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28. 뚝배기 (3)
심지어 하이든은 이 사람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계속 하이든을 지켜보던 도현은 그가 너무 심각해지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찼던 불행의 수행기사. 미친듯한 노력으로 결국 황실기사단 플래티넘단의 단장 자리까지 올라갔던 베로탄.
그놈과 왜 이리 닮았는지.
도현은 하이든을 보며 귀족 때문에 생겼던 화와 짜증이, 어느새 희석되어 정겨움만 남았다.
괜히 놀려 먹고 싶어졌다.
“주인이 저 꼴이 났는데도 별말 없네?”
하이든은 가슴이 뜨끔했다.
“저 귀족 취미가 이종족 수집인가 보지?”
“…그중 하나입니다.”
하이든은 순수하게 밝혔다. 여태껏 쌓인 반감이기도 했고, 거짓말을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아니라 해도 들통나겠지.’
그게 솔직한 이유이기도 했다.
“벌써 반기를 들었어도 들었을 것 같은데, 능력 부족?”
도현의 말이 칼이 되어 심장을 푹 찔렀다.
하이든은 심장을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과 누군가 그것을 꼬집는 건 차원이 다른 아픔이었다.
하이든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유는 많았다. 백작이라지만 다 같은 백작이 아니다. 왕조차도 한 수 물리는 백작. 실제로 오르조는 영지 내에서는 왕보다 더 후한 대접을 받았다.
겉으론 한없이 자애롭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성인군자.
자신을 수행기사로 발탁한 이유도 곧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드마스터가 비호한다는 그 말 더해진다면 어쩌면 백작은 왕의 자리까지 탐할지도 모를 인간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해진 모습에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하여간 머릿속에 근육으로 찬 것들은 칼밖에 모른다니까. 넌 저놈을 보면서 느낀 게 없냐?”
“예…?”
“쟤 언론플… 아니, 겉모습이 속과 같을 리가 없었겠지? 너도 그런 걸 해볼 생각을 안 했냐고.”
‘아…….’
“쯧, 보나 마나 마스터가 되면 장땡이라 생각했네.”
하이든은 얼굴을 붉혔다. 이대로 아무 말 못 하는 자신이 더 싫어 막힌 목구멍을 억지로 쥐어짰다.
“그…렇지만, 마스터가 되면 해결될 일이 맞습니다!”
“그러고 저놈한테 뒤지겠지.”
“…….”
“그래서 무리를 만들라는 거잖아. 어중이떠중이라도 몸집이 커지면 쉽게 손 못 댈 테니까.”
하이든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 맞는 말이다. 반박조차 못 할 정도로.
머릿속에 다시 한번 오르조의 아티팩트 힘을 없앴던 짧은 막대기가 떠올랐다.
그저 던지는 행동뿐이었지만, 거기에는 검의 묘리가 녹아 있었다.
‘검을 익히신 게 틀림없어!’
제브라드에 전설로만 내려오는 경지가 있었다.
소드마스터를 넘어 검의 신이라 불리는 경지인 그랜드 마스터.
손가락 하나로 산을 가르고 검을 들면 나라 하나를 지워버린다는 꿈같은 경지였다.
그 경지에 들었던 이는 페론드 카 노르세아스의 친우이자, 황제의 검인 트론과 악의 일대기의 주인공인 우도현 밖에 없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뜬 하이든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도현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부탁드립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앉아.”
“……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붉게 물든 하이든은 침울했다. 자신이 주제넘었음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도현은 방문 위로 카운트되는 시간을 확인한 후 물었다.
“밥 먹을래?”
“예, 옛! 먹겠습니다!”
“끼낏! 끼낏!”
조용히 둘을 구경하던 토토의 눈이 번쩍했다.
도현은 토토의 그릇을 슬쩍 살폈다. 좀 전의 소동으로 불은 라면이 그대로다.
‘이 녀석도 불면 안 먹나?’
누굴 닮아서 이런 걸까― 하는, 언젠가 들었던 엄마의 잔소리라는 걸 깨닫고 킥킥댔다.
“낏?”
갸우뚱 기우는 토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은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싱크대 상부장을 열었다. 혹시나 몰라 넉넉히 사온 탓에 상부장 한 칸이 뚝배기로 가득했다.
