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 신 제브라드를 찾아서 (1)
도현은 아바에게 가지 않았다.
대신 보낸 건 민혁이었다. 웹드라마 녹화가 끝나면 맞춰서 가 보라고.
어차피 바로 가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오제아의 얼굴이 시들시들해지자 오히려 그 뒤에 서 있던 테이스가 도현을 죽일 듯 노려본 것이 첫 번째 여담이고, 오제아에게 들켜 끌려갔다는 게 두 번째 여담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현실로 돌아와 한국 헌터 협회로 향했다.
물론 차 부부와 앙증맞은 강아지로 변한 강혁과 함께 말이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엔 좀 껄끄럽다나.
‘그냥 귀찮아서겠지.’
도현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언짢았다.
이 일은 사가가 전문인데, 숲에서 그렇게 내뺀 뒤로 찾을 수 없어 이대로 가게 됐으니까.
‘온오프도 안 되고 말이야.’
펫은 위치도 안 나오니 더 답답했다.
뭔가 중요한 한 가지를 빠트린 것 같은 허전함이 들었지만 그게 대체 무엇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 안 나는 거 보니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하고만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란 걸, 도현은 전혀 알지 못했다.
***
농장 화산 지대의 토토 대장간.
마그마보다 더 뜨거운 고온의 열기를 쉼 없이 내뿜는 곳으로, 불에 내성을 가진 서식지의 몬스터들조차 기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대장간이 조용했다. 뜨거운 열기도 뿜지 않았다.
몬스터들은 대장간의 주인인 토토가 아직 저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고개를 쭉 빼 보이지도 않는 동굴 안쪽을 한 번씩 확인하고 어슬렁어슬렁 화산 주변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 상황을 누군가 봤더라면 몬스터의 지능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고민해 볼 만한 모습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농장 주민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접근 금지 구역 중 하나였다.
대장간 안.
오랜만에 불씨를 꺼트린 화로는 꿀맛 같은 휴식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 대장간의 주인인 토토는 오늘따라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을 더 깜빡이며 앞에 선 두 동물에게 말했다.
“모루달! 조심해서 다녀아! 사가도 조심해야 대!”
평소였다면 모르달은 방정맞은 웃음을 지으며 오두방정을 떨었겠지만, 오늘따라 잔뜩 긴장한 모습이 전쟁을 앞둔 병사 같았다.
“예, 토토 님! 금방 다녀오겠슴다요! 도련님께는 꼭 비밀임다욧!”
“웅, 웅! 아빠한테는 비- 밀!”
두 동물이 주고받는 인사를 조용히 보던 사가는 자신을 쳐다보는 모르달에게 물었다.
“준비는 끝났느냐?”
“옙! 출발하심쑈!”
모르달은 굳게 입을 다물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 셋은 무슨 계획을 짠 걸까?
그건 도현이 중국에서 워프를 터느라 정신없을 즈음.
농장이 생겨난 이래, 다들 잠잘 시간도 줄여 가며 가장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사가만 널널했는데, 모두가 그저 특이한 고양이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둥거림이 하루 일과인 사가는 여느 때처럼 책상 위에서 햇볕을 쬐며 뒹굴어 대니 오제아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서늘한 시선과 잦은 틱틱거림, 거기에 몇 마디 거들었다가 이상한 일을 떠맡기려 드는 통에 귀찮은 몸을 이끌고 도현의 농장으로 도망가 버렸다.
예전이었다면 한없이 조용하고 한적했을 곳이었지만, 블랙홀 랜드의 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인어족들과 최근 농장 주민이 된 헌터들이 하루가 멀다고 훈련이니, 수련이니 해 대는 통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밤낮 없는 소음과 충격에 피신처를 찾다 닿은 곳이 도현의 자취방이었다.
현재 주인은 중국을 휘젓고 다니느라 바빴고, 토토는 대장간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종일 떠들어도 지치지 않는 모르달은 가출 상태.
조용한 도현의 자취방이야말로 사가에게 있어 안성맞춤이랄까.
