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연일 계속되는 한국의 격렬한 시위 장면이 미국의 텔레비전과 언론에 수시로 나왔기 때문에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일행의 분위기는 착잡하게 변했다.
먼 이국땅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고국의 모습을 지켜보며 윤성호와 이성일은 울분을 참지 못했으나 최강철은 그저 말없이 뉴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국민의 승리 소식이 들려왔다.
ABC가 뉴스 속보를 통해 한국의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열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타전했던 것이다.
화면에는 노태우가 항복을 선언하는 장면에 이어 승리를 쟁취한 사람들의 환호가 생생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 들어 있는 햇살 같은 웃음은 민주주의로 향하는 첫걸음이 시작되었음을 통쾌하게 알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지독하게 긴 시간 속에서 영광스럽게 얻어낸 승리다.
비록 3김의 정쟁으로 인해 완벽하게 군사독재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했지만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는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목표와 목적이 있는 사람에게 시간이라는 괴물은 언제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최강철은 훈련에 집중하며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복싱은 이미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삶이 되었기에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거친 숨소리,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마다 느껴지는 전율과 흥분이 좋다.
강철 같은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투지와 냉정한 이성에서 뿜어지는 펀치는 언제나 그의 야망을 자극하며 끝없는 도전 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이런 순간이 거듭되면서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바로 황제가 되는 것.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무적의 전사로서 세계의 복싱 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황제가 되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다.
“국장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제 최강철의 시합은 20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난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북미 타이틀전 때와는 또 달라요. 지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방송으로 중계하지 않으면 방송국을 폭파해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해온다고요!”
MBC 스포츠 담당 부장 이창래가 커피 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문찬호를 향해 입을 열자 회의에 참석했던 부장들이 하나둘 슬금슬금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회의는 모두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민감한 사안이 튀어나오자 그들은 불똥이 튈까 봐 사정없이 엉덩이를 들고 국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들도 안다.
비록 스포츠부에 한정된 일이지만 그들 부서로도 수없이 많은 민원 전화가 빗발치고 있기 때문에 일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국장실이 금방 비었고 남은 사람은 이창래와 국장인 문찬호뿐이었다.
깊어지는 고민.
지금까지 최강철에 대해서 보도를 통제하던 정부가 어느 날 불쑥 세계 타이틀 도전 소식을 내보내도 좋다는 지침을 내렸지만 그것만으로 최강철에 대한 정부의 악감정이 전부 풀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이번 경기를 주관하는 NBC는 무려 80만 달러라는 중계료를 요구해 왔기에 고민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야, 이 부장. 잘못되면 우린 전부 죽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냐.”
“압니다. 하지만 저쪽은 이미 깨진 그릇이나 다름없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선거 때문에 국민들 환심을 사느라고 정신이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사장님을 설득해 봅시다.”
“청와대 쪽에서 아직 액션이 없어. 이런 상태에서는 사장님도 나서지 못한단 말이다. 그 양반 모가지가 가늘어서 절대 모험할 사람이 아니야.”
“그럼 이대로 접습니까? 나중에 국민들한테 어떤 봉변을 당할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국장님, 최강철은 국민들한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놈입니다. 이런 놈 경기를 중계하지 않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야, 그래서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무턱대로 지랄하지 말고 방법을 말해야 될 거 아냐. 넌 나를 괴롭히는 게 취미냐? 부장이란 놈이 왜 나만 괴롭혀!”
“국장님, 이렇게 합시다. 오늘부터 3일 동안 무조건 우리한테 들어오는 전화는 체육부로 돌리죠. 체육부에서 허가가 안 나와서 중계가 어렵다고 하면 무슨 액션이 있지 않겠어요?”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만.”
“어차피 중계 못 하면 사람들 등쌀에 죽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라도 해보자고요.”
“네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거냐?”
“쓰죠, 뭐. 그렇게 했다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 * *
대일물산의 김영호와 류광일은 자주 가는 감자탕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직원들과 회식을 가졌다.
요즘 들어 이런 자리가 잦았다.
마음에 맞는 직원들과 술자리를 자주 갖게 된 것은 그동안 투쟁을 하면서 쌓인 전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고 앞으로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정권 교체였으나 현재 돌아가는 상황은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는데 3김이 전부 나섰기 때문에 이번 선거는 국민들의 기대와 다르게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중이었다.
한참 동안 정치 이야기를 떠들던 일행들의 입을 막은 건 류광일이었다.
