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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환생-28화 (28/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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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협회에서 웰터급을 거의 포기하디시피 한 건 일본의 히로키에게 막혀 한국 선수들이 죽을 쓴 것도 있지만 현 복싱의 황금 세대를 구축하고 있는 웰터급의 아성이 너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복싱에는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 챔피언에 오르는 천재 복서 미국의 마크 브릴랜드를 비롯해서 소련의 세릭 코나브예프, 서독의 제론카, 나이지리아의 오무지리, 쿠바의 갤럭시 가르곤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물론 프로 복싱은 그보다 더 강한 자들로 우글거렸다.

환상의 라이트 훅을 가진 윌프레드 베니테스, 링의 백작 아르게요, 공포의 하드펀처 토머스 헌즈,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 슈가레이 레너드, 그리고 듀란 등이 활약하는 웰터급은 현 복싱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체급이었고 잔악한 포식자들의 세계이기도 했다.

복싱 협회에서 국가 대표 선발전까지 19연속 KO승을 거둔 최강철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번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 않은 건 바로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레벨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동양인보다 월등한 피지컬을 지녔고 펀치와 스피드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매번 참패를 면치 못했으니 복싱 협회에서 다른 체급과 달리 웰터급에 커다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 * *

정기수가 직접 저녁에 집으로 찾아온 건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미팅을 끝낸 최강철이 체육관에 들러 윤 관장과 함께 간단한 훈련을 마치고 들어갔을 때 이미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수단이 좋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낯선 사람과 쉽게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그는 마치 친한 동네 사람처럼 너털웃음을 지으며 연신 잔을 권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강철은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조용하게 술상 옆에 앉았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기수는 예전에 체육관으로 찾아왔다가 윤 관장의 욕설을 들으면서 돌아갔던 사람이었다.

“우리 오랜만이지. 반가워.”

“그렇네요.”

“저번에는 윤 관장 때문에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했구만. 내가 누군지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극동프로모션의 정기수라고 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정기수가 의외라는 듯 최강철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의아함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뭘 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노련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정말 대단하더군. 아마추어에서 19연속 KO승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야. 데뷔한 지 1년 만에 태극 마크까지 달았으니 더욱 놀라운 일일세.”

“고맙습니다.”

“아버님이 성격이 좋으셔서 술 한잔하고 있었네.”

“오신 이유를 말씀하시죠. 저희 아버지는 내일 일찍 일을 나가셔야 됩니다.”

“아이쿠, 그러신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기분 좋게 마시고 있었구먼. 그럼 본론만 간단하게 얘기하지. 나는 자네를 스카우트하고 싶어서 왔어. 우리한테 오게. 자네 권투 인생을 활짝 피게 해주겠네.”

“프로 복싱 말이죠?”

“그래. 프로 복싱. 어차피 권투를 시작했으니 챔피언이란 야망을 가지고 있을 거 아닌가. 우리 극동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지.”

“어떻게요?”

“응?”

최강철의 반문에 정기수가 눈을 퍼뜩 치켜떴다.

너무 의외의 반응이기 때문이었다.

극동프로모션은 굵직한 타이틀전을 수시로 개최했고 휘하에 국내 최대 규모의 극동체육관을 소유하고 있어 권투 글러브를 끼어본 놈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었다.

극동프로모션에 스카우트된다는 건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제 18살에 불과한 최강철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져 오고 있었다.

“자네가 제대로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우리 회사는 세계 챔피언과 동양 챔피언을 여러 명 보유하고 있어. 챔피언들의 산실이지. 체계적인 훈련과 지도를 하기 때문에 자네같이 전도가 창창한 유망주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곳이야.”

“우물 안 개구리이기도 하죠.”

“그게… 무슨…….”

“극동프로모션과 돈 킹이 운영하는 더 럼블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극동은 럼블의 능력에 비하면 우물 안 개구리 아닌가요?”

“이 친구야, 더 럼블은 세계 최고야.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정기수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놈이 돈 킹과 더 럼블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더 럼블은 세계적인 프로모터 돈 킹이 1974년에 설립한 프로모션이다.

돈 킹은 알리와 조지 포먼, 헌즈, 레너드, 챠베스 등 일세를 풍미한 슈퍼스타들의 경기를 프로모션해서 흑인 중 최고 갑부로 선정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정기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철부지 어린애가 더 럼블을 떠들면서 극동과 비교하는 것은 정말 가소로운 일이었다.

뭘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

그가 여기에 온 것은 최강철이 세계 챔피언 재목이라 생각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프로 복싱 웰터급은 사상 최강의 강자들이 득실대는 곳이라 동양인들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동양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며 환국 복서들을 학살하고 있는 일본의 겐죠까지 양대 기구인 WBA와 WBC 랭킹 10위 안에 들지 못할 정도였다.