발코니로 들어오는 햇볕도 좋았고, 심심하면 TV를 볼 수도 있었다.
배가 고프면 잠깐 농장에 들러 키리카나 바다의 뱀장어들을 먹으면 됐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고는 도현의 명령 정도일까.
도현의 부모님인 우대성과 임혜정을 지키는 일이었는데, 최근 벌인 사업으로 블랙홀 랜드에서 나갈 일이 없다 보니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두 사람이 몬스터가 바글바글한 농장을 찾을 이유도 없었으니 위험성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물론 안전장치는 해 두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무튼 보디가드 일을 제외하면 사가의 표면적인 일과였으나, 그 속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도현이 신의 대리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사가는 신 제브라드가 정말 영면에 들었을 거라는 확신이 섰지만, 마음속으론 부정하고 있었다.
제브라드 세계를 위해 헌신했던 그녀의 끝이 그렇게 허무하리라고는…….
사가는 신 제브라드가 자신을 불렀던 그날을 회상했다.
도현이 제 차원에 돌아가고 한 달도 안 됐을 때였다.
‘제브라드는 저 혼자 탄생시킨 차원이 아니에요.’
신 제브라드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러 대에 걸쳐 지금의 제브라드라는 세계가 탄생했고, 그녀의 대에서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
‘저는 제브라드가 더 좋은 차원이 되었으면 했어요.’
더 큰 발전을 위해 그녀는 다른 차원에서 다음 대의 제브라드를 찾으려 했고, 그게 도현이었다.
‘그게 실수였죠. 왜 선대의 제브라드들이 다른 차원에서 신을 데려오지 않았는지, 지금에서야 깨달았어요.’
다른 차원에 간섭하게 되면 차원이 이어지며 운명까지 함께하게 된다는 걸.
‘그래서… 사가에게 부탁이 있어요.’
신이 되어 지구를 지켜 주세요.
그가 돌아갈 곳이 있도록.
그것이 사가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가도 몰랐다.
단지 신 제브라드가 제브라드와 지구를 살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것만 은연중에 느꼈을 뿐.
도현이 지구에 돌아온 것을 확인했고, 이놈이 평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밑 작업도 해 두었다.
1년 정도는 잘 지내는 것 같더니.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 도현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원해서 친 건 아니지만, 싸움만 좋아하는 마룡 골고타가 하필이면 도현의 친우를 건든 게 화근이었다.
다행이라면 자신과 지구의 임시 관리자인 도깨비 휘만 도현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장치도 제브라드가 해 둔 것임을 깨달았고. 사가는 제발 도현이 더 큰 사고를 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보기 좋게 깨진 건 워프 브레이크 사태였다.
신들 서로 간에 움직임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 감시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속이 타들어 가도 지켜보기만 했던 사가는 도현이 한국의 모든 워프를 쓸어버리자 그를 만나 볼 수밖에 없었다.
잘 타일러 조용히 지낼 것을 말했으나 오히려 사가가 펫으로 낚여 버리고…….
이어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도현 자신이 ‘신의 대리자’라는.
사가는 그제야 머릿속 퍼즐이 모두 맞춰진다는 걸 깨달았다.
신 제브라드는 대를 이어 왔다는 걸.
다음 대는 도현이라는 걸.
그 때문에 현재 신, 제브라드는 사라졌을 거라는 걸…….
충격적인 결론에 사가는 큰 결심을 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차원 마켓, 신이 되면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인 그곳을 뒤졌다.
그리고 원하던 아이템을 찾을 수 있었다.
[차원 여행권]
따분한 신 생활에 염증을 느끼셨나요?
그런 분들을 위해 추천합니다!
원하시는 차원으로 여행을 떠나 보세요~
1) 3박 4일권–10만 포인트
2) 6박 7일권–15만 포인트
3) 12박 13일권–30만 포인트
*한 번이라도 다녀온 차원만 가능합니다. 다른 차원을 원하시면 ‘차원 여행권(랜덤)’을 이용해 주세요.
