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43화 (142/200)

# 143

143. 워프 브레이크 (3)

민혁은 팔짱을 낀 채 댓 발 나온 입을 꾹 다물고 빽빽한 숲을 향해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민혁의 옆에 선 도현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웃음을 빙자한 한숨을 계속 뱉었다.

“미안하다니까.”

도현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하지만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폼은 사과하는 자세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민혁은 도현의 모습을 본 건 아니지만 빤했다. 지금 자신의 복장은 누가 봐도 웃을,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중세 시대 때 레이디들이 입었을 법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구불구불 구부러진 갈색 가발을 쓰고, 화장까지 한. 다행이라면 키가 큰 탓에 굽 높은 구두가 아닌 플랫 슈즈를 신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그런데 왜 민혁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그건 도현이 블랙홀 팜 사업을 추진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도현의 부모님께 은혜를 갚겠다고 큰소리쳤던 민혁은 도현의 엄마, 임혜정에게 불려 갔고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블랙홀 랜드 간판 연예인 헌터로 선정되었다.

어렸을 때 마주치기만 하면 인사와 함께 늘 예쁘다고 칭찬을 들었었는데, 그게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세상이 바뀌고 고생을 했던 민혁은 자신의 얼굴이 그냥 평범해졌다고 생각했다.

안 그렇겠나. 먹고살기도 힘든데, 화장품 살 돈이 있었다면 그 돈으로 엄마의 티셔츠라도 하나 더 사 드렸을 효자다.

아무튼 그런 고생으로 잘생긴 것도 다 옛말로 생각했었는데, 임혜정의 눈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적당히 고생한 얼굴! 우수에 젖은 눈! 연예인 헌터로서는 딱이지!’

그런데 왜 이런 복장을 했냐.

3일 전부터 찍기 시작한 웹드라마 때문이었다.

블랙홀 랜드의 묘한 문화에 맞춰 동화를 각색해 만드는 웹드라마인데, 블랙홀 랜드의 이스트 시티 시장의 딸이 풋내기 헌터와 사랑에 빠지고, 그걸 반대한 시장은 딸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시장의 딸에게 첫눈에 반한 풋내기 헌터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마침 오늘 저녁 숙녀들의 다과회가 열리는데 그곳에 참가하기 위해 변장을 하는 그런 신이었다.

문제는 여장한 민혁이 웬만한 여자 연예인보다 더 예쁘다는 것.

울며 겨자 먹기로 여장을 한 것도 서러운데, 보는 스태프들이나 마주치는 배우마다 넋을 놓고 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크리티컬이 터진 건…….

“민혁아, 나 왔다.”

그 자리에 도현이 나타난 거다.

그것도 한국 헌터 협회 전 협회장인 강혁을 이끌고서.

‘하필이면…….’

민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려다 멈칫했다. 얼굴에 한 화장이 번질까, 붙인 속눈썹이 망가질까 걱정이 먼저 들어서다.

그 걱정이 들자마자 다시금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어서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에 민혁은 참았던 섭섭함이 터져 버렸다.

“야, 우도현!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어?”

“뭘?”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만 쏙 빼놓고! 중국에서 그런 큰일을 벌여?”

눈에 불똥이 튀는 게 조금만 더 이성을 잃었으면 멱살을 잡고 탈탈 털었을 분위기였다.

도현은 장난스러운 웃음 대신 약간 성숙한 웃음을 입가에 걸치며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한 손을 빼 민혁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래서 이 형님이 친히 여기까지 행차하시지 않았냐.”

민혁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치렁치렁한 가발이 혹시나 상할까 몸을 빼내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해 줘야 했다.

그것만 해도 열불이 나는데,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탄성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도현이 물었다.

“언제 끝나는데?”

“오늘은 풀이야. 내일 저녁쯤엔 시간 될 거야.”

“이야, 인기 좋은데? 소원 성취도 하고.”

“무슨 소원 성취? 착취… 하아, 아니다, 아니야.”

도현의 얼굴이 잠깐 멍해졌다. 그래, 민혁이의 소원이 연예인이었던 건 개꿈에서였지.

왠지 그 꿈이 그리워진 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임 여사한테 걸리면 그렇지. 농장 시간이지?”

“어.”

“그럼 저녁에 시간 비워 놔.”

“왜?”

