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 깽판 (5)
한국 헌터 협회.
겉 포장은 그럴듯했지만, 포장을 까 보면 협회는 헌터들을 통제하기 위한 빌미였다.
빌런이라는 집단처럼 강한 힘을 가진 각성자가 범법자가 되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면 안 되니까.
빌런 사건으로 득을 본 건 협회와 국가였다.
헌터 랭킹전.
세분한 통제를 위해 헌터들의 힘에 대한 기준을 세움과 동시에 불만을 가진 헌터들을 잠재우고, 국내 랭킹전과 세계 랭킹전을 열어 국가의 저력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렇게 협회에 모인 헌터들을 소모품처럼 사용해, 국가와 협회는 워프로 막대한 수익을 끌어냈다.
헌터가 하는 사냥이 헌팅, 즉 청소가 끝이었으니까.
없어진 몬스터들은 대개 1주에서 2주 상간으로 다시 채워졌다.
그러니 윗대가리들은 앉아서 돈을 벌고, 헌터들은 뭐 빠지게 구를 수밖에.
특히 돈이 되는 워프를 중점으로 정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이 닿지 않는 워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몬스터는 계속해서 불어났고, 헌팅이 뜸했던 워프들은 바글바글한 몬스터로 입장조차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계양산 워프 브레이크 사건으로 2주기의 워프가 브레이크를 일으킨다는 걸 깨달은 국가와 협회가 부랴부랴 나섰다.
‘처음에는 폐쇄였지?’
크로아의 바위산 워프.
파괴가 처음으로 거론될 워프였지만, 곧 2주기에 들어서게 되면 1등급이 될 것을 예상해 폐쇄 조치가 내려졌던 워프였다.
그걸 파괴로 뒤엎은 게 차도식 헌터였고, 문제가 있었지만 도현의 도움으로 어쨌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 뒤부터였을 거다.
3급이지만 차도식만큼 강한 도현을 앞세워 기다렸다는 듯 헌팅만 있던 워프 관리에 파괴라는 선택지도 생겼다.
5년 만에 다시 거론된 파괴.
그리고 높은 등급의 워프만 도현에게 떨어졌다. 두 펫만 데리고 갔던 6등급의 스네일의 안식처 워프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 워프도 2주기에 들어설 워프였지.’
그렇다면 테스트였을까?
몬스터 워프였음에도 활용도가 높은 스네일 때문에 유명한 워프였으니까.
그런 것치고 무척 조용하게 진행되었던 점도 이상했다.
비공식이라기엔 빌런 킹으로 등극한 용종 채근석과 도현의 접점을 스네일 워프로 콕 찍은 국가가 온라인으로 아닌 척 흘렸으니까.
현실은 현실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로 본다더니 딱 그 짝 아닌가.
가소로웠다.
너무 가소로워서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이 입 밖으로 샌 건지 강혁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그래, 다 알고 있다. 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졸업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말이다, 헌터가 되면 헌터의 의무는 당연한 거다.)
“의무요? 이미 의무는 차고 넘칩니다만.”
(비상 체제 아니냐.)
“푸하하하!”
도현은 정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넘어가듯 웃어 대는 도현을 보는 두 펫과 두 사람은 긴장했다.
드다다다다!
행동과 달리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집 안을 쩍쩍 갈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달의 신성력 방어막으로 식탁만큼만은 사수한 상태였다.
그마저도 버거운지 모르달은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1초가 1시간처럼 흐르며 모두가 전화를 건 협회장을 욕하고 있을 때,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의무, 제대로 이행해 드리죠.”
도현은 다급하게 뭐라 떠드는 강혁을 무시하고 휴대폰을 부쉈다.
기다렸다는 듯 보호막이 사라지자 겨우 숨통이 트인 모르달이 녹초가 되어 식탁 위에 쓰러져 헥헥댔다.
“아이고, 모르달 죽네…….”
동시에 민혁과 아바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혼자 갈 거 아니죠?”
“우린 네 팀원이라고!”
인벤토리에서 헌터 웨어를 꺼내던 도현은 두 사람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짓을 할 건지 아는데도 함께하겠다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엉망이 된 거실을, 손을 한 번 휘젓는 것으로 되돌리며 답했다.
“빡세.”
‘현이가 빡세다고 할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힘든 걸까?’
민혁이 잔뜩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못 먹어도 고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화투를 모르는 아바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픽 웃던 도현은 꺼낸 헌터 웨어를 민혁에게 던졌다. 허둥지둥 받은 그를 보며 말했다.
“입어.”
그리고 아바를 향해서도 말했다.
“준비해. 끝나면 바로 간다.”
민혁이 도현을 위아래로 훑더니 물었다.
“현이 넌?”
흰 티에, 흰 줄 3개가 들어간 검은 운동복 차림인 걸 지적한 것이었다.
“바지만 갈아입으면 돼.”
“바지……?”
“어. 청바지.”
“야, 아니 그건 좀…….”
문득 아바는 도현이 520살이라 했던 그 배경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서 삼키고 말았다.
***
검정 페인트를 들이부은 듯 온통 어둠만 물든 공간.
그 중앙에 고고하게 빛나는 행성이 공중에 떠 있었다.
짙푸른 바다와 육지가 어우러지고, 구름이 덧칠되어 선명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곳, 지구였다.
홀린 듯 지구가 발하는 은은한 빛을 감상하던 5개의 시선 중 붉은빛이 감도는 황금색 눈동자, 리갈루스가 코웃음 쳤다.
「우도현이라 했던가? 웃긴 놈이군. 우릴 못 씹어 먹어 안달이던 놈이 이렇게 도와주다니 말이야.」
보라색 눈동자, 훼르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른 눈들을 훑었다.
