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 Peak Time (1)
도현은 그 뒤로 별말 없이 채근석을 보냈다.
산 아래 넓은 공터에는 오늘 아침 겨우 복귀한 주 팀장이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도현은 토토와 모르달을 위해 하리오카 열매와 스네일을 테이블에 펼치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아, 녹는다 녹아.’
모든 걱정을 다 잊을 만큼 꿀맛 같은 편안함에 이대로 한숨 자고 싶어졌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주 팀장이 슬쩍 운을 뗐다.
“도련님, 채근석 헌터와 안면이 있으셨습니까?”
“예, 학생 때 꽤 친했죠.”
말 끝나기 무섭게 주 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웬만해선 만나지 마십시오. 위험한 헌터입니다.”
도현은 감은 눈을 떠 주 팀장을 봤다. 꽤 진지한 모습이 그냥 하는 말 같지 않다.
“채근석 헌터는 블랙홀이 첫 매니지먼트를 시작했을 때 스타트 멤버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반년 만에 계약 해지했습니다.”
‘계약 해지?’
흥미가 생겼다.
“누군가의 능력을 훔치는 스킬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주 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5년 전 헌터가 생기고 워프에 대한 체계가 잡혀 갈 때쯤.
헌팅과 워프 정보 수집으로 많은 헌터들이 하루가 멀다고 일에 치일 시기의 이야기였다.
헌터에게 매니저가 붙는 첫 시스템이 시작한 때.
그때는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연예 엔터의 매니저처럼 헌터 매니저는 몬스터 사냥 외의 모든 걸 지원해야 했다. 때문에 매니저는 헌터보다 잠잘 시간도 못 가질 만큼 바빴고, 위험한 직업이었다.
“채근석을 맡았던 매니저는 총 셋입니다. 한 명은 살았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시작은 사고였다.
채근석이 입사하고 그를 맡은 첫 매니저.
업무가 많다 보니 잘 시간은 부족했고 피로는 계속 쌓여 갔다. 그 상태로 워프에 들어갔다가 눈먼 몬스터에게 즉사를 당했단다.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번째 매니저는 헌터가 될 수 있었지만, 매니저 일이 좋아 시작한 사람이었다.
체력도 좋고 능력도 좋아 꽤 일을 잘 쳐 냈다.
그렇게 석 달쯤 되었을 때 갑자기 능력이 사라졌다. 일반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사람은 일반인 때의 지병이 다시 도져 결국 매니저를 그만두었다.
“마지막 매니저, 김지수 씨는 3개월간 채근석 헌터를 맡았습니다. 늘 그렇듯 시기가 좋지 않아 많은 업무에 시달렸죠.”
그 세 번째 매니저가 채근석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가, 주 팀장이 블랙홀에 입사했던 시기였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던 저와 안면 있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그러더군요. 가끔 능력을 쓸 수 없다고요.”
불안해하던 김지수 매니저는 먼저 사고를 당했던 매니저처럼 워프에서 목숨을 잃었다. 몬스터가 아닌 눈먼 함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 번이나 매니저를 갈아 치운 채근석은 마침 특수한 스킬을 가진 범죄 각성자들 때문에 사건이 재조명되고 불미한 사건으로 블랙홀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끊어 버렸다.
“아직도 그가 어떤 헌터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헌팅이 안정화되었다지만 매해 사고로 죽어 나가는 헌터는 적지 않았다.
그 속에 채근석에게 당하는 헌터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매해 헌터 외 매니저의 사고는 꾸준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강해지는 그를 보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웬만해서 마주치지 않을게요.”
“예, 최소한 두 분만 만나는 일은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제야 얼굴이 펴진 주 팀장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이어진 건 워프에 관해서였다.
헌팅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 그리고 헌팅 중간에 찾아온 2주기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도현은 헌팅에 농장까지 얹어 모두 이야기했다. 헌터캠 때문이었다.
주 팀장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도련님은 헌터캠으로 생길 소란이 없었으면 하시는 거군요?”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도현 님의 모든 정보는 특급이기 때문에 그 부분도 전부 조치가 들어갑니다.”
