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최강철은 자리에 앉은 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을 바라봤다.
교복을 벗고 전부 사복으로 갈아입었으나 아직까지 어린티를 벗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하기야, 그건 사내놈들도 마찬가지다.
아직 고2의 새파란 청춘들이었고 두 놈은 교복까지 입었기 때문에 오히려 여학생들보다 더 어리게 보였다.
천천히 하나씩 훑어봤다.
이정태가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던 것처럼 전부 예쁘게 생겼는데 특히 가운데 앉아 있는 여학생이 돋보였다.
여학생들은 최강철의 시선이 닿자 불에 덴 것처럼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가운데 앉아 있는 그 여학생만은 눈이 마주치자 얼굴만 붉어졌을 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 자. 우리 다 왔으니까 일단 소개부터 해요.”
떠벌이 이정태가 스스로 일어나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몇 번의 미팅 경험이 있다고 자랑하더니 고목나무처럼 앉아 있는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먼저 이정태가 남학생들은 주욱 소개시키다가 마지막 최강철의 순서가 되자 침을 튀겼다.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폴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에 앉아 있는 친구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놈을 데리고 나오느라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정문고의 히어로, 그리고 태극 마크의 사나이, 최강철 군입니다.”
아주 지랄을 한다.
무슨 영화배우 소개하는 것처럼 이정태는 침을 튀겨 가며 소개했기 때문에 최강철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문제는 여학생들의 반응이 그에 못지않게 뜨거웠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박수는 왜 치는 걸까?
이정태의 남학생 소개가 끝나자 맨 끝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살며시 일어나 여학생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저는 여기 정태하고 교회 친구예요.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구요. 앞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먼저 이 친구는…….”
여자들의 소개가 시작되자 남자 놈들의 입이 헤 벌어졌다.
나름대로 이정태는 학교에서 괜찮은 놈들로 뽑아 왔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반응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이성일이다.
이 자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때문에 덤으로 따라 나온 게 분명했으나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눈에 자신감이 그득했다.
여기에서 수준이 떨어지는 놈은 오직 이성일뿐인데도 말이다.
전생에도 이런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너무 어렸고 삶에 자신감이 부족해서 여자 앞에만 서면 입이 얼어붙어 미팅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상대 여학생이 혹시 벙어리냐고 물었겠는가.
처음 만나 어색했던 분위기는 학교 이야기와 상대방에 대한 호구 조사를 하면서 점점 풀어졌는데 시간이 지나 이정태가 짝짓기 시간이 왔다는 선언을 하자 금방 다시 경직되었다.
최강철은 여유 있게 친구들이 하는 짓을 구경했다.
즐거웠다.
여학생들의 궁금증은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어 한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다.
과거의 그였다면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으나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고 자신과 함께하는 그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여학생들은 그가 농담을 할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분위기가 완벽하게 풀어진 건 최강철이 순간순간마다 여학생들을 무장해제시키는 농담들을 사정없이 품어냈기 때문이다.
이윽고 남자들의 소지품이 하나씩 꺼내져 이정태가 내민 빵집 봉투에 담겼다.
이 방법은 미팅 때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지금은 고루하게 느껴질 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디어상을 받을 만큼 싱싱했고 설레는 방법이었다.
이정태의 손에 의해 물건들이 탁자 위에 놓이자 여학생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들은 끝에 있는 사람부터 하나씩 물건을 집어 들었는데 잡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아, 이건 또 뭘까.
자신을 유민정이라고 소개했던 아이. 예쁜 여학생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빛나던 유민정이 최강철의 동전을 집어 드는 게 보였다.
* * *
짝을 짓고도 한동안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의 미팅은 파트너가 정해져도 싸가지 없이 곧바로 지들끼리 사라지는 짓은 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강철은 시계를 확인하고 앞에 앉아 있는 유민정에게 슬며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난 이제 가야 하는데 같이 나갈래?”
“지금?”
“응, 체육관에서 관장님이 기다리시거든. 시합 준비 때문에 상의할 것이 있어.”
“알았어.”
파트너가 정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놨기 때문에 그녀가 편하게 대답을 해왔다.
최강철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자 이성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째려봤다.
나름대로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이성일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상대 여학생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자신을 도와 거사를 성사시켜 줘야 하는 놈이 사라진다는 건 친구에 대한 배신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빠이빠이 손을 흔들어준 후 유민정과 함께 빵집을 나왔다.
문화여고는 정문고와 5㎞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영등포에서는 명문으로 소문난 학교였다.
매년 10명 가까이 서울대에 진학시킬 정도라 부유층 자제들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여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유민정은 문화여고에서 전교 1등을 달리는 수재라고 한다.
이렇게 예쁜데 공부까지 잘한다고?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사실을 외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집까지 데려다 주기 어렵겠다.”
“괜찮아. 바쁘다니까 할 수 없지. 그래도 버스 정류장까지는 같이 갈 거지?”
