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 * *
최강철은 남아 있는 자금 150억을 5 대 증권사에 자신의 명의로 분산 예치한 후 본격적으로 삼성전자의 주식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의 자금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삼성 측에서 긴장을 하게 되고 주가가 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최강철은 기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야금야금 삼성전자의 주식을 매입했다.
어차피 지금 이 시기의 삼성전자 주가는 횡보를 거듭할 것이기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서지영을 오라고 한 것은 마이다스 CKC의 한국 지부에 관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둘째 형의 결혼 때문이었다.
둘째 형은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용케도 바리스타 아가씨를 사귀어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최강철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성격이 당차고 생활력이 강해서 눈여겨보던 사람이었기에 둘째 형한테 접근해 보라며 권유했는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둘째 형은 성격이 물렀고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최강철의 협박에 의해 성실한 생활을 한 것이 그녀의 허락을 받아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더없이 기뻤다.
사람은 하나만 보면 다른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생의 형수는 찾아갈 때마다 집안이 개판이었고 돈에 대한 욕심만 있었을 뿐 아껴 쓰거나 저축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일하는 커피숍은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반들거릴 만큼 깨끗했다.
기쁜 마음으로 둘째 형의 신혼집을 구해주었다.
나름대로 형은 월급을 쪼개어 적금을 들었고 그녀 역시 나름대로 저축한 돈이 있었으나 최강철은 커피숍과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사주었다.
하지만 노름을 좋아하는 형이 절대 건드릴 수 없도록 저당권을 설정해 두었다.
비록 명의는 형의 이름으로 해주었지만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를 해두었다.
“형, 이 집은 형 집이야. 하지만 절대 내 동의 없이는 집을 팔 수 없어. 그리고 융자도 받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만들어두었거든. 이것 또한 압구정에 있는 건물과 마찬가지로 형이 모든 약속을 지켰을 때 넘겨줄 거야.”
둘째 형은 이의를 달지 않았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모르나 형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눈치였다.
* * *
신용석은 마이다스 CKC의 미국 본사 사장이 서지영이란 것을 확인한 후 믿겨지지 않은 듯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서지영의 당찬 모습을 보면서 점점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서지영은 벌써 4년 가까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녀 스스로조차 모르는 관록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신용석을 대하는 태도는 최강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의 행동과 이야기는 단호했는데 신용석의 연봉을 책정하는 것부터 직원들의 복지, 그리고 앞으로의 투자 패턴에 대해서 꼼꼼히 짚어가며 지시를 내렸다.
일종의 군기 잡기다. 그리고 그건 제대로 먹혀 신용석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에게 90도로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가 보인 오너로서의 기품은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우와, 지영 씨. 이제 보니까 포스가 장난 아니네. 신 선배가 꼼짝도 못 하는구만.”
“그게 다 강철 씨한테 배운 거야. 나보고 그렇게 하라며?”
“그래도 그렇게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냐. 오죽하면 옆에서 내가 한마디도 못 했겠어.”
“호호, 그 사람 긴장하긴 하더라.”
서지영이 유쾌하게 웃었다.
미리 최강철에게 태도에 관한 코치를 받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잘했다는 칭찬을 받자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은 같이 웃었다.
이 여자로 인해 자신은 마음 편하게 복싱을 할 수 있었다.
비록 나이와 경험이 적었으나 서지영은 자신이 없는 동안 마이다스 CKC를 훌륭하게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서지영은 물론이고 마이다스 CKC의 부사장으로 있는 클로이나 수잔, 황인혜까지 전부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회사의 운영에 관한 것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다.
“강철 씨, 자고 갈 거야?”
“응, 그럴 생각이야. 지영 씨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잖아. 내일 둘째 형 결혼식인데 내가 모시고 가야지.”
“성일 씨가 놀리지 않을까?”
“그놈 취미가 놀리는 건데, 뭐. 아마 내가 집으로 가면 또 다른 트집을 잡을 거야. 예쁜 아가씨 내 팽개치고 집에 왔다면서 밤새 괴롭힐지 몰라.”
“난 두 사람만 보면 유쾌해져. 강철 씨한테 그렇게 친한 친구가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 더없이 잘 어울린단 말이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해졌다며?”
