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 깽판 (4)
아침이라기엔 늦고, 점심이라기엔 좀 이른 시간의 식사가 끝났다.
흡족한 시간을 보낸 세 사람과 두 펫은 뒷정리를 하고도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식탁 중앙에는 도마와 칼, 접시와 함께 놓인 검은 덩어리.
모르달이 아공간에서 꺼낸 열매였다.
[후룰루타의 열매.]
“큰 나무 기억하심까요? 그놈의 열매임다요.”
도현은 고래 고기를 구우며 축제를 준비하던 때 몰려왔던 몬스터들을 기억해 냈다.
워프로 치자면 보스 몬스터라 볼 수 있는 이들이었는데, 굽는 냄새에 이끌린 게 아니라 고래 고기에서 퍼지는 진한 마나에 취해 달려온 것이었다.
고래 고기가 되어 버린 오르오타는 거대한 몸집을 움직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근육이 많이 발달해야 했다.
거기에 섬세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했기에 근력보다 마나가 더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몸속 곳곳에 자리 잡은 마나가 고기가 구워지며 퍼진 것인데, 몬스터들에게는 없어서 못 먹는 진귀한 음식이란다.
이미 이전에 비슷한 음식으로 마나석을 넣은 크로아탕을 먹었던 경험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처음 접한 인어나 보스 몬스터들은 성장의 기회가 되었다고.
그 예가 깨끗하게 치워진 식탁에 놓인 이 열매였다.
과일의 왕이라 부르는 두리안. 그 열매 말이다.
외형을 보자마자 떠오른 좋지 못한 기억에 도현은 코를 잡으려 했지만, 막 퍼지는 향은 고린내가 아니었다.
고소한 것 같으면서도 탄내.
숯불 맛이라 부르는 그 향이었다.
‘몬스터가 만들어 낸 열매라 그런가?’
숯덩이로 봐도 무색할 새카만 덩어리. 삐죽삐죽 솟은 가시는 같았지만, 열매 크기는 한 뼘이 조금 안 됐다.
“많이 안 열렸는데, 너 주려고 가져왔지.”
민혁이 모르달의 말을 가로챘다.
열매를 가르는 것엔 아바가 나섰다. 보기와 다르게 무척이나 단단한 열매. 도현을 제외하고 검을 다룰 줄 아는 이는 그녀뿐이었으니까.
열매는 겉모습과 다르게 속은 피처럼 붉은빛을 띠었다. 수박이나 멜론, 참외 같은 박류 열매처럼 반을 가른 두리안이 한 쪽당 4등분 되어 접시에 올려졌다.
쪼개지자마자 퍼지기 시작한 단내는 8등분이 되었을 때 몇 배나 강해져 거실을 꽉 채울 정도였다.
숯불 향에 단내가 섞이면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매력적이었다.
“큰 나무가 고래 고기를 두 덩이나 꿀떡꿀떡 삼키더니 다시 화산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겠슴까요? 그러더니 꼼짝을 안 했슴다요.”
하루가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단다.
3일째, 바다에 가기 위해 움직이려던 넷은 호기심에 나무를 보러 갔고, 20개가 채 안 되는 이 열매가 달린 걸 볼 수 있었다.
도현은 설명을 들으며 수박처럼 잘린 한 조각을 들어 한입 물었다.
박류의 아삭거리는 식감을 기대했던 도현은 부드러운 크림치즈를 베어 문 것처럼 혀가 얼얼할 정도의 단맛과 함께 고소한 불 맛을 느꼈다.
강한 단맛에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라 다시는 입에 대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기분을 인지하기도 전에 입은 다시 한입 먹은 뒤였다.
그렇게 두꺼운 껍질 부분만 제외하고 하나를 해치운 도현은 허전함을 깨달았다.
“씨가 없네.”
열심히 한 조각을 해치우던 아바가 기다렸다는 듯이 동조했다.
“그렇죠? 전부 다 까 봤는데 씨는 없더라구요.”
“전부 다?”
“아… 너무 맛있어서. 헤헤헤…….”
얼굴을 붉히며 웃음으로 때우는 아바를 흘깃 보는 민혁이 순간 울적해지는 게 보였다.
막 껍질만 내려놓은 모르달이 덧붙였다.
“괜찮슴다요. 먹이만 잘 주면 또 열매가 열림다요.”
