 그런데 나 선물 하나 더 줄 게 있는데…….”
최강철이 자리에 앉으면서 주섬주섬 안주머니에서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김연경의 앞으로 밀어냈다.
“이건 제가 연경 씨를 공식적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기 때문에 준비한 거예요.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런 걸…….”
그녀가 선뜻 받아 들지 못했다.
오늘 만남은 이성일이 정식으로 최강철에게 소개시켜 주기 위함일 뿐인데 너무 과분한 짓을 계속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강철아, 너 오늘 왜 그러니. 혹시 미친 거니?”
“성일이가 이런 건 사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먼저 사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연경 씨한테 잘 보여야 하거든요.”
“왜요?”
“앞으로 두 사람이 잘되면 거기 가서 하숙할 생각입니다. 연경 씨 음식 솜씨가 좋다고 성일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더군요. 권투 선수는 잘 먹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미리 뇌물을 주는 겁니다.”
“환장하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성일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그녀를 처음 볼 때도 이상한 짓을 해서 힘들게 만들더니 이놈은 공식적인 첫 만남에서 아주 작정한 듯 염병을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뻔뻔한 얼굴로 김연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열어보세요. 선물은 받았을 때 열어보는 게 예의래요.”
“예…….”
강압에 의해 그녀의 손이 어쩔 수 없이 선물 상자로 향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포장을 풀고 내용물을 확인한 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려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십자가가 달려 있는 목걸이였기 때문이다.
“아주 갈수록 태산이네. 너 연경 씨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란 건 어떻게 알았냐?”
“그냥, 연경 씨 얼굴에서 성스러운 기운이 마구 배어 나오잖아.”
“지랄한다…….”
“강철 씨, 이거 무척 비싸게 보여요. 저한테 왜 이런 선물을 주세요?”
“비싼 거 아닙니다. 오다가 명동에 들러서 좌판대에 있는 거 사 왔어요. 누가 보면 십자가에 다이아몬드 박혔다고 오해할 정도로 잘 만들었더라고요. 그냥 성의로 사온 거니까 받아주세요. 파는 사람 말로는 그게 그냥 십자가가 아니랍니다. 악마나 유령이 접근할 수 없도록 특별하게 만든 거라네요.”
“연경 씨는 착해서 그냥 믿는 사람이야. 넌 어째 갈수록 뻥이 커지냐?”
“설마 그걸 믿겠어. 안 그래요, 연경 씨?
“정말… 거짓말이었어요?”
“당연하죠. 세상에 악마를 막아주는 목걸이가 어디 있어요. 그냥 재미 삼아 한 말이에요. 그래도 충분히 예쁘니까 하고 다니세요. 저놈은 이런 목걸이 같은 거 절대 선물 못 하는 놈이거든요.”
“호호… 고마워요. 그러지 않아도 이런 목걸이 하나 가지고 싶었거든요.”
“둘이 아주 잘하는 짓이다. 이 자식아, 이왕이면 보석상에 가서 비싼 거 사오지 그랬어. 챔피언이 쩨쩨하게 명동 거리에서 선물을 사!”
“인마, 선물은 마음이 중요한 거야. 연경 씨, 안 그래요?”
“맞아요.”
“오늘은 제가 살 테니까 연경 씨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시키세요. 성일이, 넌 돈가스 시켜!”
“난 왜?”
“나 돈 별로 없다. 연경 씨 사줄 돈밖에 없어.”
“미친놈.”
즐거운 저녁 식사다.
예전에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을 만큼 유쾌하고 즐거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종업원에게 모른 체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금슬금 이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인을 요청하거나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해올 것이라 예상했으나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고 한마디씩 하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최강철 선수, 반드시 이겨주십시오.”
“식사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꼭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시합, 꼭 KO로 잡아주세요.”
“다른 놈은 몰라도 엔도만큼은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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