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 침투 (1)
브라이언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서류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업무는 각성자 판별 서류 접수.
물론 말단이나 신입이 하는 하찮은 일이 아닌 추천인이 있거나 재벌, 의원과 같은 고위급 VVIP를 위한 창구였다.
하지만 최근 1등급 워프 브레이크가 터지고 이상하리만큼 물밀듯이 밀려오는 수많은 각성자 신청서로 인해 구분 없이 받는 게 현실이긴 했다.
그리고 그런 현실 중 오늘만큼 당황스럽고 놀란 날은 없었을 거다.
이 서류를 준 사람이 바로…
“얼마나 걸리죠?”
상큼하게 웃는 여헌터, 아바 헌터이기 때문이다.
‘부, 분명 이번 1등급 워프 브레이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처음에는 교류 헌터로 한국에 간 흔한 헌터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헌터 제로로 불리는 우도현 헌터의 팀원이 된 이후 귀국한 그녀의 유명세는 180도 달라졌다.
1급 헌터.
리암 루카스에 이은 1급 헌터가 나온 것이다.
그 열기가 식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상사이자 선배였던 리암 루카스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곧 일어날 1등급 워프 브레이크를 막겠다고.
온 국민이 그녀의 결정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존중했다. 그리고 실패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만, 뉴욕 전체를 삼켰을 재앙이 5분의 1이라는 적은 피해로 끝났으니까.
국민들은 그녀의 숭고한 희생이 하늘에 닿아 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브라이언도 그렇게 믿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감사함과 희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잠깐 짬을 내어 합동 영결식까지 다녀왔다. 그 덕에 밀린 업무로 주말까지 반납해야 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다.
그게 불과 며칠 전 일이었는데.
브라이언은 다시 여인을 바라봤다.
고생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인공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니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지…….
브라이언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저, 정말 아바 헌터님 맞으십니까……?”
“어떤 기분인지는 알겠는데, 유령 보듯 하지 말래요?”
“아! 죄,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는 아바가 풋 웃는 소리에 멍하니 그녀를 봤다.
금을 갈아 뽑은 듯한 번쩍이는 금발이 굵게 웨이브지며 뽀얀 얼굴과 함께 밝게 빛났다. 마치 머리 뒤로 빛이 터져 나오며 그녀를 위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미의 여신이 강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에 넋이 나갔을 때, 그녀가 눈동자에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미안해요.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귀 따갑게 들었더니. 연애도 못해 봤는데,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가 있어야죠.”
성격도 좋다!
헌터가 됐다는 인간들은 전부 거들먹거리며 대접받길 바라는데,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그녀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정말 여신이란 말이 아깝지 않았다. 아니, 더 아름답고 더 높일 수 있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짜증이 치솟았다. 멍청한 자신이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해 버린 것 같았다.
지금 있는 곳이 직장이 아니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쉣 더 퍽!’을 외쳐 댔겠지.
‘이, 이럴 때가 아니다!’
브라이언은 그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서류를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 든 그는 빠르게 훑었다.
‘트론, 나이 23세 추정? 워프 브레이크에 휩쓸려 기억 상실과 함께 각성. 아아, 그래서 추정이군. 목숨을 구해 준 은인… 그래서 추천을! 아, 신이시여! 신의 사자를 보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는 울컥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잠시 눈을 깜빡이며 이어서 읽었다.
‘아바 헌터님의 의견으로 각성 등급은 헌터 3급… 3급?’
부릅떠진 눈에 서류가 바짝 닿은 모습은 마치 종이를 핥을 듯했다.
“저… 아바 헌터님.”
“네.”
“그… 급수가…….”
“혹시 저를 못 믿으세요?”
브라이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요! 아바 헌터님을 못 믿는다면 세상에 누굴 믿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청자들이 너무 많아 손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저 딱 하나, 특성과 급수 확인을 위해 마나 테스트만 해 주시면 됩니다만… 혹시나 아바 헌터님께서 불쾌하실까 염려되어…….”
“아, 아니에요.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어디로 가면 되죠?”
그는 또다시 울컥 감동한 얼굴을 빠르게 수습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직원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아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브라이언은 각성자와 헌터 체제가 바뀐 부분부터 짧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성자 7급부터 헌터 4급까지 사이커 4급에서 1급으로, 헌터 3급부터 1급까지 포스 3급에서 1급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바 헌터님의 경우 포스 1급이 되시는 거죠. 가령 한국 남쪽의 우도현 헌터의 경우 헌터 제로, 조국에서는 모나크로 불립니다.”
그녀가 우도현 팀의 팀원이었기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설명까지 친절히 덧붙였다.
그 외에 추천인으로 각성자를 소개하면 멘토-멘티 제도가 있어 한 달 동안 관리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국가에 환원된 재산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에 대한 화답일까, 아바는 무척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브라이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렇군요.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에겐 포스 원, 아바 님을 응대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아, 저기 테스트 담당 직원이 오는군요. 올라가시면 됩니다.”
“네, 고마워요. 브라이언.”
왼쪽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보고 이름을 불러 주자 그는 감동한 얼굴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아바가 사라진 뒤 그는 하얗게 불태운 듯 의자에 퍼져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잊지 못하겠군. 아바 헌터 님이시라니.”
