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27화 (27/200)

# 27

27. 뚝배기 (2)

비밀의 정원. 그 속의 이종족 노예들.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힘을 기르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 노력해왔지만, 1년째 벽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젠장….’

하이든은 또 몰려오는 이종족의 여인들을 보고 입술을 씹었다.

아름다운 외모들 가졌지만 전부 복종의 귀걸이를 한 채 회색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간다는 생각이나 주인의 말을 거부조차 할 수 없는 인형들….

그나마 오르조와 함께 들어간 하이엘프만이 이성을 감추고 있었다.

달칵.

길고 긴 시간 끝에 문이 열리고 오르조와 하이엘프가 나왔다.

오르조는 집무실에서 보고 받았을 때와 정반대되는 얼굴은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서글서글했다.

그러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 하이든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돌아가지.”

“예.”

이제 여기서 나가면 수행기사의 일과는 끝이 난다.

그리고 늘 그랬듯 연무장을 찾아 무능력한 자신을 더 몰아붙일 테지.

‘벽만 깨면….’

처음에는 벽을 깨는 것만으로 이곳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 전의 새로운 사실을 접하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마탑 개혁이라는, 모든 학파를 한 학파로 통합하는 큰 사건.

거기에 일조를 한 사람이 오르조 백작이었다.

거기까지 알게 되자, 하이든은 그저 거센 산불 앞의 횃불조차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이들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꼭 오르조의 수족 하나는 갖고 제브라드의 심판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 다짐을 속을 깊이 새기고 있을 때, 30이 넘는 이종족과 함께 걷던 오르조가 걸음을 멈춰 섰다.

‘……?’

“정원에 저런 것이 있었나?”

불쾌감이라기보다 호기심이 깃든 오르조의 목소리는 하이든에게 무척 생소했다.

그는 자동으로 오르조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백작님, 조심….”

퍽!

순간 주먹만 한 얼음덩어리가 하이든의 머리를 치고 날아갔다.

오르조의 팔찌 아티팩트에서 발현된 마법이었다.

“누가 나서라 했지?”

오르조가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유리 온실의 절대안전장치, 마나 동결을 잊은 하이든의 실수였다.

오직 오르조만이 제약받지 않는 이곳에서, 하이든은 그저 근육만 부푼 머저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이든은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을 애써 참으며 시선을 깔았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오르조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빛바랜 나무문 한짝이 허공에 떠 있었다.

오르조는 팔찌를 통해 정원을 훑었다. 마나 동결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생겨난 문이라.

“재미있군.”

무엇이 나오든 정원에서라면 자신은 신이다.

그 자신감을 믿는 오르조는 문에 달린 검은 쇠고리를 잡아 당겼다.

끼이익―

문 안으로 새로운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는 식탁에 앉아 뚝배기 라면을 먹고 있는 도현이 있었다.

“……?”

“가주님!”

하이든이 몸을 날렸다.

동시에 둘은 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현은 식탁 위 냄비 받침대에 뚝배기를 올려놓고 앉았다.

끼낏, 끼낏!

새로운 먹거리에 콧노래를 불러대는 토토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현은 라면을 한 젓가락 후르륵 씹으며 갑자기 들이닥친 두 제브라드인을 고민했다.

하나는 아저씨 나이대의 귀족이고, 다른 하나는 복장으로 봐서 기사였다.

귀족과 기사.

판타지를 상상하면 바로 떠오르는 조합일지 몰라도, 실제 제브라드에서는 보기 힘든 게 귀족이었다.

‘이번에는 초반에 다 몰려오나?’

늘 뭔가 먹을 때마다 찾아오는 놈들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오늘만큼은 영 달갑지 않았다.

저녁에는 꼭 뚝배기 라면을 먹을 생각으로 장도 서둘러 보고 본가에 가서 냉장고도 털어오고 TV 설치까지 끝내는, 처음으로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잔뜩 기대한 저녁 시간에 방해받아서인지 삐뚤어진 시선이 둘에게 닿았다.

