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106. 깽판 (1)
도현은 농장에서 가까운 남쪽 바다 사이쯤, 마나 농도가 유난히 높은 숲에 먼저 들렀다.
지도에서 확인한 이름은 정령의 놀이터.
농장의 세계관에 다시금 의구심이 들었지만, 손에 쥔 워프핵의 감촉에 호기심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정령의 놀이터가 ‘잊힌 페어리의 기억’의 워프핵을 흡수했습니다!]
[정령의 놀이터가 환수의 요람으로 진화합니다!]
[농장에 서식하는 동물들 사이에서 아주 미약한 확률로 환수가 태어납니다]
“환수……?”
도현은 처음 듣는 종족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령이야 제브라드에서 간간이 보긴 했지만, 직접 계약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검과 마법에 재능을 몰빵한 듯 그 외의 능력은 처참할 정도로 없었으니까.
한때 판타지의 꽃은 정령이라며 욕심과 오기를 부렸었다. 한참 후에야 재능이 단 1도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드래곤 사이에 퍼져 한동안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쥐어 터진 드래곤 수만 열 손가락이 넘었다.
‘이오르가 대단했지.’
제일 많이 터졌던 드래곤. 그럼에도 매번 놀려 대는 걸 그만두지 않은 녀석.
그 녀석 때문에 용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연구 끝에 자신도 용언, 정확히는 ‘의지를 싣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습게도 정령을 파헤치던 시간의 반의반의 반도 안 걸렸다는 걸 깨닫고 다시 좌절할 뻔했지만.
그렇게 사용한 용언은 굉장했다.
미련이 뚝뚝 흐를 정도였던 정령을 그냥 잊을 정도로.
단점은 소드마스터가 닭을 잡기 위해 칼을 빼 드는 격이라는 것이었다.
“음, 그래도 환수는 좀 다르겠지.”
정령처럼 재능이 요구된다면 다시 그 미친 짓을 되풀이할지도 모르겠지만, 새로운 종족은 나쁘지 않았다.
“다음은 강으로.”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남동쪽의 아주 굵은 강이었다.
지도를 만들기 위해 빠르게 사방위를 훑었을 때 존재감을 과시하던 서서북쪽의 거대한 산.
용암을 분출하듯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가 이 강의 뼈대가 되고, 각기 다른 지역에서 흘러 들어온 물들이 합쳐지며 만들어진 강으로 농장의 젖줄이라 할 수 있었다.
[므라슈의 강이 ‘폭주한 이구아나의 밀림’의 워프핵을 흡수했습니다!]
[므라슈 강에 흉폭한 리자드가 출몰합니다!]
[위협을 느낀 므라슈 강의 므라슈가 메로우로 진화합니다!]
[므라슈 강에 지배 종족 ‘메로우’가 나타납니다. 강 주변의 생태계가 변화합니다!]
“오, 이런 변화도 생기네?”
하늘에 떠 관찰하던 도현은 막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미는 므라슈를 볼 수 있었다.
잉어와 똑같이 생긴 물고기. 3미터라는 무지막지한 크기였지만, 물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므라슈는 메로우라는 몬스터였다.
반인반어로 상체는 사람과 똑같은 형태의 나신이었다. 하체는 물고기처럼 비늘이 있었고, 발 대신 지느러미가 달렸다.
인어족을 빼다 박은 모습이지만, 잉어 태생이라서 그런지 몸 전체에 형형색색의 얼룩을 달고 있었다.
거기에 정말 큰 반전이 있었는데, 여성 메로우는 예술품처럼 아름다웠지만, 남성 메로우는 오크를 물고기로 만든 것처럼 무식하게 못생겼다.
여성 메로우도 미의 기준이 사람과 같은지, 남성 메로우가 다가오자 괴성을 지르며 공격을 하는 통에 한동안 강 전체가 시끄러웠다.
거기에 이름처럼 흉포한 리자드까지.
리자드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여성체는 볼 수 없었다.
“조용할 날이 없겠구나.”
뭐, 알아서들 살겠지.
대충 생각한 도현은 바다로 향했다.
지도에서 본 한 덩어리의 땅은 사방이 전부 물로 가득했다.
그중에서 농장과 제일 가까운 곳이 남쪽 바다. 그렇다고 육지와 가까운 곳에 풀었다간 인어족이 다칠 위험이 컸다.
도현은 조금 더 바다로 나가 워프핵을 바다에 던졌다.
[아흐라나 대해가 ‘잠자는 자이언트 바다뱀’의 워프핵을 흡수했습니다!]
[아흐라나 대해에 바다뱀이 출몰합니다!]
[새로운 생태계에 위협을 느낀 바다뱀이 씨서팬트로 진화합니다!]
우글거리는 뱀들이 워프핵에서 쏟아지더니 금세 20미터,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뱀들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바다 여기저기로 뱀들이 뻗어 나가고,
[아흐라나 대해의 고대 뱀 아흐라나가 품은 마나를 폭발시킵니다. 워프핵이 공명합니다! 리바이어선으로 진화합니다!]