그는 지역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상 듣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휘둘러 직원들의 입을 닫아버렸다.
“야, 백날 이야기해 봤자 헛수고야. 머리 아프니까 그만하자. 여기서 떠들어봤자 해결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우리끼리 열받으면 뭐 하냐.”
“그건 류 대리 말이 맞아. 정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고. 아줌마, 여기 소주 두 병!”
김영호가 빈 소주병을 옆으로 치우며 동의를 하자 직원들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떠올랐다.
맞는 말이다.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싸운 동지들이었으나 막상 선거라는 현실에 부딪치자 여기에 모인 사람들조차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다.
김영호의 입이 다시 열린 건 새로 들어온 소주병을 들어 직원들의 빈 잔을 채우고 난 후였다.
“니들 최강철 시합하는 거 알지?”
“당연히 알지. 그거 중계하지 않는다며?”
“방송국에 전화했더니 체육부 이 새끼들이 허가를 안 해준다는 거야. 그래서 난 오늘 2번이나 체육부에 전화를 걸어서 지랄을 했어. 왜 허가를 안 해주냐고 방방 떴지. 그랬더니 이 자식들이 오리발을 내밀더구만. 그건 방송국에서 결정하는 거라면서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신경질을 부리더라니까.”
“그놈들이 하는 짓이 그렇지, 뭐. 지들이 다 해놓고 책임은 다른 놈들한테 떠넘기는 게 특기잖아.”
“내가 업무차 자주 전화하는 테일러한테 들었는데 미국에서는 최강철을 레너드나 헌즈 수준까지 쳐준다더라.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그놈 경기는 무조건 중계를 해준대. 그런데 한국에서 중계를 안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전통한테 미움을 받아서 그렇다며. 그러면 쉽지 않겠지. 아직도 권력이 새파랗게 살아 있는데 걔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겠어?”
“너희들도 최강철 시합하는 거 보고 싶잖아. 그러면 어떡하든 중계를 하게 만들어야지!”
“나도 체육부에 전화해 봤는데 씨도 안 먹혀. 방법이 없는데 그럼 어떡해.”
“방법은 만들면 되는 거야. 우리가 언제 승산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싸웠냐.”
“뭐, 좋은 방법 있어?”
“나는 내일부터 노태우 선거 캠프에 전화할 생각이다. 사람들이 어제부터 그쪽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표가 달려 있어서 그런가 거기는 전화하면 어떡하든 노력해 보겠다고 대답한다니까 너희들도 이제 노태우 선거 캠프에 전화해. 안되면 될 때까지 전화해 보자고. 씨발 놈들,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보는 거야!”
* * *
김도환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최강철의 경기는 MBC에서 직접 현지로 날아가 중계하기로 결정되었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선 노태우가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국민들을 위해 중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너무나 잘 안다.
노태우 선거 캠프는 거의 일주일 동안 수많은 국민으로부터 시달렸는데 최강철의 경기를 중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민원 전화가 하루에도 수백 통씩 왔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 국민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다이내믹한 힘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빗장이 풀리자 전 언론이 동시에 최강철의 경기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고 MBC는 연일 예고 방송을 때리며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선거판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고 사람들은 만나면 최강철의 경기에 대해서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만큼 기대가 컸기에 스포츠서울의 김도환이 전하는 소식은 하나하나가 특종이 되어 국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는 보름 전부터 미국으로 날아가 최강철과 생활하면서 취재 결과를 현지로부터 직접 송고했기 때문에 다른 신문과는 다르게 생생한 사실들을 매일 보낼 수 있었다.
* * *
시합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레드불스의 캠프는 팽팽한 긴장감에 젖어갔다.
비록 IBF 타이틀전이었지만 세계 챔피언의 자리가 걸려 있었고 상대인 프레디 아두의 전적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준비는 끝났다.
조금 늦게 합류한 제프 카터가 이성일과 함께 프레디 아두의 장단점을 철저히 분석해서 내놓은 전략은 훌륭했기 때문에 최강철은 집중적으로 그들이 만들어놓은 전략을 소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강력한 인파이터.
더스틴 브라운이 헤글러 스타일의 인파이터라면 프레디 아두는 듀란처럼 무자비한 공격 스타일을 가진 놈이었다.
