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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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 스퀘어가든.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MGM 그랜드가든 아레나와 함께 복싱계에서 양대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대결 등 수많은 타이틀전이 벌어진 곳으로 수용 관중이 2만 명에 달했다.
뉴욕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관중들의 접근이 용이했고 특설 링과 다르게 경기장이 건물 실내에 있어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곳으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오후 4시가 넘었을 때부터였다.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은 가벼운 흥분으로 인해 홍조를 띠고 있었다.
세계 타이틀전이 아님에도 그들이 이렇게 흥분을 하는 것은 메인이벤트에 나서는 선수들의 기량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패 복서들의 대결.
더군다나 두 선수 모두 강렬한 인파이팅을 주 무기로 하기 때문에 이번 경기는 그 어떤 시합보다 치열하게 전개될 게 분명했다.
“강철아, 오늘 컨디션은 어떠냐?”
“좋습니다.”
김도환이 묻자 최강철이 여유 있게 대답했다.
최강철은 경기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라커룸으로 들어왔는데 이곳까지 따라 들어온 것은 김도환과 토머스뿐이었다.
둘 다 그와는 질긴 인연을 가지고 있는 기자들이었다.
“여기 미국도 대단하지만 한국은 지금 난리가 아니야. 어제 저녁에 본사하고 통화를 했는데 네 경기를 보려고 학생들이 데모까지 멈췄단다.”
“정말입니까?”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냐? 한국 국민들은 네가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지치고 힘들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꾸 뭔가에 희망을 거는 것 같아.”
“음…….”
최강철은 김도환의 말을 듣고 무거운 신음을 흘려냈다.
몸은 미국에 와 있지만 언제나 마음은 한국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텔레비전에서 고국에 관한 소식이 나올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
지금 한국에서는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며 수시로 시위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김도환으로부터 한국 소식을 듣자 저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희망. 그래, 희망이 없다면 그 지독한 어둠 속에서 어떻게 버틸수 있을까.
자신 역시 그 역사를 겪으며 젊은이의 고통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강철아,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니야. 그냥 알려주고 싶었어. 네가 이런 사실을 알면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이겨줘라. 꼭 이겨줘. 알았지?”
“김 기자님, 저는 이길 겁니다. 그러니까 잘생긴 제 얼굴 예쁘게 찍어서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어주세요.”
김도환을 바라보며 최강철이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와 다짐이었기에 김도환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흘려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줘라.
강철아, 네가 이기면 국민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는 걸 잊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오픈 게임으로 잡혀 있던 2개의 시합이 모두 끝나자 관중들의 함성이 라커룸까지 들려왔다.
북미 타이틀전이 관중들로 만원을 이룬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그것도 2만 관중을 수용하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을 가득 채웠으니 기록적인 관중 동원이었다.
출전하기 전 라커룸을 찾은 돈 킹과 톰슨의 격려를 받으며 최강철은 천천히 진행 요원의 안내에 따라 스태프들과 함께 통로를 걸어 나갔다.
그렇게 쉴새없이 떠들던 윤성호와 이성일마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무패의 챔피언.
그동안 철저히 분석하고 대비책을 마련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전략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것이다.
복싱은 수많은 변수와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마련된 전략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어떤 선수보다 강했기에 출전을 하고 있는 이 순간 그들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관장님, 아침에 꿀 먹었습니까?”
“무슨 소리냐?”
“왜 어울리지 않게 벙어리 행세를 하냐고요. 사람 답답하게.”
“인마, 꿀이나 사주고 그런 소리 해라. 에이 썅, 난 아직도 커리어가 부족한가 봐. 왜 오줌이 자꾸 마려운지 모르겠네.”
“화장실 갔다 오세요. 시합 도중에 가지 말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주객이 전도되었다.
코치가 선수의 긴장을 풀어줘야 하는데 오히려 선수가 코치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으니 이건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농담을 하는 동안 윤성호와 이성일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는 점이다.
복도를 빠져나와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예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처음 미국으로 들어왔을 때는 동양인이라는 선입감 때문인지 야유가 빗발치더니 이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관중들 사이에서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고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여기는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입니다. 곧 최강철 선수와 더스틴 브라운. 더스틴 브라운과 최강철 선수의 북미 타이틀전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윤 위원님, 정말 가슴이 떨리는 순간인데요. 이번 경기 어떻게 진행될 것 같습니까?”
“두 선수는 모두 인파이팅을 펼치는 선수들입니다. 물론 최강철 선수는 아웃복싱이 가능할 정도로 빠른 발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강렬한 인파이팅을 펼쳐왔기에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초반부터 접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워낙 테크닉이 좋은 선수들이기 때문에 치열한 난타전으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지금 최강철 선수는 전승을 기록하고 있으며 12번의 경기를 전부 KO로 장식했습니다. 펀치력 면에서는 최강철 선수가 우세하지 않을까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더스틴 브라운은 21번의 KO승을 거두면서 단발 녹아웃을 만든 게 7번이나 되지만 최강철 선수는 그런 경우가 한 번도 없었어요. 최강철 선수는 지금까지 기회를 보고 있다가 완벽한 순간에 엄청난 화력을 터뜨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경기를 해왔습니다. 제가 더스틴 브라운이 접근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브라운 진영은 같이 때리고 맞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윤근모가 말을 끝내고 옆에 놓아두었던 물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종엽과 그의 책상에는 물병이 5개씩 놓여 있었는데 예전 중계방송할 때 목이 쉬었던 것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도전자 최강철 선수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최강철 선수 당당한 모습입니다.”
