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42. Peak Time (2)
도현은 토토가 내민 그릇을 한참 뜯어보았다.
익숙한 외형이었다.
뚝배기.
크기는 대형 냄비만 했지만.
토토의 선물-뚝배기(무기/유니크)
하리오카 나무의 껍질을 초고온에 제련하여 만든 뚝배기.
불에 잘 타지 않는 특성과 하리오카 껍질의 단단함, 초고온으로 담금질한 결과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해졌다.
각성 후 처음으로 제작한 아이템으로, 불카누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공격력 1,000
힘 +20
집중력 +10
불카누스의 축복: 스킬-찰진 손맛
찰진 손맛: 크리티컬 20%
‘토토야, 뭘 만든 거니?’
도현은 이 뚝배기를 보자 그릇이 왜 무기가 됐는지 이해됐다.
하이든이 왔을 때 귀족의 머리를 깼던 게 뚝배기.
그 결과였다.
이름 모를 귀족이 썼던 마법이나 하이든의 검보단, 주인이자 부모인 자신이 들고 싸웠던 ‘무기’가 더 뇌리에 남았나 보다.
그리고 새로운 메시지창이 도현 앞에 떴다.
[토토의 공방이 생성되었습니다!]
[재료만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습니다.]
[농장 발전이 시작됩니다!]
[이웃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0/3)]
이건 또 뭐야?
도현은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창을 떨떠름하게 보다 꺼 버렸다.
우선은 자신을 올망똘망하게 보는 토토를 칭찬해 줘야 해서다.
“……그래, 잘했다.”
토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헤, 하는 웃음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풀어져 같이 웃었다.
몸집이 커질 때야 이렇게 해 주지 못하겠지만, 작을 때는 귀여우니까.
토토표 그릇을 가져와 하리오카 열매와 스네일을 담던 모르달이 말했다.
“아, 도련님. 아침에 마님께서 전화하셨슴다요. 일어나시면 연락 달라 하셨슴다요.”
역시 안 왔을 리가 없지.
그래도 자신의 잠을 깨운 게 아니라 모르달이 받았다니, 뭔가 전담 비서가 생긴 느낌이다.
비록 이놈이 제브라드의 감시자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오늘만큼은 흡족하다.
‘크, 이런 거 너무 좋은데.’
집안일에, 밥에, 비서까지.
만능이라더니.
“딱히 몇 시까지 오란 말은 없었어?”
“옙, 전화만 달라셨슴다요.”
그럼, 아침 겸 점심을 좀 더 즐기고 볼까.
후룩, 후룩, 후루룩.
느긋한 아침. 그것도 주말이 아닌 평일 아침을 이렇게 즐겨 보긴 너무 오랜만이었다.
***
또각, 또각, 또각.
구두 굽이 경쾌한 소리를 낼 때마다 굵게 웨이브 진 금발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진한 회색의 원피스 정장, 타이트한 만큼 그녀의 굴곡진 몸매는 스쳐 가는 남자의 마음을 헝클어뜨리기 충분했다.
한국 헌터 협회 27층.
금발의 그녀, 아바는 양팔 가득 서류를 들고 워프 처리 사무실에 들어왔다.
“김 대리님, 이 서류들은 어디에 둘까요?”
고운 목소리에 유창한 영어가 입혀졌다.
“아. 아바 씨, 그건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다른 일은 아직 없으니 쉬세요.”
김용식 대리는 내려오지도 않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칭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저 꿀직장이란 말에 헌사과를 나왔고 운 좋게 한국 헌터 협회에서 사무직으로 근무 중이지만, 최근 며칠만큼 보람찬 날도 없었을 거다.
외국 간의 헌터 교류.
표면적으로는 친교를 위한 활동.
하지만 그들이 합법적 스파이라는 건 그 누구라도 알 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파견된 헌터들 대부분은 잡일을 하거나, 형식적인 워프 조사를 한 뒤 자율식 체험이라는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는 식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주, 죽인다…….’
김 대리는 자리로 돌아가는 아바의 뒷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미인이 자신의 사무 보조라니. 꽃이 활짝 핀 것만 같은 모습에 그녀가 헌터라는 걸 또 잊어버린다.