“지석환 셰프, 일대일 요리 강습받기로 했거든. 너도 한동안 요리 학원 못 나갔을 거 아냐?”

실은 아직 약속을 잡은 건 아니지만, 언제든 연락만 주면 최대한 맞추겠다고 했으니까 되지 않을까?

어차피 국내에서는 헌팅할 곳도 마땅치 않을 거고. 아니면 벌써 블랙홀 랜드에 들어와 있을지도?

민혁도 그제야 요리 학원이 떠오른 건지 영 찜찜한 얼굴이었다.

“뭐… 그렇지? 근데 일대일 강습인데 내가 껴도 되냐?”

“못 낄 건 뭐야. 아무튼 끝나면 연락 줘.”

“그래.”

그렇게 어깨동무를 풀었을 때, 뒤에서 쨍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민혁 헌터님! KHTVC, 헌터가 간다! 강미영 리포터입니다! 인터… 으앗, 우도현 헌터니임? 엇, 저분은 누구……? 얼굴이 낯이 익은…….”

개구쟁이 같던 도현의 얼굴이 몹시 구겨졌다. 리포터 뒤로 카메라를 든 김영대가 다급하게 도현과 강혁을 찍기 시작했다.

“아, 강 리포터님! 조금 늦으셨네요!”

민혁이 빠르게 몸을 돌려 리포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카메라가 도현과 강혁을 쫓지 못하게 은근슬쩍 몸으로 가리며 등 뒤로 손을 흔들었다.

도현은 말없이 기다려 준 강혁과 조용히 사라졌다.

***

농장 중심부, 너른 공터의 집으로 돌아오자 강혁이 입을 뗐다.

“궁상떠는 놈 구제하러 간다더니?”

“그러게요. 한동안 방치해서 뿔났을 줄 알았는데, 블랙홀 간판스타가 됐을 줄은 몰랐네요.”

“등록하러 왔을 때랑 비교하면 확 살아났던데? 정말 연예인 느낌도 나고.”

“관리 받았을 테니 당연하겠죠.”

“그런데 뭐 하냐?”

도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허공을 손으로 쿡쿡 찔러 댔다.

그 모습이 시스템 창을 조작하는 행동이라는 건 강혁도 알았지만, 지금 그러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었다.

“매부를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농장에 없는 것 같아서요.”

“도식이……? 그야 헌터 협회 일로 바쁘겠지. 그게 다 보이냐?”

“주민으로 등록하면 볼 수 있더라구요. 농장 주인이라서 그런가.”

전혀 긴장감 없는 대답이었지만, 말 속의 뜻을 알아차린 강혁은 눈이 시렸다. 아래로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말 한 세상의 신이네.”

도현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

“아니다.”

뭔가 싱거운 대화에 찜찜함을 느끼던 도현은 머릿속에 울리는 오제아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님, 미국 헌터 아바 씨가 조금 위험한 상황입니다.

-아바가 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짧게 끊기자마자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차도식과 하지현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처남님! 크, 큰일 났습니다! 전 세계가 워프 브레이크에…….”

도현을 발견하자마자 줄줄 내뱉던 차도식은 도현 옆에 앉은 강혁을 보고 멈칫했다.

되게 앳되어 보이는 백발의 사내.

아니… 은발인가?

뭔가 낯이 익으면서도 낯설다.

“저분은 누구……?”

“아, 강혁 삼촌이요. 좀 전에 의식을 차렸어요.”

“아, 아저씨라고……?”

하지현도 믿기 힘든지 강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게 조금 소란스러운 거실에 조용히 오제아와 테이스가 함께 나타났다.

“주인님, 아바 씨가…….”

“비, 빌런 킹?”

이젠 강혁까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도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선 좀 앉죠.”

어색함과 냉랭함, 적의가 섞인 불편함으로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간단히 설명이 이어졌다.

차 부부가 온 이유는 워프 브레이크로 몬스터가 땅을 차지했다는 것과 그런 나라 중 시리아에서 핵폭발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핵폭발이 예기치 않게 일어났지만, 그 효과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보던 타 국가는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2주기 워프 중 최하위 등급인 4등급 몬스터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핵폭발에 휩쓸린 몬스터들은 괴상한 형태로 변이해 더 강해졌다.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핵폭발의 여파인 방사능은 그 어디에서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지원 요청이 왔음에도 선뜻 대답을 못했단다.