“아니,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그놈은 내 생명과도 같은 놈이야.”
최강철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하자 서지영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이성일로부터 고등학교 동창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친한 친구 사이라고 여겼는데 최강철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웃고 있으나 이성일에 대한 말을 하면서 나타낸 표정은 우정을 넘어선 신념 같은 것이었다.
그랬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 남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조금의 의심조차 할 필요조차 없이.
서지영이 슬그머니 입을 닫자 최강철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지영 씨를 무척 보고 싶어 하셔. 내일 가면 그때처럼 한동안 붙잡혀 있어야 할 텐데 괜찮겠어?”
“난 괜찮아. 처음에는 무척 긴장했었는데 어머님이 너무 잘해주셔서 그때도 좋았어. 걱정하지 마세요. 잘할 테니까.”
“착하네. 우리 지영 씨.”
* * *
둘째 형의 결혼을 보면서 부모님은 많이 우셨다.
어쩌면 둘째 형은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는지 모른다.
부모님의 가슴속에는 동생들을 위한 희생과 장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큰형의 존재가 가장 클 수밖에 없겠지만 둘째 형은 그에 못지않은 아픔으로 당신들을 괴롭혀 온 자식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비뚤어지더니 고등학교 들어서는 싸움 벌이기 일쑤였고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면서 대학을 못 간 게 가난한 집안 탓이라며 무작정 성질을 부려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장기 하사관으로 군대에 들어가서도 속 썩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군인 신분으로 노름을 해서 뒷돈을 대주느라 아버지의 고민과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들이 영창을 간다는데 모른 체할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신분조차 모르는 여자와 동거를 하면서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어머니는 기절 직전까지 가셨다.
어머니가 본 그녀는 술집 작부처럼 천박했고 더없이 게을러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음에도 둘째 형은 고집을 꺾지 않아 어머니의 속을 바짝바짝 마르게 만들었다.
그런 아들이 버젓이 남부럽지 않게 장가를 가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새로 맞아들이는 며느리는 예전에 봤던 여자보다 천배는 예뻤고 당차서 흡족함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아버지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최강철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결혼식이 진행되고 폐백이 끝날 때까지 여러 번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셨는데 둘째 형에 대한 억눌려 왔던 감정이 북받쳐 오르셨던 게 분명했다.
“강철아, 고맙다. 너로 인해 강덕이가 이렇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애비가 너무 기쁘구나. 나는 이제 걱정이 없어. 이제 강숙이하고 너만 결혼하면 택시 운전도 그만둘 생각이다. 전부 결혼하면 시골에 내려가서 편히 쉬고 싶구나.”
“예, 아버지.”
“저 처자와 결혼할 생각이여?”
아버지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서지영을 가리켰다.
여전히 서지영의 외모는 예식장을 빛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직 막내 누나도 결혼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저는 학생이고 나이가 있으니까 천천히 할 생각이에요.”
“강철아, 좋은 사람은 빨리 잡아야 하는 겨. 사람의 인연이란 건 무서워서 시간이란 괴물한테 잡혀 먹기도 하더라. 그러니 정말 좋으면 그냥혀. 강숙이는 아직 사귀는 사람이 없는데 언제 하겄냐.”
“지금은 할 일이 많아서요. 결정이 되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려. 알아서 잘 허겄지. 강철아, 난 언제나 네가 자랑스럽다. 우리 아들 덕분에 내가 요즘 너무 행복해서 꿈속에서 사는 것 같어.”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냥, 너무 좋아서 그런다.”
돈 킹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서지영이 떠나고 3일이 지났을 때였다.
그의 이야기는 무척 복잡했는데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WBA 챔피언 측과 통합 타이틀에 관한 협의를 지속해 왔는데 실무적인 협상 과정에서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바로 최근 방어전을 치른 허니건의 부상이었다.
허니건은 KO승으로 타이틀을 방어했으나 그 과정에서 꽤 커다란 손목 부상을 당해 한동안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허니건 측에서 자신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핑계를 댄 것일 수도 있고 진짜 부상을 당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경기를 텔레비전을 통해 녹화로 보면서 부상을 당했다는 징후는 발견할 수 없었지만 복서의 부상은 쉽게 밖으로 노출되지 않으니 확신하기 어려웠다.