손만 뻗으면 만져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서라, 아서. 차라리 마누라 궁둥이를 두드리는 게 낫지.’
먹어서 탈 날 것보단 맛이 덜해도 안전한 게 낫다.
그런 망상을 하며 입을 쩝 다시던 김 대리는 뒤에서 누가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툭!
“뭐 하냐, 김 대리?”
“헉!”
어깨를 잡는 손에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났던 그는, 익숙한 얼굴에 다리가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박새… 박 대리.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같은 부서의 박진구 대리였다.
워프에 관한 사건이나 사고를 이리저리 퍼트리고 다니는 꼴을 박 씨를 물고 온 제비처럼 보인다 해서 박제비라 불렀지만, 입이 방정이라고 안 좋은 이야기가 더 많다 보니 박새끼로 비하된 무능한 대리였다.
그래도 모두가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꽤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김 대리, 들었냐?”
“또 뭐?”
“어제 워프 하나 파괴됐다더라.”
워프가 파괴돼?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심각한 소식에 김 대리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귀를 안 기울일 수 없었다.
“그, 달팽이만 가득한 워프 있잖아.”
거기까지 들은 김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기 드문 몬스터 워프 중에서도 희한하게 생산 워프급으로 관리하는 스네일의 안식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는 스네일이 공격성보다는 미용이나 식용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인데, 위험도가 무척 낮은 것도 한몫했다.
“야, 거기 파괴되면 어떡하냐? 우리 마누라 맨날 스네일크림 노래를 불러 대는데…….”
블랙홀에서 단독, 독점 판매인 화장품이 먼저 생각난 김 대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매일 이어지는 스네일크림 찬양에 월급의 1/10이 빠져나가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찬양을 들어주는 이유는 마누라의 얼굴이 탱탱해지는 게 눈에 보여서다.
“하… 나도 펑펑 우는 여친 때문에 죽을 맛이다. 근데 거기가 올해 2주기에 히든 워프였다더라. 스네일이 사라지고 완전 벌레 천국이 됐다던데?”
바퀴벌레, 거미, 썩은 나무만 가득했다는 말이 이어지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소름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기 바빴다.
“근데, 거기 누가 밝혔냐? 히든 워프라면 솔직히 같은 등급에서도 최상급이잖아?”
“내 말이, 밝혀지진 않았는데 대박인 건 혼자 갔단다.”
“혼자? 박 대리, 말이 되는 소릴 해. 최소 3명은 돼야 허가 나잖아!”
“아니, 진짜. 혼자 들어가서 워프 깨고 온 거래.”
김 대리는 눈을 껌뻑였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무슨 차도식 헌터가 들어간 줄 알겠…….
“……!”
소름이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때렸다.
“야, 김 대리. 너 왜 그래?”
“박새끼… 호, 혹시 그 헌터 최근 나왔다는 3급 헌터 아니야?”
순간 사무실이 적막해졌다.
어차피 두 사람만 있는 사무실. 적막한 건 같았지만 사무실에 내려앉은 오싹한 기운에 소름 돋을 정도였다.
몇 초간 이어진 적막감은 박 대리의 웃음에 사라지고 말았다.
“풉, 푸하하하!”
“왜, 왜 웃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김 대리. 애초 그런 헌터가 뭐 한다고 6등급 워프에 가냐? 그리고 6등급 히든이라고 해 봤자 신입 헌터들 뺑이치는 곳이잖아?”
“그야…….”
김 대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해 보니 헌터들은 5등급부터 가능했고, 문제가 생긴 워프는 6등급이다.
‘하, 어젯밤에 괜히 영화를 봐서…….’
마누라 자는 틈을 타 본 추리 스릴러의 영향이 커서 그런지도.
‘그런데 어떻게 혼자 가?’
그런 의문이 들었을 즈음, 박 대리가 의문을 풀어 줬다.
“그 헌터, 테이머래.”
테이머?
“아…….”
그제야 사실을 알아차렸다.