뚝배기 세 개를 꺼냈다.
가스불을 올리고 아침에 장을 보면서 샀던 대용량 계량컵으로 물을 맞췄다.
도현은 봉지 라면을 꺼내들다 하이든에게 물었다.
“매운 건 먹어?”
“예, 예! 먹습니다!”
바짝 긴장한 목소리에 픽 웃음이 났다.
제브라드에도 매운맛을 즐기는 나라가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턱없이 순한 수준이다.
그에 비해 자신이 사온 라면은 마니아들만 찾는 강도 높은 매운맛이다.
결국 도현은 매운 라면 하나와 안 매운 라면 두 개를 꺼냈다.
냉장고에서 달걀 3개와 슬라이드 치즈 3장을 꺼내고 어슷하게 썰어 얼려둔 대파도 꺼냈다.
보글보글 물이 끓자 스프와 라면을 넣어 한 번 저어준다.
도현 자신의 뚝배기는 면을 넣자마자 가스 불을 꺼버렸다. 취향이 꼬들꼬들한 면이다.
라면이 풀어지면 뚝배기 중앙에 달걀을 깨서 넣고 주변으로 대파를 뿌린다. 그사이 살짝 익은 달걀을 국물 속에 밀어 넣으며 젓가락으로 흩치고 가스 불을 껐다.
마지막으로 치즈를 한 장씩 올려 조리를 끝낸다.
식탁 위에 냄비 받침대를 머릿수대로 올리고 귀찮음에 뚝배기 3개를 허공에 띄워 냄비 받침대 위에 안착시켰다.
필요한 식기를 챙겨 가지런히 놓고 의자에 앉았다.
“먹자.”
도현은 먹기 전에 토토의 몫으로 작은 그릇에 면을 덜어 내주었다.
“끼낏, 끼낏!”
엄청 즐거운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공중제비를 돈다.
처음 끓였던 라면 레시피에 치즈만 추가 한 것이지만, 토토를 보니 벌써 다른 걸 아는 눈치다.
피식 웃은 도현은 후 불어 한 김 식히고 토토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자신의 몫인 라면을 풀었다.
조용한 식탁에 도현은 하이든을 슬쩍 봤다.
포크를 든 채 눈치만 보던 하이든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다.
“뭐야?”
“아, 아닙니다!”
하이든은 다급하게 포크로 면을 건져 입에 넣었다.
뜨끈한 면발에 반사적으로 뱉으려 했지만, 눈앞의 도현 때문에 이를 앙 다물었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면발을 혀로 굴리며 오러로드를 돌렸다.
뜨거움이 따뜻함으로, 적당히 먹기 좋은 온도로 바뀌어갔다.
그 변화보다 다행인 건 입천장이 무사하다는 것이다.
후타가 밀려온 건 이다음이었다.
식은 면발을 한 번 씹었다. 오러로드로 인해 예민해진 감각에 큰 충격이 닿았다.
입안을 타고 콧속까지 고소한 향이 훅 퍼졌다. 인지하기도 전에 턱이 움직이며 면을 씹는다.
탱글탱글한 면이 이 사이에서 부서지며 끈적한 치즈와 어우러져 더 고소한 맛을 냈다.
중간중간에 면발이 한껏 품은 진한 국물 혀를 물들였다.
하이든은 씹는 둥 마는 둥 꿀꺽 삼킨 뒤 식사 중인 도현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음식입니까…?”
“사골곰탕 라면.”
“사골곰탕 라면이요?”
“제브라드에서는 먹기 힘들― 아니지, 지금쯤이면 이오르한테 가면 먹을 수 있으려나?”
하이든은 멍하니 ‘사골곰탕 라면’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뚝배기에 얼굴을 박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피식 웃으며 꼬리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토토에게 다시 면을 덜어주고 젓가락을 놀렸다.
기호에 맞게 꼬들꼬들한 면이 칼칼하면서도 매운맛과 잘 어울렸다.
입안을 얼얼하게 만들며 혀를 괴롭혔지만 그건 그대로 끝이 깔끔하고 시원했다.
귀족 놈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조금 날아간 느낌이었다.
그런데 뭔가 좀 심심하다.