*장기 여행은 현재 지배 중인 차원의 지배력을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1신 1매, 함께 여행할 생명체의 경우 격에 따라 추가로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사가가 지구에서 모은 포인트는 겨우 10만. 한국에 워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서 2만이 더 늘어 12만이 되었다.
그러다 리갈루스의 조건 워프로 20만을 더 벌었고, 각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워프 브레이크로 50만이라는 포인트가 쌓였다.
“이 정도라면 12박 13일권을 살 수 있겠구만.”
제브라드에서 직접 신의 흔적을 찾을 생각이었다.
3박 4일이면 턱없이 부족했겠지만, 지금은 걱정 없이 다녀올 만큼 넉넉했다.
그렇게 흐뭇한 웃음을 짓는데.
“혹시 차원 여행권임까요?”
“우와아악! 뭣이냐?”
갑작스럽게 불쑥 튀어나온 길쭉한 하얀 덩어리, 모르달에게 들키고 말았다.
“차원 여행권임죠? 제브라드에 갈 생각이심죠? 소인도 데려가 주심쑈! 소인도 가야 함다욧!”
사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지만…….
“소인만큼 제브라드 님을 아심까요? 제브라드 님의 처소가 어딘지 아심까요? 제브라드 님의 업무는 무엇인지 아심까요? 제브라드 님이 자주 찾으시던 장소……! 제브라드 님의 신성력을 소인보다 잘 아심까욧?”
…졌다, 졌어.
얼굴이 빈대떡이 되도록 들러붙어 몰아치는데, 그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다.
사가는 모르달을 끼워 12박 13일권을 구매하려 했지만 60만 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경악하고, 그 아래 단계인 6박 7일권을 35만 포인트에 구매했다.
“왜 신보다 동반 생명체가 더 비싸?”
뻥튀기되는 가격에 씩씩대는 사가를 보며 모르달이 콧방귀를 팽, 하고 뀌었다.
“당연한 거 아님까요? 왕이 혼자 여행 감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고작 한 마리…….
“아, 소인은 다재다능한 심부름꾼 아님까요? 제브라드 님께서 다른 생명체보다 20배나 낫다고 하셨슴다요!”
“…….”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사가는 그게 그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평균으로 치면 1만 포인트만 들 걸 20배나…….
‘내 포인트…….’
지구의 워프 유지로 1년에 겨우 1만 포인트를 모으던 사가는 차라리 멋모르던 드래곤 시절이 너무 그리워졌다.
***
린 아니사와 거대 흰족제비가 도착한 곳은 드래곤 로드 사가나자르가 지냈던 레어였다.
“160년이 넘었어도 여긴 그대로구나.”
추억에 잠긴 눈으로 내부를 둘러보던 사가는 모르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느냐?”
“소인 집임다요.”
모르달이 꼬리로 허공을 통, 하고 치자 파문이 일어나며 작은 포탈이 생겼다.
사가가 놀라 소리쳤다.
“이놈아! 신성력을 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신성력 아님다요. 각인임다요. 따라오심쑈!”
냉큼 들어가 버리는 모르달을 따라 들어간 사가는 아담해 보이는 집과 집을 둘러싼 자연 위를 덮는 노을에 눈을 끔뻑였다.
이 모든 게 신의 격으로 만들었다니. 사가는 새삼 신 제브라드의 격에 넋을 잃고 멍하니 장관을 보고 있었다.
“안 오심까요?”
짜증이 밴 재촉에 따라 들어간 집은 겉보기와 달리 방이 엄청 많았다.
“전부 식재료나 술을 빚어 둔 창고임다요!”
움직이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하던 모르달이 멈춘 곳은 문틀만 있는 문이었다.
“여기가 제브라드 님 처소임다요!”
둘은 긴장한 채 문을 넘었다.
그리고,
붉은 긴 머리카락과 수수한 흰색의 원피스 차림의 신 제브라드가 둘을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