황홀한 듯 조금 전의 시간을 떠올리던 브라이언은 목을 죄는 넥타이를 살짝 끌어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특이한 사이커가 많이 오는데?”
그는 아바가 오기 한 시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골칫덩이로 불리는 헤서드의 추천을 받아 접수한 동양인 사내와 신비한 은발의 소녀.
‘그들도 재해에 휩쓸렸다고 했었지.’
정말 언밸런스한 조합이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겨우 삼켰었다.
‘포스 2급! 내가 보장한다고!’
“미친놈… 사이커 2급 주제에 무슨 포스 2급을 들먹여?”
그때 못한 말이 이제야 흘러나왔다.
거인 같은 덩치에 차마 소리치진 못하고 엿이라도 먹어 보라고 제일 빡빡한 곳으로 보내 버렸다.
테스트도 테스트지만, 진실의 방이라는 곳에서는 어떤 진실이라도 뱉게 되어 있으니까.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라지!’
감히 자신의 시간을 뺏으며 헛소리를 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으면 하는 브라이언이었다.
그리고 포스 원 아바가 데려왔던 사내가 떠올랐다.
‘트론이랬나……?’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녀가 돌아온 것도 대단한데, 그런 헌터를 구한 은인이라니. 그 축복 때문인지 몰라도 각성 시작이 포스 3급이다. 아마도 그의 미래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 더 크고 빛나겠지.
특히 아바는 팀을 꾸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아바 팀으로 들어가고 멘토-멘티 교육까지 받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브라이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이거… 이러다 한 달도 안 돼서 결혼 발표하는 거 아냐?”
가슴을 부여잡은 그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씹듯이 내뱉었다.
“은인인 건 감사하지만, 고자나 돼 버려라!”
***
“엣취-!”
아바는 재채기하는 도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아뇨. 코가 간지러워서요.”
신출내기와 여신으로 불리는 상황에 말투는 시청을 들어오기 전과 반대가 되었다.
아바는 입을 닫았지만, 도현은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하마터면 삐딱하게 ‘재채기하는 사람 처음 봐?’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테스트 방은 사각지대도 없이 전부 녹화되고 있으니.’
도현은 코를 훌쩍이며 찡그린 표정을 겨우 풀었다. 마침 테스트 기계 앞에 서 있던 직원이 손에 서류와 함께 사각 케이스를 들고 둘 앞에 섰다.
“트론 님 측정 결과는 아바 님의 말씀대로 포스 3급입니다. 잘 모르겠다고 하셨던 특성은… 정말 특수한 능력으로 정신 계열로 판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러면서 손에 들린 사각 케이스를 도현과 아바에게 건넸다.
설명이 이어졌다.
“사이커 개편 이후 자격증이 폐지되고 워치로 바뀌었습니다. 마나와 반응하며 사이커의 시스템을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신분증 대신 사용 가능합니다. 그 외에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뱅킹 사용이나 휴대폰처럼 통화도 가능하다는 짧은 설명도 붙었다.
“트론 님, 사고로 인해 잃으신 사회적 지휘는 포스 3급 트론 님으로 모두 맞춰질 겁니다. 한 시간 뒤 확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직원은 웃음을 잃지 않고 친절하면서도 무례하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의를 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도현과 아바는 서로를 쳐다봤다가 직원을 응시했다.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둘은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계획대로다!
아바가 물었다.
“무슨 제의죠?”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저도 잘 모릅니다. 승낙하시면 모시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아바가 팔짱을 끼며 일부러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례하군요.”
포스 원. 명칭이 달라지긴 했지만, 헌터 1급은 한 나라의 대통령과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지위나 대우가 상상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그런 사람을 오라 가라 한다는 건 그만큼 동등한 지위이거나 정말 대통령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될 일.
불쾌한 게 당연했다.
그랬기에 직원은 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무척이나 흡족하실 거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직 허리를 펴지 않은 직원을 빤히 보기만 하는 아바 대신 도현이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궁금하지 않나요, 아바 누나?”
도현의 목소리는 해맑다 못해 호기심 가득했다. 하지만 사이커 워치 케이스를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바는 웃음을 참는 대신 눈을 휘었고, 그 덕에 목소리는 쾌활해졌다.
“트론 동생이 궁금하다 하니까, 승낙하죠.”
“감사합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허리를 곧게 펴 두 사람을 향해 반걸음 다가왔다. 바닥에 원 형태로 빛기둥이 솟더니 세 사람을 삼켰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7성급 호텔의 로비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실내였다. 일반적인 집보다 높은 천장에는 크리스털로 만든 것 같은 조명과 고급스러운 장식들, 예술품들이 배치된 펜트하우스.
대리석 바닥은 금으로 도배한 듯 황금으로 반짝여 밟고 서 있기도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무슨 드래곤 레어도 아니고.’
어쩌면 정말 그런 놈이 있지 않을까, 그놈이 설마 조력자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도현은 직원의 안내에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선객이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동양인 사내와 은빛의 단발에 은색 눈동자의 소녀.
도현의 눈이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