참깨를 잊어서 그런가?
그거야 뭐 빼고 먹을 수도 있는 거고.
“아, 김치.”
엄마한테 등짝 스매시를 맞으며 가져온 김치를 잊고 있었다.
도현은 즉각 일어나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머릿수가 많으니 먹을 만큼 접시에 덜어 식탁 위에 올렸다.
김치 한 점을 면 위에 올리고 적당량의 면을 젓가락을 걸어 쭉 들어 올렸다.
먹방계의 탑이라 할 수 있는 방송인을 따라 면의 끝을 확인하고 면을 물었다.
후루루루루룩.
꼬리가 낭창하게 휘어지며 입속으로 들어간 면이 입안 가득 씹혔다.
김치의 아삭거리는 맛과 한데 어우러져 맵지만 입맛을 당기는 탄탄한 맛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이 맛에 라면을 못 끊는다.
도현은 양손으로 뚝배기를 잡아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매운 입안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머리를 때리는 매운맛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지만, 그 맛이 쾌감으로 변하는 데 1초면 충분했다.
시원함에 머리까지 맑아진 기분이었다.
도현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과 펫 한 마리는 햇볕에 말려지는 건어물처럼 늘어져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각자 옆에 탑처럼 쌓인 뚝배기도 어느덧 익숙한 배경이 되어 버렸다.
“음식에… 홀려서 먹긴 처음입니다.”
만족감에 배를 두드리며 농담처럼 말을 꺼내는 하이든은 처음과 달리 편안해 보였다.
도현은 그 모습이 며칠 전 다녀간 용병 페드릭과 닮아 픽 웃었다.
“노예가 된 이종족들을 구한 다음에 어쩔 건데?”
3그릇째 들이켤 때쯤 여유를 가진 하이든이 주절주절 하소연하듯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들만큼은 구해 주고 싶다고.
3대 넘게 내려온 추잡한 욕망 덩어리가, 세상에 공개되는 것만으로 오르조 백작은 몰락당할 게 분명했다.
그뿐이겠는가.
아도노스 왕가에서도 쉬이 넘어가기 힘든 사건이었다.
그러니 하이든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게 것이다.
‘시기도 적절하고.’
도현은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오르조가 계획한 노르세아스 가문의 몰락은 헤미오르로 인해 틀어졌고, 뒤에서 마탑의 학파 통합을 조장했던 일도 헤나지그로 인해 유명무실해졌단다.
특히 헤나지그가 가로등이란 걸 제작하면서 5서클의 벽을 깨자 단숨에 유명세를 떨치며 실용마법학파는 학파의 정점으로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학파들은 학파 중심의 마탑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오르조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하이든 혼자 오르조의 본색을 터트리기엔 벅차다.
특히.
“정원이 만만하지 않다면서?”
도현이 핵심을 찌르자 하이든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마스터가 된…….”
“장난해?”
“무슨 말씀…….”
“언제부터 기사가 허황된 꿈 얘기를 지껄였지?”
하이든은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도현을 봤다.
“나약한 자신을 감추는 변명이잖아.”
“……!”
도현이 말을 이었다.
“혹시 죽는 게 두려워?”
죽는 게 두려워?
도현의 말이 경종처럼 머리를 때렸다.
그래, 어쩌면……. 아니, 그랬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개죽음이었으니까.
‘오히려 비난하겠지…….’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이종족 노예를 빼돌리려 했던 기사라고.
그게 아니라면 그녀들처럼 오르조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우습다.’
이것밖에 안 되는 자신이.
도망치고 있었던 자신이.
이를 악문 하이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럽다 못해 분노가 치솟았다.
‘기사란 끝없이 정진하는 자세와 자신의 긍지를 잊지 않는 자.’
기사라면 절대 잊어서는 안 되고, 뼛속까지 새겨야 하는 기사도였다.
쉴 새 없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기사도를 되뇌는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다.
느릿하게 감았다 뜬 그의 눈은 깊고 고요했다.
하이든은 진심을 담아 가슴 깊이 맹세했다.
‘도망치지 않겠다. 이 한목숨 바쳐 해내리라.’
그녀들을 구하고, 오르조의 두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하리라!
그조차 불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해 오르조를 처단하리라!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