「그러니까. 혹시 누구의 대리자야? 그건 반칙이라고.」
대리자. 다른 말로 신의 조각으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를 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광신도 중 광신도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신의 모든 걸 이어 받는 계승자이기도 했다.
훼르타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리갈루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래, 그럴 수 있겠군. 그렇다면 가장 이득을 본 자의 대리자인가?」
리갈루스의 강렬한 시선이 초록색의 외눈박이, 휴레가크에게 향했다.
「이런, 이런. 날 의심하는 건가? 오히려 난 큰 손해를 봤어.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깜빡이던 휴레가크의 눈이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훼르타가 수긍했다.
「그건 그래. 꽤 예쁜 누나였지. 새빨간 게 참 마음에 들었었는데 죽을 줄이야.」
아련해지는 훼르타를 무시하고 휴레가크는 회색 눈동자, 휘에게 물었다.
「지구 태생인 자네는 알 수 있지 않나?」
반쯤 떠진 무감각한 회색 눈동자가 휴레가크를 응시했다가 지구를 향해 돌아갔다.
「미친 소리 하고 있네.」
리갈루스가 빈정거렸다.
「저급한 말투는 여전히 거슬리는군.」
「아, 역시 휘 형은 재밌다니까?」
즐거운 듯 반짝이는 훼르타의 시선이 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휘가 찡그리듯 웃으며 덧붙였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다시 말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관리자로 참관한 거다. 늬들 놀음에 낄 생각은 개미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착각도 고마 처해라.」
휴레가크는 얼굴이라도 되는 양 눈이 위아래로 까딱였다.
「그래, 그래. 괜한 말을 했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구만. 그건 그렇고…….」
외눈이 침묵하고 있는 은빛 눈동자, 린 아니사를 향했다.
「자네가 바빠지겠군.」
4개의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린 아니사는 지구만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왜 시비지?」
얼음장 같은 목소리.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휴레가크가 눈을 가볍게 휘었다.
「이런, 이런. 오해하지 말게나. 자네가 맡은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알고 있네. 이참에 강한 워프로 부탁하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겠는가.」
은빛 눈동자가 차갑게 비웃었다.
「알아서 한다. 네놈 세력에나 신경 쓰시지. 갑자기 사라진 워프로 곤욕을 치르고 있지 않나?」
「부정할 수 없구먼.」
잠잠히 있던 훼르타가 눈동자들을 둘러보다 물었다.
「근데 먹보 아저씨 어디 갔어?」
「먹으러. 이제부터 마데아크는 정기 모임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린 아니사의 말에 훼르타가 눈을 흔들었다.
「처음에도 먹으려고 왔다더니, 정말 먹으러만 다니네. 대단하다.」
휴레가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자, 다들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모임은 여기까지 하지. 모두 질 좋은 거름을 찾기 바라네.」
외눈이 휘에게 머물렀다 먼저 사라졌다.
뒤를 이어 리갈루스가 퇴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훼르타가 리 아니사에게 조르듯 말했다.
「누나, 누나, 이번엔 강한 거로 부탁해! 바로 터지면 더 좋고! 누나만 믿어!」
저 말만 하고 사라지자 공간에 남은 건 휘와 린 아니사 둘이었다.
고요하다 못해 가라앉은 적막함만 감도는 가운데, 조금 전까지 차갑기만 하던 린 아니사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멍청이.」
그 한마디만 던지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휘는 씁쓸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
[3등급 드리아스 농경지에 입장하셨습니다.]
알림이 들리기 무섭게 세 사람과 두 펫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르달, 브리핑.”
도현이 모르달을 부르자, 익숙하게 매니저용 태블릿을 켠 모르달이 세 사람 앞에서 화면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드리아스. 나무에 붙어사는 정령임다요. 나무의 영혼이 아니냐는 말이 있슴다만, 드리아스를 없애도 나무는 그대로라 기생형 정령으로 봄다요.”
여태 다녀 본 워프와 달리 이 워프의 나무는 특이했다.
작달막한 키에 가지가 옆으로 뻗어 잎이 달린 형태였다.
전체 크기는 겨우 1미터를 넘는 작은 나무.
풀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작았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한 뼘 크기의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2등신 꼬마들이 기웃거렸다.
모르달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드리아스는 기생한 나무의 나뭇잎을 주식으로 하는 애벌레를 키움다요. 그 애벌레가 누에와 흡사함다요. 해외에도 비슷한 워프가 있지만, 한국이 최상품종으로 꼽힘다요. 헌터 웨어와 방어구, 무기 등등! 없어서 못 팜다요.”
곧 1주기를 맞는 워프였다. 하지만 나무를 베어 내지 않으면 공격성이 없는 완전한 생산 워프.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비유되는 곳이었다.
2주기를 겪는다고 해도 파괴는커녕 계속 생산해 내겠지. 워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워프 주변 일대에 울타리를 쳐서라도 유지할 워프였다.
그만큼 돈이 되는 워프니까.
민혁이 마른침만 삼키다 궁금함을 못 참고 도현에게 물었다.
“여기 정말 파괴하러 온 거야?”
“아니.”
“그럼?”
“탈탈 털어야지. 더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게.”
생각 없는 토토를 제외한 셋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든 말든 도현은 자신의 어깨에 앉아 워프를 두리번거리는 토토에게 말했다.
“토토, 놀이터에 넣고 싶은 거 다 쓸어 넣어.”
“정말? 와! 와! 싱난다!”
그 모습이 천진난만해 도현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토토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마자 숲으로 튀어 나가는 모습에 모르달이 안절부절못했다.
“같이 다녀와. 스캔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오옷! 옙, 도련님! 소인, 토토 님을 확실히 보호하겠슴다욧!”
보호는 무슨, 같이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토토를 향해 달려가는 모르달을 보다 뒤돌아선 도현이 민혁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