짝!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귀족이 기사의 뺨을 내려쳤다.

“네놈… 이게 무슨 짓을 한지 아느냐! 이걸 어쩔 거냐 말이다!”

기사는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이어지는 구타를 순순히 맞고 있었다.

도현이 인상을 썼다.

‘저래서 귀족은 싫다니까.’

가뜩이나 저녁을 방해받아 언짢은 마음이 더 불쾌해졌다.

“남의 집에서 무슨 짓이지?”

도현의 목소리에 멈칫한 귀족이 느릿하게 돌아봤다.

몸에 밴 귀족 품의, 모든 걸 자신 아래로 보는 거만한 눈빛으로 도현을 훑는다.

문을 넘어오며 이곳이 제브라드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에 도현은 조소를 지었다.

자신의 수행기사에게 벌을 주면서 보는 사람까지 주눅 들게 만드는, 귀족다운 수법이었다.

“자넨 누군가?”

긴장감을 찾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분명 저 행위는 자신이 우위라는 기죽이기였다.

‘하여간, 4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족속들이야.’

도현은 이번만큼은 정말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거기 조용히 앉아있다 다시 문 열리면 가라.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뚝배기 속 라면을 휘적거리며 말한 도현은 라면이 불어버린 걸 확인하고 얼굴을 구겼다. 겨우 한 젓가락 했을 뿐인데, 저놈 때문에 저녁도, 기분도, 분위기도 다 망쳤다.

라면을 다시 끓일 생각으로 일어나는 도현의 귀에 귀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드래곤… 그러니까, 헤츨링인가?”

디테일한 물음에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비벼볼 만하다고 생각한 물음이다.

아무리 헤츨링이라 한들, 아티팩트를 쳐발랐다 해도 마나의 축복을 받은 드래곤을 이길 수 없었다.

뭐든 글로 배우면 경험까지 쌓이는 줄 아는 족속들이 귀족인 걸 잠시 까먹었다.

싸늘한 눈초리가 귀족에게 꽂혔다. 도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조용히 입 닥치고 있다가 가라.”

순간 귀족의 얼굴이 화근 달아올랐다. 한마디 하려 하는데 그 앞을 막고 나선 건 매 맞고 있던 기사였다.

“무엄하다! 감히 오르조 카 페일라드 가주님께 무슨 망발이냐!”

진한 살기가 파도처럼 도현을 덮쳤다.

평민이었다면 오줌을 지리고 기절했을 위협적이지만, 도현에게는 그저 모기 한 마리가 앵앵거리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키이이잇!”

아, 토토….

살기에 깜짝 놀란 토토가 털을 쭈뼛 세우며 식탁에서 뛰어 내렸다.

도현은 자신의 품에 안기려는 줄 알았지만, 토토는 도현의 앞에 네발로 섰다.

“캬아아악!”

몸을 낮추곤 털과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이를 드러낸다.

몸집이 컸다면 꽤 위협적인 모습이겠지만, 이제 겨우 30센티가 될까 말까 한 크기다.

앙칼진 강아지가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곰을 향해 달려드는 기세였다.

오롯이 주인인 도현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부모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토토였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도현은 울컥했다.

따뜻하면서도 울렁거리는 묘한 느낌. 자신을 부모라 생각한다지만, 태어난 지 이제 이틀 된 짐승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니.

묘한 고양감에 젖어 들었을 때쯤, 귀족은 앞을 막은 기사를 옆으로 젖히며 토토에게 흥미를 보였다.

“호오, 원숭이인가? 그런 것 치고 붉은 털과 충성심은 수인족에 가까운데? 아놀드에게 주면 좋겠군.”

듣자마자 도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건 폐기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괜히 나서서 매를 번다.

도현이 혀를 차며 손을 들었을 때, 귀족이 한발 빨랐다.

팔찌에서 푸른빛이 토토를 향해 쏘아진 것이다.

“잡아라!”

귀족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인상을 쓰며 손에 들린 젓가락을 던졌다.