그런 세계적 재난으로 인해 한국에 밀려드는 여행객. 말이 여행객이지, 도망치는 사람이 엄청나다는데……. 반대로 시기에 맞물려 한국에 있었던 여행객들은 더 오래 머물기 위해 발악 중이란다.

그리고 이어진 테이스의 이야기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워프 브레이크를 막지 않은 이유는 마나 농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한마디에 차 부부와 강혁은 중국의 사건을 떠올렸다.

도현과 싸웠던 황금 갑옷 사내. 손에 쥔 보라색 수정을 부수자마자 베이징의 2세대 워프가 동시에 브레이크를 일으킨 일.

그 순간 베이징의 마나 농도는 평소보다 천 배나 올라갔었다.

중국의 헌터 집단 비휴단과 소림의 스님이 나서 사상자를 줄였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대형 몬스터, 도철이 도와 없애긴 했지만.

아직 그 영향이 남은 베이징의 마나 농도는 지구 전체의 마나 농도보다 20배 정도 높았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새로운 각성자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헌터들의 급수도 조금씩 높게 측정되었다.

더 소름 돋는 이야기가 차도식의 입에서 나왔다.

“…사실입니까? 미국에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적의와 의심이 가득한 말투였다. 오히려 존대하며 이성을 붙잡고 있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때 위협을 겪은 장본인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테이스는 무표정했다. 흐린 기억은 남아 있지만, 감정은 메마른 지 오래다.

그에게 있어 선명한 기억은 주인인 오제아의 아량으로 진정한 마족이 되었을 때부터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진정한 모습일 때와 지금처럼 인간의 모습일 때 성격은 극과 극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꺼림칙했다. 주인의 주인 우도현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다며 끓는 피가 짐승처럼 짖어 댔지만,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오제아의 조련의 성과였다.

아무튼.

대답 없는 테이스 때문에 분위기는 흉흉해져만 갔다.

도현만 아니었다면 당장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됐을 정도로.

참다못한 차도식이 다그쳤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빌런 채근석!”

당장에라도 무기를 뽑고 달려들 법한 모습이었지만, 목에 핏대만 세웠다.

도현을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테이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검을 뽑는다면 즉시 죽여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을 데려온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입을 뗐다.

“테이스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테이스는 오른손을 펼쳐 허공에 뻗었다.

메모라이즈 리플레이어.

3D 입체 영상이 거실 전체를 무대로 펼쳐졌다.

1+등급의 워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 거기에 의자에 앉은 채 결박당한 아바가 보였다.

영상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작은 섬이 검은 안개로 뒤덮이고, 그 안개가 워프 브레이크를 막다 못해 먹어 치우는 모습을 끝으로 영상이 사라졌다.

하지현과 강혁은 각각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도식만 분노를 삼키며 테이스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 주먹 쥔 손을 떨었다.

그저 마법 한 번 썼을 뿐이지만, 거기서 힘의 격차를 느낀 듯했다.

도현은 평소랑 같은 모습으로 오제아에게 물었다.

“아바는?”

“여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잠시 제로급 지역에 두었어요.”

“그 정도야?”

“주인님, 혹시 그녀가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모르시는 건가요?”

“음, 그냥 독특하다는 정도?”

“그럼 주인님의… 힘을 나누어 주신 건……?”

그녀가 피가 아닌 힘이라고 말한 건 세 사람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대충 알아들은 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성장을 막고 있는 것 같아서? 미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좀 볼 겸.”

오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키는 대로 저지르고 보는 성격.

설마 아니겠지 하며 믿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만큼 강하시지만.’

이번만큼은 힘들다고, 자신도 가려던 걸 토토와 모르달이 막아 갈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예상을 비웃듯 신 리갈루스를 천천히 괴로움에 발버둥 치도록 죽이는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지쳤음에도 심드렁한 얼굴.

절제된 그 야성!

정말 황홀했다.

기억을 회상하던 오제아는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멋진 주인님인데, 같은 차원에 있으면서도 자주 뵙기 힘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되겠어. 직원을 구하고 직접 주인님을 보필해야지.’

회사를 창립할 때부터 직원 이야기를 했던 임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생각만으로 들뜬 오제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직접 보러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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