“관중들이 허리케인을 연호하고 있군요. 이곳 미국에서 최강철 선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모습입니다.”
“윤 위원님, 미국 사람들은 동양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강철 선수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뭘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최강철 선수의 인파이팅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허리케인이란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복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경기를 하기 때문에 미국 복싱 팬들이 최강철 선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최강철 선수 링에 올랐습니다.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가슴 떨리는 순간입니다. 최강철 선수 링을 돌면서 가볍게 몸을 풉니다. 우리의 최강철 선수 반드시 이겨주기를 기원합니다.”
이종엽이 마이크를 붙잡고 속사포처럼 떠들었다.
수많은 경기를 중계방송한 베테랑이었지만 그는 최강철이 링에 올라 서서히 몸을 풀자 자신도 모르게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어이, 시원하게 한잔들 해.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여유 있게 즐기면서 보자고.”
“예, 각하.”
전두환이 먼저 맥주잔을 들면서 참모진들에게 말하자 모여 있던 측근들이 앞에 놓여 있던 잔을 들어 한 모금씩 들이켰다.
안가에 모인 자들은 현재 한국을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는 신군부의 실세들이었지만 상석에 있는 전두환의 행동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지금은 사람좋게 웃고 있지만 전두환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왕의 행세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정권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최측근마저 가차 없이 목숨을 날렸기 때문에 모여 있는 자들은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린 채 눈치 보기에 바빴다.
대표적인 희생양이 허삼수와 허화평이었다.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들이었고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그들은 정권을 잡은 지 불과 3년 만에 도태되어 변두리로 밀려나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오늘은 도로가 한산하다면서?”
“예, 각하. 저 친구가 국민들한테 인기가 좋습니다. 워낙 재밌게 경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학수고대하면서 오늘을 기다렸답니다.”
“그래, 저놈이 복싱은 잘해. 나도 저놈 팬이야.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게 꼭 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단 말이지.”
“오늘은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상대하는 놈이 워낙 강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더 재밌는 거 아닌가. 변변치 않은 놈들만 잡으면 뭐 해. 하나를 잡아도 확실하게 때려잡아야 확실하게 효과를 보는 거야. 김영삼이나 김대중을 때려잡으니까 야당 놈들이 전부 비실거리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습니다. 각하.”
장세동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자 전두환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말을 해놓고 보니 제법 그럴듯한 비유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데모하던 놈들도 오늘은 쉰다며? 얼마나 재밌나. 먹잇감을 던져주니까 덥석 무는 걸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말 다루기가 쉬워. 안 그래?”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 민족이잖습니까.”
“푸하하, 그렇지. 그러니까 그걸 제대로 이용하면 효과가 좋을 거야. 장 실장, 앞으로도 이런 이벤트를 자주 마련해 주도록 해. 국민들이 좋아하는 걸 자주 마련해 줘야 통치하기가 쉬워져. 노는 거 좋아하는 놈들한테 놀 거리를 주면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예, 각하. 그래서 우리가 아시안게임도 유치한 거 아니겠습니까. 선진 국민답게 행동해야 된다고 계속 홍보하는 중입니다. 모든 언론이 나섰기 때문에 약효가 서서히 먹혀들고 있는 중입니다. 아시안게임이 끝날 때까지는 별일 없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최강철은 관중들에게 인사를 한 후 가볍게 뛰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뜨거운 열기.
관중들이 토해내는 열기를 몸으로 받자 서서히 전신에서 투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입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함성이 울리며 반대쪽 통로를 따라 더스틴 브라운이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교활한 놈.
할렘가에서 자라 거친 삶을 살아왔다고 들었는데 놈은 생각보다 훨씬 영악한 놈이었다.
공식 계체량 장소에서 자신을 향해 거칠게 도발하는 것을 보며 역으로 심리전을 펼쳤을 때 놈은 이성을 잃은 것처럼 날뛰었으나 마지막 돌아서는 순간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서 피어나는 걸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놈 역시 자신의 심리전을 끝까지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뜻이었다.
링에 올라온 더스틴 브라운은 아직도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며 분노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냉정하면서도 집요하다.
놈은 자신이 돌아설 때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역시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나 나는 그리 쉬운 남자가 아니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인생의 쓴맛이란 쓴맛은 전부 겪었으니 그 정도 심리전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기다려. 곧 진짜 심리전이 어떤 건지 보여줄게.
“강철아, 저 자식 심리전에 말려들면 안 돼!”
“걱정 마. 설마 누구처럼 머리로 박기야 하겠어.”
“그것도 조심해야 해. 저놈이나 너나 전부 인파이터라서 버팅이 생길지 몰라. 저놈은 흑인이야. 피부가 질겨서 같이 부딪치면 네가 깨진다고.”
“크크크… 그런 경우가 생기면 나는 이빨로 깨물 테다. 나만 피 볼 수는 없잖아.”
“아이고, 이 미친놈아. 지금 농담이 나오냐?”
이성일이 말하다가 말고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정말 배짱 하나는 끝내준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이럴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아서 환장할 지경이다.
돈 킹은 장내 아나운서도 베테랑으로 섭외해서 세계 타이틀전을 전담하고 있는 미카엘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이런 행사는 눈 감고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북미 타이틀은 동양 타이틀전과 동격인 시합이라 식전 행사가 제법 길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선수소개가 시작되었다.
하아, 참 오래 걸렸다. 대결을 앞두고 이런 쓸데없는 행사에 시간을 허비하다니 정말 피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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