더 먼 바다, 바다의 중심부쯤 되는 곳에서 빛기둥이 하늘로 솟더니 피막 형태의 날개를 단 푸른 용이 하늘로 떠올랐다.
한때 7개의 구슬을 찾아 구슬의 주인을 불러내면 나타나는 동양의 용과 무척이나 흡사한 모습이었다.
「아흐라나가 지배자를 뵙습니다.」
“지배자?”
꽤 먼 거리임에도 도현을 알아본 아흐라나가 고개를 숙이자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세계가 농장이라서 지배자란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긴 찜찜함이 많았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고대 뱀이라더니 생각을 전달할 줄도 알았다.
할 말만 하고 그대로 바닷속으로 풍덩 자취를 감췄다.
“뭔가 아는 눈친데.”
당장에라도 달려가 다 불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남은 워프핵을 처리해야 하고, 집으로 돌아가 제브라드도 손봐야 했다.
“뭐, 기다린다 했으니까.”
좀 이따가 보자고.
다음으로 움직인 곳은 육지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살짝 치우처진 땅이었다.
몇십 킬로미터라는 거리가 있지만, 높은 산맥 때문에 덥기만 하고 비가 잘 내리지 않아 생물들을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대지.
그 면적이 생각보다 넓은 것도 의외고, 부분적으로 사막화가 진행되는 곳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죽음의 땅이 ‘칼바람이 머무는 절벽’의 워프핵을 흡수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 칼바람의 대왕 독수리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칼바람의 대왕 독수리가 그리폰으로 진화합니다!]
[칼바람의 대왕 독수리 사체를 삼킨 죽음의 땅 몬스터들이 성장합니다!]
[죽음의 땅에 웜과 바실리스크가 나타납니다!]
[죽음의 땅 일부가 죽음의 사막으로 변경됩니다!]
비슷한 지형에 사는 몬스터를 선택한 건데, 이번만큼은 의외였다.
워프 몬스터가 적응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니.
대신에 다른 형태의 서식지가 형성되긴 했지만, 자연이나 몬스터나 사람이나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건 똑같았다.
도현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북쪽 끝, 높은 산맥의 반대편이었다.
북쪽이다 보니 해가 짧다. 당연한 말이지만 춥기도 엄청 추운 곳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숨만 쉬어도 폐가 얼 정도.
산이 아니라 얼음 덩어리가 아닐까 싶은 산의 뒷면, 단 한 번도 해가 들지 않는 곳으로 늘 어둠이 내린 곳.
지명으로는 그림자 산맥이라는 이곳에 마지막 워프핵을 떨어뜨렸다.
[그림자 산맥이 ‘처절한 비명의 숲’의 워프핵을 흡수합니다!]
[그림자 산맥의 힘으로 비명이 실체를 가집니다!]
[그림자 산맥에 레이스와 고스트, 언데드가 출몰합니다!]
[그림자 산맥에 어둠의 기운이 강해집니다.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뭔가… 이번 테스트는 잘못된 느낌이다.
“인어들이 여기까지 오진 않을 거고. 괜찮겠지.”
휘르카 정도면 잠깐 들를 수도 있으니 이야기는 해 둬야겠다.
빠르게 처리한다고 서둘렀음에도 3시간이 흘러 버렸다.
“돌아가서 빨리 시작해야지.”
목소리가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
“시작해 볼까.”
도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에 팻말을 걸었다.
나오기 전까지 절대 방해 금지.
지구와 제브라드의 흐름이 100배나 차이 나니 실제로 몇 시간 걸리지 않겠지만, 그래서 더 방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익숙하게 커넥트창을 켠 도현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워프파크에 갔을 때 확인한 뒤로 30시간 정도 지난 상태였다.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5월-
[노아국 전쟁 선포에 여황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가 강력하게 반응하며 병력을 징집합니다.]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6월-
[아도노스제국 10만 대군이 노아국에 쳐들어갑니다!]
[아도노스제국 병력이 3만 감소합니다!]
[아도노스제국의 대군이 노아국 절반을 점령합니다!]
[아도노스제국의 병력이 2만 감소합니다!]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7월-
[페드릭이 나눔밥집 2호점을 오픈합니다!]
[노아국, 노아국왕이 패배를 선언합니다!]
[노아국 왕가와 귀족 모두 작위를 박탈당합니다!]
[아도노스제국이 노아국을 무너뜨리며 승전하였습니다!]
[200년 만의 위대한 업적!]
[아도노스제국의 명성이 제브라드 곳곳에 퍼집니다!]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8월-
[하이든 메르토아스가 하이엘프 아나헤타와 반려의 서약을 맺습니다!(후원하기/댓글 달기)]
[하이든 메르토아스가 엘프의 왕국 아제알라로 신혼여행을 떠납니다!(후원하기/댓글 달기)]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9월-
[에놀드 아드노타가 제브라드 신교 정찰에 나섭니다.]