최강철이 필요한 건 환국 복서들을 죽사발로 만들고 있는 겐죠를 상대하기 위한 비밀 병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만약 최강철이 프로에 데뷔해서 지금처럼 승승장구만 해준다면 겐죠와의 빅 매치를 성사시켜 커다란 돈을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친놈은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 같았다.

“복싱의 길은 험난한 곳이야. 우리 극동은 럼블만큼은 안 되지만 자네를 성공시킬 능력이 있어. 자네가 세계 챔피언을 꿈꾼다면 우리도 그럴 능력이 된다네. 우리도 타이틀전을 여러 번 성사시켰으니 충분해.”

“나는 국내에서 경기를 하지 않을 겁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라스베이거스에서 싸우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으…….”

속으로 쌍욕이 터져 나왔다.

현재 전설을 써 나가고 있는 최강의 복서들과 라스베이거스에서 싸운다는 조건으로 프로모션을 하라면 극동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 한다.

경기를 성사시키는 것도 어려울 뿐만 극동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기수는 신음 소리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너구리는 담배 연기 정도에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이곳에 온 목적은 최강철을 스카우트하는 것이지 말싸움이나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자네 아버지한테 거액의 계약금을 주겠다고 했어. 세상 물정도 모르고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얼마를 제시했죠?”

“자그마치 천만 원이야. 신인 계약 조건으로 최고 대우지. 내가 자네를 정말 높게 평가해서 회장님께 겨우 허락받은 거라고. 그 돈을 제시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는가? 그러니 현실적으로 생각해. 그 돈이면 자네 집안 살림에 많은 도움이 될 걸세.”

천만 원.

정기수의 말대로 천만 원이라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 거액임이 분명했다.

이제 겨우 국가 대표가 된 애송이한테 이 정도의 베팅을 한다는 건 극동 쪽에서 얼마나 최강철을 잡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술잔만 손으로 돌리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두 사람의 대화만 듣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돈이면… 손자의 병원비를 비롯해서 많은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지금 극동과 계약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제가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

* * *

최강철은 기말고사를 치른 후부터 윤 관장과 함께 강도 높은 훈련을 시작했다.

아직 배운 지 얼마 안 된 스토핑과 패링,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시도하는 스웨잉을 반복적으로 훈련했고, 공격 기술은 연타 능력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스트레이트와 훅, 어퍼컷과 보디 공격을 원활하게 조합하는 콤비네이션을 집중 훈련 했다.

국가 대표 선발전을 치르면서 수준 높은 상대들과 싸울 때 느꼈던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피지컬을 키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체중은 늘었으나 아직까지 그의 피지컬은 완성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근육량을 더욱 늘릴 필요가 있었다.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최강철의 시간이 그랬다.

기말고사에서도 그는 전 과목 만점을 기록하며 전교 수석을 차지했고 9월에 치른 2학기 중간고사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쪽에서는 이제 최강철의 관리를 포기하다시피 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서 해 나가는 그를 관리하겠다고 덤빈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리는 포기했으나 관심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다.

학교 측은 최강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학교 홍보에 열을 올렸고, 학생들에게 그의 사례를 들며 최선을 다했을 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입했다.

블랙 서클이 완벽하게 사라진 정문고의 학교 분위기는 주변 학교 중에서 가장 좋았는데, 학부모들도 점점 정문고에 대한 인식을 좋게 평가하는 중이었다.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은 이렇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영웅은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복싱 협회에서는 윤 관장에 대한 지원을 전혀 해주지 않았다.

국가 대표 코치진을 제외하고는 어떤 지원도 해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방침이었다.

난감한 일이다.

시국 운운 하면서 태릉선수촌까지 개방을 하지 않고 스스로 훈련하라던 복싱 협회는 예산상의 이유를 들어 선수들의 코치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굳이 따라온다면 숙소는 제공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최강철이 국가 대표가 되면서 관원수가 부쩍 늘었으나 세계 선수권대회가 벌어지는 서독까지 가는 경비를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최강철을 향해 씨익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서 네가 우승하는 장면을 반드시 보겠다며 그는 오직 훈련에만 몰두하라는 잔소리를 거듭했다.

* * *

최강철은 아랫목에 앉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그런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고 따뜻한 손으로 등을 어루만졌을 뿐이다.

“강철아, 우승하지 않아도 되니까 디치지만 말고 댕겨와. 알았지?”

“예.”

어머니는 우셨다.

언제나 소중하게 안고 다녔던 막내아들이 이역만리 타국으로 시합을 떠난다는 걱정이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 같았다.

“아버지, 다녀올게요.”

“그려.”

이번에도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안다. 그 가슴속에 들어 있을 걱정과 안타까움이 얼마나 큰지를.

최강철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가서 꼭 우승하고 오겠다며 눈으로 말한 후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밖에는 이미 담임선생과 이성일을 비롯한 친구들 몇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항까지 따라올 작정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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