도현은 흡족한 웃음을 입에 걸치며 한숨 잘 준비를 했다. 주 팀장의 뒷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특히, 도련님의 모든 정보는 협회장님께서 특급 관리하시기 때문에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삼촌이요?”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와락 구겨진 도현을 보고 의아해하던 주 팀장은 차에 타기 전부터 묻고 싶었던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도련님, 저 몬스터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하리오카 과수원 워프의 그 원숭이 아닙니까?’라고 덧붙이는 말에 펫을 소개해 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현은 간이 테이블에 쌓인 하리오카 열매와 작은 스네일을 열심히 먹어 치우는 두 펫을 소개했다.
“하얀 가래떡은 모르달, 붉은 원숭이는 토톱니다. 테이밍한 몬스터고요.”
얌전히 있던 모르달이 발끈했다.
“도련님, 가래떡이라뇨! 말씀이 너무 심하심다요! 흠흠, 안녕하심까요, 소인, 거대 흰족제비족 모르달이라고 함다요. 부족하게나마 도련님을 모시고 있슴다요.”
“토토! 인간, 밧써! 앗녕하싱까요?!”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르달과 그런 모르달을 따라 하는 토토의 모습은 퍽 귀여웠다.
둘을 번갈아 보던 주 팀장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 몬스터가 말을…….”
도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스네일 하나를 집어 주 팀장의 입에 밀어 넣었다.
선명한 초록색. 와사비 맛이었다.
***
다음 날.
“으드드드드!”
저절로 눈이 뜨인 도현은 오랜만의 숙면으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깨우는 전화도, 밥 달라는 토토도, 시도 때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 대던 방문자도 없으니 이곳이 천국…….
‘방문자?’
“그러고 보니 올 때가 됐는데……?”
저번 주 초반에 방문자가 몰아치고 시간에 쫓겨 살다 보니 방문자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설마 또 뭉텅이로 오는 건 아니겠지……?”
아직 4일이나 남았는데.
오늘까지 치면 5일이나 남았다.
“두 명씩, 세 명씩 온다고 쳐도 하루, 이틀은 여유 있어.”
계산하고 나니 불안했던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초긍정 모드가 된 도현은 오랜만에 좋은 아침을 맞이한 탓이라 생각했다.
“어? 도련님, 일어나셨슴까요?”
“압빠!”
거실로 나오니 소파에 늘어져 TV 시청 중인 모르달과 토토가 보였다.
‘11시? 이 시간이면 전화 한 통 안 올 리가 없는데?’
오전 11시. 학교야 어찌 됐든 정리가 끝났지만, 아침마다 알림처럼 울리는 전화가 조용하자 괜히 찜찜했다.
“식사하시겠슴까요? 토토 님과 소인은 좀 전에 먹었슴다요.”
이어서 ‘잔치국수를 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힘니다요!’라는 모르달의 말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국수. 단어만 들어도 긴 면발처럼 마음이 넉넉해지는 마법.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에 고명 몇 가지만 올리고 양념장까지 끼얹으면 그만한 음식이 따로 없다.
꼴깍.
생각만으로 이미 몇 그릇은 해치운 느낌.
식탁 앞에 앉자 모르달이 금방 국수를 말아서 가져왔다.
꼬리로 바닥을 딛고 도현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며칠이나 됐다고 이 모습이 익숙하다.
‘그런데, 못 보던 그릇인데?’
냉면 그릇의 두 배, 세수해도 될 것 같은 작은 대야 크기였다.
“토토 님이 만드셨슴다요.”
“만들어?”
그제야 어제 워프에서 토토가 각성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했던가?’
바쁜 하루를 보냈던 어제, 워프에 관련된 일은 주 팀장에게 일임하고 남은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보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잊어 먹은 것인데…….
“그냥 이 그릇을 만들었다고?”
일반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집. 그런 이곳에서 그릇을 만든다면 불, 화로가 필수다.
모르달이 이해되지 않는 투로 말했다.