테이머라면 테이밍한 몬스터 두 마리만 있어도 출입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흔한 직업은 아니다. 그렇다고 대우를 받는다기엔 애매한 직업.
‘그래 봤자 6등급 워프잖아?’
2주기로 4등급이 되었다는 소문도 박 대리가 하는 말이니 다 거짓말로 들렸다.
김빠진 김 대리는 박 대리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가라 가. 나 할 일 많다.”
“왜 이래? 무능한 김 대리. 무대리끼리 뭉쳐야 하는 거 아니냐?”
“닥치고 가라. 오늘 마누라 생일이다. 칼퇴 해야 돼.”
“어이쿠, 수고하쇼.”
조용히 왔던 것처럼 박 대리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지라시에 가까운 소문을 털어 버린 김 대리는 서둘러 일에 집중했다.
타닥, 타닥, 촤라락!
타자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의 반대편 끝자리에서 아바가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수고했어, 아들.”
임혜정은 도현이 건넨 백팩을 받았다.
“엄마, 소식 들었지?”
“워프?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걱정이야. 이 양으로는 많이 버텨 봤자 1년이라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면 한 달도 안 되어 소진될 양이기도 했다.
도현은 어제 주 팀장에게 백팩을 떠맡길 생각이었다.
이것저것 찔리는 게 많아서.
헌터캠은 도현의 걱정과 달리 영상 상태가 고르지 못했다. 특히, 도현이 농장을 오갈 때는 노이즈 현상으로 끊겼고, 워프가 변했을 때는 끊긴 탓인지 소리는 사라지고 영상에도 노이즈가 심각하게 껴 버렸다.
헌터캠을 확인한 강혁 삼촌은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못 했고, 토토를 2주기로 4등급이 된 워프의 보스 몬스터로. 몬스터들끼리 싸우다 자폭하여 워프가 파괴된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진실은 그렇게 묻혔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건 혼자 헌팅을 했다는 것.
뭐 알려져도 상관은 없지만 그게 엄마라서 문제다.
‘괜히 둘러댔나.’
거짓말은 거짓말을 키운다는 말이 있듯이 도현은 이 자리가 불편했다.
딱히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두 놈을 안 데려오길 잘했지.’
토토와 모르달이 득달같이 달라붙었지만 이번만큼은 집에 처박아 두고 나왔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모르달과 이제 말문이 트인 토토가 무슨 말을 해 댈지 예상이 안 돼서다.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가자.’
결정을 내린 도현이 벌떡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벌써 가려고? 조금 이따 저녁 먹고 가.”
“……3시간이나 남았는데?”
엄마의 퇴근 시간은 5시.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있지만 가고 싶다는 말을 둘러 표현했다.
“뭐 많이 남지도 않았는걸? 그보다 아들, 헌팅 이야기 좀 해 봐. 궁금해.”
엄마의 초롱초롱한 눈이 도현에게 박혔다. 뜨거운 시선에 도현은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거짓말을 부풀리느냐, 이실직고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그때 풉 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어깨가 들썩였다.
“우리 아들, 진짜 변한 게 없네.”
웃음을 겨우 멈추고서 나온 말에 도현은 더 의아했다.
임혜정은 맹한 얼굴을 한 도현의 볼 한쪽을 잡고 쭉 늘렸다.
진지하게 뭐라 하려고 해도 이럴 때 보면 남편과 정말 판박이라 스르륵 녹아 버린다.
자신과 남편을 닮은 듯 안 닮은 아들. 키도 피부도 성격도 돌아왔을 때만 해도 기억 속 아들과 같았지만 언뜻언뜻 흘러나오는 살기와 가라앉은 분위기에 깜짝깜짝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5년 만에 봐서 그런 걸까, 성격이 너무 무뚝뚝해져서 그런 걸까.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 끝엔 뚱한 얼굴의 도현이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볼을 잡았던 손을 놓고 소파에 앉았다.
“엄마가 모를 줄 알았어? 이래 봬도 꽤 유능한 직원이 있다구.”
“설마……?”
“네 아빠. 얼마나 유능한데.”
도현은 낮게 ‘젠장.’이라 중얼거리며 소파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