돈 킹은 그의 말대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돈이 달려 있는 빅 이벤트를 추진하면서 절대 허투루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원인은 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반대쪽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원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언제나 많은 고민과 난관 속에서 힘들게 성사되는 것이니 돈 킹을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통합 타이틀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은 건 돈 킹이 통합 타이틀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었다.
끈을 놓지 않는다는 건 완벽한 무산이 아니라는 뜻이기에 언론도 함부로 보도하지 못했다.
전혀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 것은 엔도와의 대결 어쩌고 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시간이 가면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4월 말이었다.
갑자기 방문하겠다는 통보를 한 후 돈 킹이 전격적으로 최강철을 찾아왔던 것이다.
돈 킹의 내한을 확인한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그는 오랜만에 최강철을 보기 위해 왔다는 말만 남겨놓고 공항을 떠났다.
순진하게 그 말을 믿을 언론이 누가 있겠는가.
그랬기에 기자들은 돈 킹이 어떤 이유로 한국을 찾았는지 알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였으나 럼블 측에서는 어떤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허리케인, 잘 있었나?”
“통합 타이틀전도 물 건너갔다면서 웬일이십니까. 혹시 그게 다시 추진되고 있는 건가요?”
“아닐세, 허니건의 부상은 사실이라네. 그놈은 지금 병원에 있어. 꽤나 부상이 심했던 모양이야.”
“그럼 웬일로 오신 거죠? 굳이 보고 이야기하자니까 겁나잖습니까?”
“허허… 이 사람, 언론에도 말했지만 진짜 자네를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더불어 상의할 것도 있고.”
돈 킹이 웃는 걸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두 가지 이유를 말했지만 결국 그가 온 것은 자신과 상의할 일에 있을 것이다.
이곳까지 날아온 이유는 전화로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 된다.
“이번에는 먼저 말씀을 듣고 커피를 타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돈 킹씨가 꺼낼 이야기는 저를 꽤 곤혹스럽게 만들 것 같군요.”
“여전히 귀신이구만.”
“말해봐요. 뭡니까?”
“일본 측에서 협상이 왔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2주 전에 WBC가 엔도의 랭킹을 1위로 올려놨어.”
모른다. 엔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일도 아니었고 신경 쓸 필요도 없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요?”
“이번에 자네는 의무 방어전을 해야 할 상황이야. 그래서 그런가 일본 쪽에서 적극적으로 달려들더군.”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요?”
“나한테 온 자는 타이칸 프로모션의 대표 아끼야마였어. 그자는 8월에 의무 방어전을 해달라고 나한테 강력하게 제시하더군. 나는 그자의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네. 일단 자네의 의사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나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 민감한 사안이니 자네에게 물어봐야 된다고 생각했어.”
“돈 킹 씨, 점점 왜 이러십니까. 언제부터 시합을 잡는 데 제 의사를 그렇게 꼬치꼬치 물었다고 그러세요. 자꾸 이렇게 빙빙 돌리실 겁니까?”
“음, 사실 문제가 한 가지 있다네.”
“뭐죠?”
“아끼야마는 시합 장소를 일본으로 제시하면서 자신들이 주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어. 이익금의 상당액을 우리한테 주겠다는 조건인데 일본에서 경기를 하면 자네의 개런티를 1,200만 달러까지 맞춰주겠다고 하더구만.”
파격적인 조건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이익금의 상당 금액을 받는다면 돈 킹이 충분히 흔들릴 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다.
듀란과의 세기 대결에서는 1,000만 달러를 받았지만 라파엘과의 방어전에서는 600만 달러를 받았으니 일본 측에서 제시한 파이트머니는 정말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그자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유가 있었을 텐데요?”
“이유는 한 가지뿐이야. 그건 바로… 홈 링에서 자네의 타이틀을 반드시 뺏고 싶은 게지. 홈 링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나?”
자신이 생각했던 이유가 흘러나오자 최강철의 입에서 싸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까짓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이 너무나 가소롭기에 지어진 미소였다.
그랬기에 최강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더없이 건조했다.
“돈을 그렇게 많이 준다는데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는 상관없으니 그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