[그라드(반마족)가 마계의 땅 절반을 지배합니다!(후원하기/댓글 달기)]
[그라드(반마족)가 마계 최후의 마신들에게 인정받아 ‘휘고아타(절대자)’ 성을 받습니다.]
[그라드 휘고아타가 반마족 최초로 마계 서열 1위에 오릅니다!(후원하기/댓글 달기)]
…….
[에스틴 바르제뷔트(마족)가 마계 서열 3위에 오릅니다!(후원하기/댓글 달기)]
…….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10월-
[헤나지그 카 오르센이 여황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의 명령으로 왕국에 지구-한국의 주거 형태로 대대적인 주거지 개편을 시행합니다!]
[페드릭이 나눔밥집 3호점을 오픈합니다!]
-아도노스 제국력 457년 10월-
[아도노스제국의 귀족들이 노아국(식민지)의 노아(노아국왕)를 첩으로 들일 것을 상소합니다.]
[귀족들의 상소에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가 앓아눕습니다.]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일이 많아?”
한참 전쟁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도현은 헤미오르의 기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10만이라니. 진짜 빡쳤나 보네.”
그저께, 노아에 대한 정보를 얻느라 그라드가 좀 다쳤다고 하더니 제대로 밀어 버렸다.
“마계 시간이 중간계와 10배 차이던가? 그래도 생각 이상인데?”
적어도 제브라드 시간으로 100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었던 장악이 반년 만에 끝날 줄은 몰랐다.
중간계 시간으로 반년이지만 실제 마계 시간으로는 5년쯤?
“내가 이틀 만에 끝냈었지?”
마계가 온전할 때였다. 그것도 정보를 얻기 위해 손수 쥐어 패고 다녔으니 시간이 걸린 거지, 닥치고 부쉈다면 몇 시간 만에 끝내 버렸을 거다.
“그건 그렇고, 헤미오르의 결혼 이야기라…….”
결국 ‘앓아누웠다.’라는 메시지에 혀를 차며 자세한 이야기를 보기 위해 메신저 창을 켰다.
몇몇을 빼고는 리스트 전부가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가장 최근 메시지일수록 상단에 올라가는데, 순서대로 보자면 헤미오르와 페드릭, 그라드, 헤나지그순이었다.
가장 먼저 헤미오르의 메시지를 열어 봤다.
[백부님, 귀족들이 미쳤어요! 저 보고 뭐라는 줄 아세요? 노아왕을 첩으로 들이래요!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한테 무슨 개소… 으흠! 망발이라죠! 전부 다 갈아엎어 버리고 싶네요! 하, 열 받아!]
도현은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키득 웃곤 페드릭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도현 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중간계에서 구할 수 있는 차원 이동 서적은 박박 긁어 갖다 드렸습니다만… 실패하셨는지, 스승… 이오르 님께서 마계까지 들르시겠답니다. 스승이 가는데 제자는 당연히 가야 된다며……. 막 3호점까지 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마계에?
“생각하는 거나 움직이는 거나 어떻게 나랑 그렇게 같을 수가 있어?”
이전 메시지들을 보니 분점을 낸 것도 전부 차원 이동 서적을 찾다가 뜻이 맞아 거둔 이들의 살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아직은 미숙하니 최소한 1년은 봐줘야 한다는데, 차원 이동 실패로 더 달아오른 이오르에게 들릴 리 없고.
페드릭은 매일같이 지옥 풀코스를 경험하고 있겠지.
“마계라…….”
마침 마계도 안정되었으니 그라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차원 이동 서적 때문에 이오르가 간다는데, 페드릭 대신 잠깐만 전담 좀 해.]
메시지가 보내지기 무섭게 답이 왔다.
[살려주세요…….]
그 한마디가 너무 애처로웠다.
“그러고 보니 전부 강해진 이유도 이오르 때문이었지.”
강해진 건지 살아남은 건지 모르겠지만.
한참 고민하던 도현은 인벤토리를 훑었다.
“몬스터 요리를 알려 주는 것도 괜찮겠어.”
이오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상태였다면 지구의 신 놈들의 깽판도 주절주절 떠들었을 텐데.
“아, 그래. 제브라드.”
중간계의 관리자라는 드래곤.
그런 이름이 붙은 만큼 신과 연관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러니 잠수 탄 제브라드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을지도.
“찔러는 봐야지.”
전해져서 깽판 칠 때 얼굴을 들이밀면 더 좋고.
도현은 몬스터 재료를 선별해 만든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이오르만 알아볼 수 있도록 한글로 짧게 메모했다.
[차원 이동은 신만 가능해.]
주머니를 묶어 페드릭 편으로 보냈다.
“이제 깽판을 쳐 볼까.”
도현은 착실히 올라가는 메시지들을 보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