“꼬기! 꼬기 머그면 댄대! 꼬기 만아!”
몬스터답게 나무도 육식이었다.
‘그래서 워프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져 있었나?’
그 넓은 늪 중앙에 홀로 있던 거목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각자 한 조각씩 먹고 남은 세 조각은 아바와 두 펫에게 돌아갔다.
아직도 입안에 맴도는 단맛에 도현은 참지 못하고 아이스로 진하게 탄 카노 한 잔을 마시며 단맛을 지웠다.
일상의 평온한 티타임.
노곤한 여유까지 느껴지는 이 시간이 무척 마음에 들어 입가에 웃음을 짓던 도현은 갑자기 사레가 들려 쿨럭거리는 민혁을 봤다.
“왜 그래?”
“이거 네가 한 거지?”
얼굴에 들이미는 휴대폰 화면을 보자 기사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밤새 안녕, 워프 127개! 제주 한라산도 자유를 외치다!
XX일 밤 10시경, 제주에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1.3의 미미한 진도였지만…(중략)… 한라산 정상을 틀어막고 있던 주홍빛 달 조각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달 조각이 사라진 한라산의 정상.jpg
…(중략)…
곧 1주기를 맞을 2등급의 워프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관계자인 워프 관리실 소장 유종혁 씨는 ‘헌팅 보고를 받은 적도, 헌터가 들어간 흔적도 찾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차도식 헌터…(중략)…
한라산에 이어 부산, 대구, 울산, 경남, 경북의 3등급 워프도 자취를 감췄으며, 국내 워프는 총 7개…(중략)…
증발한 워프 전체 지도.jpg
동중국해에서 가까운 장쑤 성, 저장 성, 푸젠 성, 관둥 성 지역의 워프 50개도 증발했습니다.
…(중략)…
동해 건너 일본에도 이어졌는데요, 도쿄 근처 요코하마, 시즈오카, 하마마츠, 나고야를 제외한 전 지역의 워프 70개가 사라졌습니다.
…(중략)…
10개는 의식주와 무역의 40퍼센트를 차지하던 생산 워프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후략)….
도현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제 휴대폰으로 기사를 훑던 아바가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묵묵부답이지만, 이번 사건은 헌터 양성 프로젝트로 떠들썩한 미·중·일 헌터의 저력을 보여 주는 과시가 아닐까 합니다……. 이거 계획적이었어요?”
“그럴 리가.”
어깨를 으쓱이는 도현을 보며 아바는 배를 잡고 웃어 댔다.
뭐가 웃긴지 이해 못한 민혁과 도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겨우 웃음을 멈춘 그녀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숨을 들이켰다.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을 미국을 생각하니 너무 웃겨서요. 피해가 없는 건 미국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2등급 워프를 파괴할 정도로 강한 헌터는 현재 미국의 리암 루카스밖에 없어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라진 다른 워프들은 몰라도 한라산은 2등급이었으니까.
부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할 거다. 어느 나라인지 몰라도 그만큼 강한 헌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일종의 경고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을 거예요. 워프의 부산물에 대한 수수료가 엄청나거든요. 특히 타국 헌터에 대해서는. 그리고 일본은 생산 워프 10개를 잃었죠. 이건 전쟁을 하자는 말이에요.”
“헐… 아바 씨는 괜찮은 거예요?”
긴 설명에 이해한 민혁이 아바를 먼저 걱정했다.
그녀는 민혁을 보고 눈을 깜빡이다 쓴웃음을 지었다.
“4급밖에 안 되는 헌터가 뒤집어쓸 일도 아니니 괜찮아요. 다만… 귀국 조치는 내려지겠죠.”
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을 깨 먹던 도현이 말했다.
“잘됐네. 뒤엎고 와.”
“저보고 도현 님 덤터기 쓰라구요?”
“덤터기는 무슨, 팀 조율로 함께 있었는데. 그리고 듣기 거북하니까 그냥 이름 불러.”
“은인한테 어떻게 그래요.”
아바는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먹으며 눈을 옆으로 흘겼다. 살짝 볼이 붉어진 모습이 웬만한 남자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민혁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바 씨 나이도 몰랐네요. 저랑 현이는 26살인데.”
“…여자에게 실례되는 질문 3위가 나이인 거 몰라요?”