“그냥 잠깐 사라지시더니 이 그릇을 들고 오셨슴다요.”
황당한 시선이 토토에게 머물자 토토는 폴짝 식탁에 뛰어올라 가슴을 내밀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압빠, 토토, 부, 자래!”
그러면서 양손을 허공에 뻗었다. 손에서 뿜어져 나온 작은 푸른 불꽃이 조용히 타올랐다.
불카누스의 화신이란 게 이런 의미였나?
대단한 능력이다.
이해한 도현은 그릇의 설명창을 확인했다.
토토의 면기(무기/레어)
면 요리를 담아 먹는 그릇.
하리오카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스네일의 껍질을 이용해 그릇 표면을 꾸몄다.
보온과 보냉의 효과로 온도의 맛을 오래 즐길 수 있다.
공격력 342
‘하리오카 나무? 스네일 껍질? 거기다 공격력?’
고급스러운 외형에 감탄이 먼저 나왔지만, 의문이 줄을 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재료를 구한 것인지, 거기에 그릇에 무슨 공격력이 붙은 건지.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토토가 폴짝 뛰었다.
“토토, 토토, 농쟝! 가!”
아……?
확인시켜 주듯 토토의 몸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다시 나타났다.
토토는 양손으로 하리오카 열매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데려가지 않아도 농장에 오갈 수 있다는 건데?’
토토는 가능하다지만 모르달은……?
도현은 모르달을 쳐다봤다. 그 순간 토토가 모르달의 손을 잡고 당김과 동시에 사라졌다.
“둘 다 갈 수 있구나.”
새로운 발견임과 동시에 하리오카 열매와 스네일 노래를 더는 안 들어도 된다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럼 먹어 볼까.”
도현은 젓가락을 들고 커다란 그릇 안의 국수를 지그시 바라봤다.
계란 지단과 어묵 지단, 데친 부추까지.
“아니, 살짝 느껴지는 마나로 봐서 부추와 똑같았던 키오르풀인가?”
마나를 빼더라도 진한 부추 향과 아삭한 식감이 일반 부추보다 더 좋았다.
아무튼, 이어서.
기름에 달달 볶은 양파 채도, 송송 썬 묵은 김치도 이미 어느 음식 부럽지 않은 잔치국수의 표본 그대로였다.
군침을 삼킨 도현은 간장, 대파,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으로 만든 양념장을 숟가락 가득 떠 국수 위에 끼얹었다.
젓가락을 들어 잘 섞이도록 저어 준 뒤 후루룩 한입 가득 물고 씹는다.
탱글탱글한 국수 면발에서 진한 멸치 육수 맛이 느껴진다 싶더니 면 사이로 고명들이 머리를 들이민다.
고소한 계란 지단과 말캉말캉한 어묵, 아삭아삭한 키오르풀 뒤로 볶은 양파의 기름진 맛 안에 살캉거리는 단맛이 새콤한 김치와 함께 감칠맛을 더해 준다.
오직 국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오케스트라.
꿀꺽.
국물에 대한 여운 밀려오자 곧바로 양손으로 그릇을 쥐고 기울였다.
후루루륵!
뜨끈한 육수에 고명과 양념장의 건더기가 입 안에 안착했다.
잘게 썬 대파가 아삭아삭 씹히며 간장의 짜고 진한 맛이 이어진다.
그 끝에는 고춧가루의 칼칼한 맛이 멸치 육수의 뒷맛을 깔끔하게 만들었다.
면 없이 즐기는 고명과 양념장의 맛 또한 좋았다.
특히 살캉살캉하게 씹히며 단맛을 내는 볶은 양파가 짭조름한 양념장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캬아, 죽인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음미하는 도현 곁으로 토토와 모르달이 나타났다.
하리오카 열매와 스네일을 한 아름 안고서 말이다.
“압빠, 마싯지? 모루달 냠냠 자래! 토토 그릇! 첫? 처움? 만드럿써! 토토 자랫써?”
무슨 말인가 하니 제 몸만 한 검은 그릇을 자신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