“나도 버스 타야 해.”
“호호… 그럼 거기까지 가면서 우리 이야기해.”
걸었다.
그녀와 함께 천천히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 묘한 감정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재생이 된 이후 엄마와 누나들을 빼고 여자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18살로 돌아간 자신의 몸은 그녀가 뿜어내는 향기에 취하며 이 시간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유민정의 성격은 차분해 보였는데 단둘이 있게 되자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나 사실 이번 미팅, 강철이 때문에 나온 거야.”
“응?”
“꼭 한번 보고 싶었거든.”
“날 알고 있었단 말이네. 어떻게 알았지?”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정말 몰라서 그래. 말해봐. 날 어떻게 알았어?”
하품 나올 이야기가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최강철 때문에 정문고의 악명으로 유명한 블랙 서클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문화여고까지 전해졌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얼마나 뻥이 튀겨졌는지 혼자서 50명을 때려눕혔고 전부 병원에 실려 가서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진짜 웃음이 나온 것은 그녀의 다음 이야기 때문이었다.
잘 싸우는 남자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다. 문제는 최강철의 외모가 탤런트 찜 쪄 먹을 것처럼 잘 생긴 것으로 뻥 튀겨져 여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것이었다.
완벽한 몸매, 조각 같은 얼굴. 거기다 전 과목 100점을 맞으며 전교 수석까지 차지했기 때문에 최강철은 지금 영등포 일대의 여학생들에게 백마 탄 왕자가 되어 있단다.
“실망했겠다. 전혀 다른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서.”
“호호… 그렇긴 해. 막상 보니까 이야기로 들었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 그래도 실망할 정도는 아니야.”
“쩝, 몇 번 타냐?”
“41번.”
“그 버스 올 때까지 기다려 줄 테니까. 실망 고이고이 가슴속에 접어두고 잘 들어가.”
“그냥 가라고?”
“그럼 뽀뽀라도 해주고 갈래?”
“얘 봐. 무지하게 엉큼하네. 너 뽀뽀해 봤어?”
“아직, 이제 해보려고.”
“누구하고, 나하고?”
얼굴이 붉어진 상태에서 유민정이 최강철을 빤히 쳐다봤다.
똑똑한 애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으니 몇 번 만나서 영화라도 같이 본다면 뽀뽀가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안 된다.
여자에 대한 증오심이 들끓고 있는 자신의 내면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그녀를 타락의 세계로 이끌지도 몰랐다.
유민정의 물음에 최강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후 멈췄던 발걸음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유민정은 그가 말없이 돌아서자 급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전화번호 안 물어봐?”
“그거 물어서 뭐 하게. 나 바빠. 어차피 정신없이 바빠서 너 보고 싶어도 못 본다. 전교 1등이라며?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너도 전교 1등이잖아. 우리 같이 공부하면 안 돼?”
“민정아, 하나만 가르쳐 줄게. 남자는 다 늑대야. 으슥한 곳에서 너와 내가 같이 공부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냐? 놔줄 때 도망가. 잡아먹기 전에.”
“하긴,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고민이 되긴 했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남자 친구 사귀면 공부에 방해된다고 하더라. 그럼 좋아. 나중에 대학가서 만나. 그땐 괜찮지?”
“생각해 보고.”
유민정을 보내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정말 당돌한 아이다. 아직 어린데도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가차 없이 그녀를 거부한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증오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내에게 받은 배신의 상처로 인해 뼛속 깊은 곳까지 여자에 대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다시 찾아올 수 없을 정도로.
새파란 청춘으로 되돌아왔으나 가슴속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증오는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체육관으로 들어서자 윤 관장이 관원들을 지도하다가 빠르게 다가왔다.
관원들의 숫자는 또 늘었다.
국가 대표를 배출한 체육관의 타이틀은 복싱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으로 작용되는 모양이다.
“강철아, 훈련 일정 나왔다. 볼래?”
“예.”
윤 관장의 손에 들린 훈련 계획표를 받아들고 주욱 읽어 내려갔다.
마치 머릿속에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윤 관장이 작성한 훈련 스케줄이 각인되듯 새겨졌다.
정말 두려울 정도로 무서운 암기력. 루시퍼가 준 두뇌는 여전히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제 세계 선수권대회 까지는 3달이 조금 넘게 남았을 뿐이다.
협회에서는 국가 대표들의 태릉선수촌 입소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수들은 각자 훈련을 해야 했다.
어수선한 시국 1981년.
신군부의 상징이자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죽인 피의 숙청자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시국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어리석은 국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왔다.
땡전 뉴스.
언론을 완전 장악한 신군부는 자유를 외치는 데모 대열을 빨갱이 집단으로 호도하며 연신 방송과 기사를 내보냈는데 무지한 국민들은 눈물로 울부짖는 대학생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서슴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왔으나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바뀌지 않고 여전히 슬프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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