비수처럼 날아간 젓가락이 푸른빛을 먹어버리고 거실 바닥에 꽂혔다.

드르륵!

검지 한마디만큼 푹 꽂힌 젓가락 끝이 짐승의 꼬리처럼 파르르 떨렸다.

“뭐, 뭣?!”

이젠 당황한 귀족의 목소리도 불쾌했다. 당장이라도 저놈의 목을 따버리고 싶지만, 적의를 느끼고 달려 드려는 토토가 우선이었다.

“키잇! 키익! 키익!”

서둘러 토토를 끌어안자 항의성 짙은 울음을 토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면 화가 수그러들겠지만, 도현은 다른 선택을 했다.

퉁퉁 불은 라면이 든 뚝배기를 들었다.

아직 경악 중인 귀족이 눈에 들어왔다.

도현의 몸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곳은 귀족의 앞이었다.

빠각!

“커억!”

뼈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귀족의 머리가 돌아간다. 뚝배기에서 흘러넘친 라면과 국물이 거실에 비산했다.

철퍼덕.

개구리처럼 거실 바닥에 대짜로 뻗은 귀족을 뒤로 경악한 기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꿀꺽!

포식자 앞에 놓인 먹이처럼 오들오들 떨어대는 모습에 화보단 짜증이 났다.

들어오자마자 당한 구타. 자잘한 상처들이 있었지만, 신경 안 써도 될 정도다.

심한 곳은 머리인데, 이건 들어오기 전부터 있던 상처였다.

‘뻔하군.’

능력은 있지만 배경이 없는 기사.

그래서 그 능력만 파는, 무식한 놈들.

페론드와 한참 심시티를 할 때 갱생 시켰던 한 놈과 빼박으로 닮은 꼴이다.

‘어째 이 레퍼토리는 달라지지 않냐.’

도현은 다시 끌어 오르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식탁을 향해 턱짓했다.

“이야기 좀 하자.”

“예, 옙!”

감각기관에 무리가 왔을 텐데도 벌떡 일어난 하이든은 긴장 때문인지 뻣뻣하게 걷기 시작했다.

도현이 식탁을 향해 걸었다. 발이 닿는 바닥마다 물감이 퍼지듯, 더러워진 거실이 깨끗해져갔다.

도현은 손에 든 뚝배기를 싱크대 안에 넣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안겨있던 토토가 평소 모습대로 식탁 위 지정석에 앉자 거실이 고요해졌다.

그 속에서 제일 불편한 사람은 하이든이었다.

잔뜩 긴장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저 내릴 것 같이 흔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떻게든 오르조를 훼방 놓을 생각만 했다.

또 노예가 늘어나게 될 테니까.

예상과 달리 상황이 바뀌었다.

아니,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 틀어졌다고 해야 할까.

오르조가 검고 두꺼운 그릇에 맞았을 때는 생각도 못 한 쾌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오르조를 피떡으로 만든 이와의 독대.

하이든은 아직도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몇 번이고 뻥긋대기만 하던 그는 오르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드래곤이십니까…?”

“아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하이든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아직도 눈앞의 이 사람이 무엇인지 가늠이 안 됐다.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평민들이 몸속에 갖고 있는 마나보다 약간 적다.

하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배어 나오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빈틈이 없다…!’

현재 가만히 자신을 주시하는 도현의 몸을 아무리 훑어봐도 완전무결한 방패 하나를 보고 있는 듯했다.

‘방금 전에도 그랬지….’

오르조가 저 짐승을 향해 아티팩트를 발동했을 때.

그저 손에 들린 짧은 막대기를 던지는 것으로 없애버렸다.

무언가 만들어내는 시동어나 마법을 발현하기 위한 주문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식탁으로 걸어오는 동안 그 난장판이 자연스럽게 정리되던 상황이 떠오르자 꼬리뼈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드래곤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드래곤이 아니라니….’

……!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그럼 신…!”

“아니.”

대체 뭐란 말인가!

맥이 탁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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