한 번 승기를 잡으면 독사처럼 물고 늘어지며 상대가 KO될 때까지 밀어붙이는데 워낙 강력한 콤비네이션을 가졌고 라이트 훅의 위력이 뛰어나 대부분의 선수가 정면 대결을 피할 정도였다.
그가 판정승을 거두거나 진 경기들은 전부 아웃복서들과 시합한 것들이었다.
빠른 발을 이용해 돌아나가는 아웃복서들에게는 약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제프 카터와 이성일이 내민 전략은 의외로 아웃복싱이 아니었다.
훈련을 하는 동안 최강철은 서지영과의 연락을 끊고 오로지 구슬땀을 흘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신념이 가슴속에 들어 있으니 훈련 기간만큼은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지영은 현명한 여자였다.
사귀기 시작하면서 늘 느낀 거지만 그녀의 절제력은 정말 대단해서 최강철이 곤혹스러워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훈련에 돌입하면서 당분간 만나기 어렵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아무런 반문도 하지 않고 깊고 달콤한 키스만 남긴 채 그를 보내주었다.
보고 싶었다.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럼에도 참고 견딘 것은 승부를 위한 인내는 언제나 쓰지만 그 결과는 달콤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천천히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신호가 길게 울리는 게 들려왔다.
훈련을 모두 마쳤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웠고 이제 궁금한 것을 물어봐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세계 타이틀전 못지않게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영 씨, 나야. 잘 지냈어?”
-…강철 씨…….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음성이 잔잔하게 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참았을 것이다. 그녀는 최강철의 그리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수십 번도 더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나 밉지?”
-아니… 그냥, 보고 싶었어……. 강철 씨가 보고 싶어서 밉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걸.
“바보구나.”
-원래 난 강철 씨 앞에만 있으면 바보가 되잖아. 그래도 좋아. 강철 씨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시합 끝나면 맛있는 거 사줄게.”
-응.
“지영 씨, 훈련 기간에는 우리 관장님 예민해지기 때문에 숨어서 통화하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 일 어떻게 돼가는지 알 수 있을까?”
-아, 그거… 강철 씨가 말한 대로 저번 주까지 주식을 전부 처분했어. 수익률을 35.4%나 올려서 통장에 들어온 건 610만 달러나 돼. 전부 팔고 나니까 계속 올라서 약 올라 죽을 뻔했어. 지금 시장 상황이 너무 좋아서 전량 매도하니까 증권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더라.
“잘했다. 고생했구나.”
-그리고 델 컴퓨터 쪽에서 들어온 이익금이 이번 반기까지 정산해서 500만 달러 정도야. 아무래도 강철 씨는 마이다스의 손이 맞나 봐. 워낙 사업이 잘돼서 앞으로 들어오는 이익금도 엄청 날 것 같아.
“시스코는 어때?”
-그쪽도 지금 난리가 아니야. 갑자기 포텐이 터져서 직원들을 계속 충원하고 있는 중인데 공장을 새로 개설할 계획이래. 키애런 파크 씨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어.
“지영 씨가 많이 바쁘겠네.”
-바쁘긴 하지만 너무 행복해. 사업이 이렇게 잘될 줄 누가 알았겠어.
“지영 씨가 있어서 든든하다. 관리를 너무 잘해줘서 난 이렇게 마음 놓고 훈련할 수 있잖아. 전부 지영 씨 덕분이야.”
-그런데 강철 씨, 통장에 들어 있는 현금은 어떻게 해? 강철 씨가 시킨 대로 선물 계좌를 열어놓았는데 혹시 거기에 투자할 생각이야?
“응.”
-언제?
“아직은 아니고 내가 때가 되면 알려줄게.”
-지금 9월 만기 시장이 폭발적이야. 증권사에 알아봤더니 시카고 선물 시장이 역대 최고액을 기록하고 있대.
“알고 있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냐.”
-이궁, 또 이런다. 강철 씨가 하는 것마다 너무 성공해서 믿기는 하지만 이제는 막 불안해져. 액수가 너무 커져서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무섭단 말이야.
“하하… 걱정하지 마. 우린 결코 실패하지 않아.”
그래, 실패하지 않는다. 결과를 알고 있는 투자가 어떻게 실패를 할까.
서지영이 걱정하는 건 알지만 최강철은 그럼에도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원칙은 반드시 지킨다.
루시퍼에게 선물 받은 전생의 기억이 노출되는 순간 세상은 혼돈에 빠져들 테니 앞으로도 이 원칙은 철저히 지켜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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