문득 팀 구성에 팀원 상세 정보가 있다는 걸 깨달은 도현이 모르달에게 손을 펼쳤다.
“모르달, 테블릿 좀 줘 봐.”
“매니저 테블릿 말씀이심까요?”
테블릿을 받아 익숙하게 프로그램을 만지던 도현은 아바의 프로필을 보고 중얼거렸다.
“27살이네.”
“야!”
그녀가 빨갛게 물든 얼굴로 소리치는 가운데 빨대를 물었던 민혁이 더 당황해서 아바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전 아바 씨가 저랑 현이보다 6살은 어린 줄 알았어요!”
“…정말요?”
“그럼요! 한국에서 고등학생이라 해도 믿겠어요!”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농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성인으로 보였다면, 지금의 모습은 누가 봐도 동안인 외모와 발랄한 분위기에 착각할 만했으니까.
살짝 누그러진 아바를 보며 도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정도야 뭐. 모르달, 너 몇 살이야?”
“소인 말임까요? 2,057살까진 세었슴다요.”
도현은 눈이 튀어나올 듯 떠진 아바를 보며 픽 웃었다.
“애기네, 애기.”
“너, 넌 26살이잖아!”
“아니, 520살이야.”
“마, 말도……!”
반사적으로 거짓말이라 생각했지만, 조금씩 흘렸던 도현의 말을 종합해 보면 사실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지이이잉-!
정신을 수습하느라 버퍼링에 빠진 두 사람을 보며 즐겁게 웃던 도현은 식탁 위에서 울어 대는 휴대폰을 들었다.
한국 헌터 협회장 강혁이었다.
“예, 삼촌.”
(조카야, 네가 했냐?)
앞뒤 다 자른 말이었지만 알아듣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온 대답에 강혁의 깊은 한숨이 들렸다.
(이 자식아, 그냥 국내만 건들지, 왜 해외까지 뒤엎어?)
“스트레스 좀 풀었어요.”
잠깐 강혁이 침묵했다. 몇 번의 한숨과 치익거리는 라이터 소리가 들렸다.
(후, 내가 너 때문에 제 명대로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부산물은……?)
“없죠.”
(…그나마 다행이네.)
“확인하려고 전화했어요?”
강혁은 도현의 목소리에 묘하게 불쾌감이 묻은 걸 알고 있었다.
진하게 연기를 뱉어 낸 강혁은 조금 섭섭한 듯 목소리를 냈다.
(예전에 말이다, 네가 헌터 자격증 따러 왔을 때, 그때 말했던 1급 조건 기억하냐?)
한 달쯤 된 이야기였다.
‘2, 3등급 워프 파괴에… 스탯? 스킬? 제한에, 특수 상황 협조였던가?’
민혁의 헌터 테스트 겸 삼촌과 대련했던 날 대뜸 받은 1급 자격증에 의아하긴 했지만, 국내에서 헌터 자격증은 프리패스권이었다.
그 편의를 거부할 도현은 아니었으니까.
지금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워프 배정의 이유라고요?”
(그래. 그리고 1급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서 어쩌라고? ‘아, 그렇습니까?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해 줘야 하나?
짜증을 가라앉힌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이런 상황이 오는 거지?
“삼촌, 내가 왜 헌터 자격증을 딴 건지 아시죠?”
말이 없었다. 헌터 자격증을 따도록 구슬렸던 건 주 차장이었지만, 삼촌이 모를 순 없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겹쳤다지만,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기 시작하더니 당연한 듯 사람을 부려 먹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뭐, 지구에 깔짝대는 신 놈들이 있어 움직이긴 했지만.’
헌팅을 할 때마다 이슈를 몰고 다닌 탓에 뒤치다꺼리를 해 준 건 주 차장이었다. 헌터니까, 협회장인 강혁의 입김이 제일 강했겠지만.
‘그거야 부려 먹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고.’
그 외에는 휘둘림밖에 없었다.
헌터니까. 강한 헌터니까, 걱정 없이 위험한 워프에 밀어 넣는 것에 단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최소한의 배려도 느낄 수 없는 행위.
군소리 없이 움직인 이유?
강자의 여유라는 전제가 깔리긴 했지만, 아버지의 친우니까.
예의를 지킨 거다.
그리고 믿고 싶었다.
헌터 협회의 존립 이유가 헌터의 보호와 체계적인 워프 헌팅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